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3
서머싯 몸 지음, 송무 옮김, 나현정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책에 대한 갈증이 좀 있던 아이였던 나는 내몫의 책을 읽어치우고 나면 어른들의 책이 무겁게 꽂힌 책장을 자주 기웃거렸다. 거기 서머싯 몸의 책이 있었다. <인간의 굴레/달과 6펜스>가 합본된 무거운 책. 힘에 부쳐 그 책을 기어이 읽지 못했는데, <아Q정전> 등 다른 책을 거의 다 읽어보았던 것을 생각하면 묘한 일이기도 하다. 이후로도 <달과 6펜스>는 읽어보자고 마음을 먹을 때마다 다른 책에 밀려 지금껏 거들떠보지 못헀고, 늘 숙제처럼 걸려 있었다. 그러니 우리집에 날아온 이 책이 유난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예술과 예술가, 그리고 '나'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한 남자가 어느 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는 말, 현실에서 가능하기란 그야말로 불가능이다. '모든 것'에는 가정(아내와 자식, 등 따습고 배 부른 안락함, 노후)와 돈(직장, 재상), 관계(친인척, 친구, 지인, 이웃) 등이 포함된다.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보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들인데, 그걸 버렸다. 그가 바로 찰스 스트릭랜드다.

그는 버린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실천한다. 일절 연락하지 않으며, 그들이 울든 죽든 신경을 꺼버린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후원자 역할을 한 선량한 화가의 아내를 가로채고 그녀를 버리고 죽게 만든다. 그러고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그 자신의 배고픔이나 신체적 고통에도 무심한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다. 예술(그림).

그는 오 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다 겪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는 편안한 삶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꾀죄죄한 단칸방에 살면서 비참해하지 않았고, 좋은 가구를 원하지도 않았다.......예민한 성격인데도 그런 면에서는 철저하게 무심했다. 가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정신적인 삶만을 추구했다.-74쪽.

어쩌면 스트릭랜드는 우리가 예술에 대해 지니고 있는 관념, 그것을 실천해 보여준 인물일 수도 있겠다. 예술가는 배고프고, 그러면서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로지 한층 높은 세계로만 눈을 고정시키는 인물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예술가는 거의 없다. 예술가도 사람이기 때문에 오욕칠정을 벗어날 수 없다. 그걸 벗어난 인물을 우리는 성인이라고 부른다. 인류사에 성인이 몇이나 되나...

예전에 <예술가와 돈, 그 열정과 탐욕>이라는 책을 번역한 일이 있다. 그 책이 바로 그런 얘기다. 예술가도 사람이고, 돈을 벌고자 하며, 온갖 관계에 매어 지리멸렬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예술가가 아니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이야기. 돈은 예술의 훌륭한 동인이기도 하다는 이야기. '도대체 누가 그렇게 돈 때문에 울고 웃더냐.'고 물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거장들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고갱도 끼어 있다.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고갱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책 뒤편의 해설에 따르면 증권 브로커이던 고갱은 증권시장 붕괴 때문에 가족에 의해 버림받았다. 역시 돈이 문제였다. 그가 타히티로 간 것은, 일종의 떠밀림이었을 공산이 크다. 비록 그가 그곳에서 천국을 발견하고, 이승의 모든 것을 벗어버렸다고 해도 말이다.

책중 화자는 스트릭랜드를 그저 괴팍하고 이기적인 못된 놈으로 여기다가 점차 예술과 예술가를 이해하는 경지로 들어가며, 스트랙랜드와 비슷한 다른 친구,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할 줄 알게 된다. 잘 나가던 의사 노릇을 집어치우고 알렉산드리아의 풍광에 빠져 가난하게 살아가는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인격? 삶의 다른 길에서 더욱 강렬한 의미를 발견하고, 짧은 동안의 깊은 생각 끝에 출세가 보장된 길을 내동댕이치려면 아무래도 적지 않은 인격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갑작스런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더욱 대단한 인격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183쪽.

나는 이 화자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점을 높이 산다.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범인인 내가 예술가와 예술의 경지를 섣불리 이해하려들면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 되기 십상이고, 그렇다고 예술은 그저 밥벌이라는 이야기로 흘러 가려는 것을 막을 방편도 없고, 그저 생각만 좀 해 볼 일이다. 함부로 입 열기보다는.

이 책, 예술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고민하게 만든다. 달은 저 멀리 있어서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존재지만 달이 얼마나 우리 삶 깊은 곳을 좌지우지하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달을 추구하는 일, 분명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6펜스는, 당장 먹을 식량으로 바꿀 수 있다. 배고픔을 견딜 수 있는 자, 달을 꿈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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