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의 기적 - 네덜란드 문학 다림세계문학 15
얍 터르 하르 지음, 유동익 옮김, 페이터르 파울 라우베르다 그림 / 다림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함께 논술했던 6학년 민정이가 제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책으로 소개한 책이다. 그렇구나, 하고 웃으며 넘겼다가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어린이책을 관심 갖고 찾던 중 또 다른 분이 이 책을 추천해주었다. 왠지 이 책, 자꾸 곁을 맴도는 느낌이라 주문목록에 넣었다. 그리고 함께 온 몇 권의 책들 중 이 책을 가장 먼저 집어들었다.

  얼마 전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과 <로베르토>를 리뷰 행사에서 받아 읽으며 전쟁이 일으킨 쪽이나 당한 쪽 모두에게 비참한 현실이었음과 그 모든 고통이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내려앉는다는 사실의 절감에 머리를 때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었는데, 이 책 역시 그런 슬픔과 아픔을 고스란히, 더 증폭해 전해주었다.어린아이에게 내린 전쟁은 그야말로 재앙이다. 그 조그만 손과 여린 어깨로 받아내기에 전쟁은 너무 무겁다. 

  독일군에게 둘러싸인 러시아 레닌그라드, 그 속에 갇힌 사람들은 점차로 춥고 배고파서 죽어가고, 보리스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병든 어머니 곁을 지킨다. 친구인 나디아는 가족 수에 딱 맞춰 배급해주는 무 수프를 조금 더 받기 위해 밤새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을 숨기는데, 그건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당시 상황에서는 사형감인 행동이다. 두 사람 몫을 더 받아들고 걷는 겁에 질린 아이들 걸음 뒤로 폭격이 퍼부어지고, 무 수프는 그만 엎질러지고 만다.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던 두 어린아이는 눈밭을 걷고 걸어 감자를 찾으러 떠나고, 거기서 독일군과 맞닥뜨린다.

  결국 모두 끝나버리는 걸까? 하지만 독일군은 쓰러진 나디아를 안아들고 러시아군으로 데려다주며, 맛있는 초콜렛과 소세지까지 내준다. 그들에게도 전쟁은 춥고 배고픈 일이었음에도.

  그러나 배우가 되고자 하며, 밤새 언 손으로 일기를 써내려간 나디아는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보리스는 어느새 전쟁의 비밀을 알아버린다. 전쟁은 독일 병사와 러시아 병사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 전쟁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고, 전쟁을 치르는 것은 그저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누나 그리고 나라는 것을. 전쟁은 모두에게서 눈물마저 빼앗아가 버리는 괴물이라는 것을.

  나디아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하루종일 비가 오고 있어. 하늘이 울고 있어. 그러나 레닌그라드에는 더이상 눈물이 없어. 모든 사람들은 너무나 용감해. 내가 겁쟁이라는 것이 비극이야."

  "엄마가 어젯밤에 돌아가셨어. / 나는 이제 혼자야. / 밖에는 눈이 내려. 레닌그라드는 이제 찢어진 외투를 입고 싸워야 해. 내가 아는 한 자유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진 다음에 오는 것이야... / 사는 것이 좋지만 죽는 것도 어렵지 않은 것 같아. 죽는 것이 한 순간에 일어날까?"

  보리스는 전쟁이 끝나고 포로로 잡혀 길거리를 걸어가는 부상당한 어린 독일군에게 초콜릿을 건넨다. 자신들에게 초콜릿을 건네주었던 독일군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사람들은 보리스를 잡어먹을 듯 노려보았지만 한 나이든 아주머니의 말은 모두의 가슴에 커다란 종소리로 울린다.

  "증오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자유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참으로 저릿한 이야기. 보리스같은 사랑을 품은 아이가 전쟁을 견디고 살아남았음이 우리가 세상을 이어나가는 힘이고, 희망이라는 안도감이 들지만 그 많은 죄없는 목숨의 값을 우리 삶에서 제대로 치르며 살아가는가 하는 회의도 든다. 역사에는 늘 비극이 도사리고 있으면서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나디아나 보리스처럼 사랑과 용서로 세상을 매만지며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책, 그저 비참하기만 한 이야기이거나, 잔인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속에 숨은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여운이 오래가는 책. 표지에는 무 수프 냄비를 든 보리스가 서 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만져본다. 이 책을 소개해 준 민정이에게 '고마워'라는 말을 조그맣게 내뱉는다. 동그란 뺨이 보리스를 닮은 민정이는 지금도 책을 많이 읽고 있겠지? 부디, 부디 너희들 인생에 전쟁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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