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랏빛 양산이 날아오를 때 창비아동문고 240
알키 지 지음, 정혜용 옮김, 정지혜 그림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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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잔잔하고도 여운이 있는 동화책이다. 

잔잔히 높아지는 감정의 물결이 부지불식간에 절정에 다다르는데, 그걸 독자가 눈치 채지 못한다. 다만 책을 덮으며 아, 자유를 위한 절규의 순간이, 지나갔구나 하고 느낀다. 마치 작중 화자인 10살 엘레프테리아(쌍둥이 남동생들이 줄여서 레프티라고 부르는)가 순식간에 쌍둥이 손자들의 할머니로 돌아와 이야기를 맺는 것처럼. 

레프티는 중하류층 쯤 되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는 그리스 소녀다. 가부장적 권위의 화신과도 같은 아버지와 그에 순종하는 어머니, 말썽계의 장인이라고 할 두 쌍둥이 남동생과 함께 산다. 이 아이에게는 권위적인 아버지,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독일군, 부유하지만 편헙된 히파티아 부인으로 대별되는 폭력 및 억압의 백그라운드가 있고, 다정한 이층의 마르쎌 아저씨(프랑스인), 늘 유쾌한 작은아버지, 꿈을 지니고 살아가는 연극배우인 리처드씨 등의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는 백그라운가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레프티가 억압에서 자유로 향해 나아가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자는 책을 읽거나 공부를 많이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아버지의 딸에서, 안티고네로 상징되는, 자주적 의지를 지닌 강한 여성으로 성장해 가는 성장 동화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과정이 그렇게 부드럽고 차근차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라든가, 반전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까지 폭넓게 담겨 있다. 옆집 노부인의 연보랏빛 양산을 쟁취하는 일이 큰 사업인 레프티 남매에게 이 양산은 자유의 쟁취였을 거라 싶다.

할머니가 된 레프티가 나왔다가, 어린 소녀 레프티가 나왔다가, 다시 할머니인 레프티가 나와 이야기를 맺는다. 레프티는 강한 의지와 진취적 기상을 가진 당돌한 어린 소녀였는데, 말썽쟁이 손자들에게는 결국 할머니로 비쳐진다. 손자들은 레프티를 할머니로만 여긴다. 마치 어린 시절이나 풋풋한 꿈 따위는 아예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마치 프랑스 소년을 향한 푸르디 푸른 사랑 따위 한 적이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매우 강한 메시지인데도 문장 사이사이에 깊이 녹진녹진 녹아 있어, 읽다 보면 어느새 끝나 있고, 그런데 점점 되새겨지는 것이다. <작은 아씨들>을 연상케 하는데,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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