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하늘이다 푸른도서관 23
이윤희 지음 / 푸른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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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국어 공책을 넘겨보다가 ‘달콤한 소금이란 있을 수 없듯이 좋은 전쟁도 있을 수 없다.’는 글을 발견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생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녀석이 벌써 이런 공부를 하는구나, 하는 감회와 함께 여러 생각이 밀려들었다.


  마침 <네가 하늘이다>의 마지막 한 장을 넘기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소설 <네가 하늘이다>는 마치 그때 그 일 년여의 시간이 그랬던 것처럼 길고도 슬프고 아팠다. 눈물이 한참이나 흘러내렸다. 세상에 대한 울분과 무기력증이 다시 온몸을 휩싸고 조여드는 느낌. 여전히 우리는 당시의 농민군이 죽어가며 바랐던 세상이 아닌, 억울함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신분에 의한 차별이 돈에 의한 차별로 대치되었을 뿐이며, 또 외세의 압력 또한 양상을 달리하여 횡행하고 있으므로.


  그리하여 아직도 서러운 시절을 사는 우리에게 농민군이라는 이름은 참 슬프다. 추수철을 피해 봉기하는 농민들. 주먹밥 한 덩이를 입에 넣으면서도 그것도 못 먹는 어린 아들을 생각해야 하는 아버지. 그 흰옷 입은 사람들이 죽창 하나 꼬나들고 들판을 달려 일본이 가져온 신식 총에 맞붙었다. 달리고 달려 미처 적진에 닿기도 전에 사정거리가 긴 그들의 총에 피를 흘리고 죽어갔다.
  책을 덮으며, 아스라한 기억 속에만 남았던 노래 하나를 떠올렸다.


  -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 없는 통곡이어든. 불타는 녹두 벌판에 새벽빛이 흔들린다 해도 굽이치는 저 강물위에 아침햇살 춤춘다 해도 나는 눈부시지 않아라.-   

   
  이런 1894년의 봉기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힘없는 백성이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보국안민’ 네 글자 아래 후손에게만은 이런 삶을 물려주지 않으리라 떨치고 나선 그날을. 운동? 전쟁? 양편으로 나뉘어 총을 쏘아대고 숱한 목숨이 스러졌으니 전쟁인 건가? 흔한 말로 내전이라 해 버리면, 그럼 이 역시 ‘나쁜 전쟁’이었던 걸까?

  아니다. 그건 혁명이었다. 전에 동학혁명이란 말을 자주 했었는데, 이제야 혁명이란 이름이 입에 붙어왔다. 그래, 혁명이다. 그것도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한 혁명이다. 그들의 피와 함께 그 뜻이 조선 땅에 뿌려져 세상을 바꾸는 불씨를 당겼으므로. 혁명은 사람이나 집단을 상대로 한 싸움이 아니라 잘못된 세상, 체제에 대한 싸움이다.


  하지만 많은 억울한 목숨이 세상을 떠났다. 와중에 숱한 ‘아이들’도 목숨을 잃었다.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어린아이’가 부지기수로 생기는 것이다. 세상 가장 눈물 나는 장면이란 바로 그런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동학농민혁명은 저 닳아버린 이름 ‘전쟁’이 아니었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아야 한다며, 그것이 모든 옳은 것을 대변한다고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그건 <베니스의 상인>에서나 통하는, 비참한 샤일록을 곯려주기 위한 계략일 뿐이다. 그날 흘린 숱한 피와 안타까운 넋을 부정하는 편의주의일 뿐이라는 생각을 이 책으로 해보았다. 그 피와 넋은 그야말로 좋은 세상을 위한 해방의 거름이었다. 울부짖음이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은 성공한 혁명이었다.  


  민족의 개념이 허물어지고, 바야흐로 전 지구적 공동체의 개념이 대두된다 해도 나 같은 무지렁이에게는 아직은 먼 이야기이다. 나는 ‘우리’라는 말이 동심원을 그리며 확대해 갈 때 가장 안쪽 것밖에 아직은 감싸 안지 못한다. 그래서 꽤 먹고살만해진 대한민국이, 가장 안쪽에 자리하여 아직도 눈물겹다. 맨주먹으로 일어난 그들, 동학농민군의 소원이 세월을 넘어 내 가슴에 와 박혔다. ‘좋은 전쟁’은 없어도 ‘바른 혁명’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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