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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바늘꽃 ㅣ 카르페디엠 15
질 페이턴 월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불탄 자리에 피어나는 희귀한 식물이 분홍바늘꽃이란다. 인터넷을 뒤지니 한국자생식물원에 군락이 있다고 하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폐허에서 피어나는 꽃이라... 그러고보니 사랑과 닮았다. 숱한 가치들이 전쟁으로 사라지는 때에 유일하게 남아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는 사랑. 판도라의 상자에서 찾아낸 희망의 또 다른 이름.
분홍바늘꽃은 1940년 런던대공습을 배경으로 한 열다섯 살 소년 빌의 사랑 이야기다. 엄마 없이 아빠와 고모집에 얹혀 살던 빌은 아버지가 참전하고, 고모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안전'한 시골인 웨일즈로 보내진다. 그러나 그는 다시 런던으로 숨어든다. 낯선 곳에서 그저 몸이 안전한 것은 진실로 살아있음과는 다른 것이었던가 보았다. 열다섯 소년에게.
그리고 역시 정해진 어딘가로 보내려고만 하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떠도는 소녀 줄리와 만나 둘은 삶을 함께 한다. 죽음이 간단없이 몰려왔다 가까운 거리에서 노려보고 있는 그 상황이 빌에게 행복일 수 있었다면 줄리라는 아이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둘은 아빠와 엄마를 각각 등지고 과거의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한 채 폐허의 지하실에 온기 가득한 방을 만들고, 죽음조차 함께 맞이할 수 있는 공동생활을 영위한다.
나는 책을 보다가 다시 빌의 나이를 떠올리며, 보통의 어른들과 똑같은 의심의 시선으로 다음 장을 응시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른 무엇 필요 없이 그저 함께 하는 것으로 행복해할 따름이었다. 전쟁, 배고픔, 굶주림, 추위가 맹위를 떨쳐도 변질되지 않는 아이들. 나이도, 공포도,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란 것의 본질에 대한 예쁜 이야기.
이 책은 전쟁에 대해서도, 빌의 내면에서 일어났다 증폭되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도 매우 담담하게 묘사한다. 처절한 호소를 하지 않고, 그저 삶이 어떻게 계속되는가를 이야기하며, 웃음이, 사랑이 어떻게 이어져 나가는가를 조용하게 들려준다. 삶을 파괴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사랑의 상실이라는 이야기를.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 디키를 위해 우유를 얻으러 나간 빌의 부재 중에 줄리의 머리 위로 집이 무너져내리고, 맨손으로 땅을 파헤치던 빌과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줄리는 줄리의 부모가 등장하자 각각 다른 삶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아무 일도 없었더냐."는 줄리 오빠의 질문과, "아무 것도 없었어."라고 한 줄리의 대답은 빌에게 전쟁보다 무서운 절망이 되었다. 늘 파괴자는 기성세대이다. 빌에게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어른들의 편협한 고정관념이었으리라. 마음이 지긋이 아팠다.
예쁜 책. 큰아이에게 읽혀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