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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소년 미로, 바다를 보다 ㅣ 마음이 자라는 나무 17
알렉스 쿠소 지음, 아이완 그림, 윤정임 옮김 / 푸른숲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소년. 미로는 '눈이 나쁜 사람'이라는 뜻의 별명이다. 친구들이 "미로."하고 부르면 "야, 눈나쁜 아이."라고 부르는 셈인데, 부르는 이나 받아들이는 이나 그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미로는 자기 눈이 멀었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일로 자조적이 되거나 남에게 공격적이 되거나 하지 않으며, 친구들도 특별히 봐 준다는 분위기가 아니라 함께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만 도와준다. 한마디로 소년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호들갑이 없다. 심지어 동네의 팔뤼슈 할아버지는 잡아온 물고기의 내장을 발라내는 일을 미로에게 맡기거나 툭하면 "네 눈엔 내가 늙은 게 안 보이냐?"고 묻기까지 한다.
팔뤼슈 할아버지는 미로에게 친구이자 자신의 먼 미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미로나 뤼카, 집시 소년 니노, 그리고 미로의 여자친구가 된 륀까지도 팔뤼슈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묶여 있는 것은 그런 이유다. 살아온 날과 현재뿐 아니라 살아갈 날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트인 마음. 그건 마치 바다와도 닮았다. 어부인 팔뤼슈 할아버지는 미로에게 눈멀어서 보이지 않는다는 자괴감을 없애주고, 바다에서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이 매한가지라는 걸 가르쳐준 인물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미로와 동행한 낚시에서 곰치를 잡으려다 손을 물린다. 그리고 병원에 실려간다. 미로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함께 느꼈다. 아마 곰치는 늙음, 가난, 외로움, 질병, 사고 따위를 상징하는 인생의 장애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자신이 늙고 병들었고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이라는 현실에 맞닥뜨린다. 미로는 어떻게든 할아버지를 원래로 돌려놓고 싶어한다. 할아버지의 단 하나의 혈육인 누이동생들 찾아나서보기도 하고, 퇴원 후 양로원에 들어간 할아버지를 탈출시키려 친구들과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동네 이웃 할아버지를 마치 자기 자신처럼 여기는 아이 미로. 사람이 눈으로 보는 것과 상대를 아는 것에는 어느 만큼의 차이가 있을까? 미로가 팔뤼슈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은 그 아이와 할아버지 사이에 어느 만큼의 장애물이 되었을까? 그 반대이다. 미로의 시각장애가 오히려 두 사람이 더욱 결속할 수 있는 접착제가 되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열네 살 미로의 첫 입맞춤이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으로 인해 어떤 장애를 받았을까? 아마 반대로 미로는 온몸으로 소녀의 입술을 느꼈을 것이다.
미로는 자신이 보아야 할 것들을 다 본다. 몸의 눈에 방해받아 진실을 보지 못하기 십상인 우리들 대다수보다 더 깊은 것들을 본다. 진실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안으로 느끼는 것이므로. 그래서 미로에게 눈멂은 장애가 아니라 타인과의 굵은 결속의 끈일 뿐이다. 하지만 미로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막지 못했듯이, 그 아이의 삶에는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숱한 희로애락이 있을 것이다. 미로의 눈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우는 일이 그에게 많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