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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별곡 ㅣ 푸른도서관 26
박윤규 지음 / 푸른책들 / 2008년 11월
평점 :
별곡이 뭐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사전을 뒤져보니, 중국 음악을 정곡이라 한 것에 대해 우리 가요를 이르던 말이었다 한다. 혼잣 생각이지만 원래는 그랬으되, 작자들이 자기 노래를 겸손하게 칭하려 붙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별곡이 붙은 노래들을 보면 남에게 쉬 털어놓지 못하는 진한 감정들이 묻어나는 게 아닐까 싶고. <천년별곡>도 그렇다. 진하다 못해 소 천 마리를 잡은 듯(이 책 중의 한 대목을 빌림) 붉은 핏물이 배어 처절하고 가슴 아프다. 사랑이라고 하려면 좋이 천 년은 가야 한다는 비장한 선언처럼도 읽힌다. 열여섯 나이의 붉은 마음이 기어이 천 년을 가는 슬픈 노래 <천년별곡>.
그야말로 노래이다. 고려가요의 형식을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웅얼웅얼 높아졌다 낮아졌다 내질렀다 속으로 감추는 긴 노래. 고려가요 <가시리> <정과정> <사모곡> <서경별곡> <청산별곡> 등의 후렴구가 음을 맞추며 시시때때로 등장하는 것까지 갈 데 없는 고려가요다. 책을 읽는 동안 고등학교 때의 국어시간으로 돌아가 선생님의 구수하고 낭랑한 음성을 듣는 듯한 느낌이 되었다. 독특한 후렴구에 아이들이 킥킥대고 웃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동>이며, 특히 <청산별곡>을 구성지게 읊으시던 선생님.
천 년 왕조의 공주였던 소녀는 나라가 망하며 호위무사의 손에 한적한 절로 몸을 숨긴다. 그곳에서 삼단 같은 머리채의 호위무사와 사랑한 백 일. 그리고 임금을 위해 떠나는 호위무사는 혼령이라도 돌아오겠노라 약속하지만, 어느덧 소녀의 머리는 호호백발이 된다. 하루도 빠짐없이 정인을 기다리던 언덕에서 소녀는 주목나무로 화한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나무는 천 년 동안의 일을 우리에게 들려주는데, 그 이후 세월은 헤아려보지 않았다 한다.
신라였곘지? 천 년 왕조라 함은? 이후 나라는 전쟁을 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고, 새로운 왕조가 이전의 왕조를 내몰고, 북으로부터 침략을 당해 임금이 피난하고, 동쪽 바다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결국 그들에게 나라를 빼앗긴다. 그러고도 마침내 우리 민족끼리 싸우고 피를 흘리고, 나라는 반동강난다. 그 세월 동안, 님은 오지 않는다. 전쟁이 생길 때마다 그나마 찾아온 이들은 다시 떠나고, 주목나무의 기다림은 깊어지고 깊어진다.
나는 이 노래의 결말에 왠지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그저, 그리움으로만, 핏빛 그리움으로만 남겼으면 어땠을까. 세상이 그럴 때, 간 사람이 이러저러하게 돌아온다는 건 어쩌면 억지가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윤회라고? 그보다는 주목나무의 사랑이 더 크고, 넓어졌다고 할 일이다. 그저 물아일체의 경지.
아무튼 독특하기 이를 데 없고, 아름답고 절절한 노래이다. 하이 테크놀러지의 시대에 이처럼 예스럽고, 그러면서 새로운 노래를 내놓다니! 언제 딸들과 낭독해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