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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싸움 ㅣ 애지시선 48
박일환 지음 / 애지 / 2013년 6월
평점 :
연잎 막걸리 보살
내소사 지장암
요사채 앞마당에서
푸른 연잎 위에 막걸리 한 모금 부어
벗들끼리 돌려 마시는 사이
늦은 밤 산사는
고요와 더불어 처마를 낮추고
연잎이 받어들 모신
막걸리
보얗게 흥취 오른 보살님 아니신가
이튿날
지장암 일지스님이 내 주신
아침 공양도
손수 달여 주신 한 모금 차도
연잎 위로 궁글어지던
막걸리 보살님 계셨기에
연꽃 피워 올리듯
달뜬 마음으로
받아 모셨던 게 아닌가
내 마음 속 부처님도
빙그레 웃으셨던 게 아닌가
지는 싸움
꽃을 던져라
저들은 곤봉과 방패로 중무장했다
꽃을 던져라
저들은 돈으로 시장과 정보를 독점했다
그러니 꽃을 던져라
화염병과 사게폭탄 대신
꽃을 던지며 춤을 춰라
되도록이면 우아한 격렬함으로
밤이 새도록 꽃을 던지며 춤을 춰라
백번 싸워 백번 지는 싸움
그러니 싸워 이기려 하지 마라
다만 항복하지도 마라
꽃을 던지며 춤을 춰라
지치지 말고, 무릎 꿇지 말고
숲속에 들어
드릴 것이 없습니다
드릴 것이 없는 나를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무무덤
사람은 사는 일 자체가 죄업을 쌓는 일이라서
한평생 반성하며 살아도 모자란다
그런 사람들이 죽은 뒤에 둥그런 집을 지어놓고
자손이며 후손을 불러들여 절을 하게 하니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제 집 한 채 갖지 못한
뭇 생명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일이다
울진의 불영사 앞에 가면 무덤 한 채 있다
1300년을 살다 열반하셨다는 굴참나무
그루터기만 남아 삭아가는 그 위에
길손을 쉬게 해 주던 그늘이며
새들에게 내어준 너른 품이며
다람쥐들에게 보시해준 도토리며
평생 쌓아온 덕을 기려 돌맹이 하나씩 얹기 시작했으니
동산만큼 커다란 임금의 무덤이 부러울까
송덕비 앞세운 양반집 무덤이 부러울까
부처님 그림자가 비친다는
불영사 연못을 찾아가기 전에
굴참나무 무덤 앞에 합장부터 할 일이다
그림자만 좇지 말고
그림자를 내어주는 삶에 대해 생각할 일이다
애쓰는 마음
비구니 스님들만 산다는 불영사를 찾아드니
제법 널따란 고추밭이 반겨주더군요
줄기마다 빨간 고추들이 매달렸는데
돈오돈수 돈오점수
고놈들도 알 건 안다는 듯
용맹정진의 자세로 한창 약이 올라 있더군요
그 마음이 갸륵해서
나도 모르게 합장을 할 뻔했는데요
바야흐로 때는 가을이라
붉어질 건 붉어지고
떨어질 건 떨어져야 한다는
법문 한 자락
비구니 스님을 만나기도 전에 얻어듣고
내 마음도 조금은 붉어졌는데요
고추밭을 돌아 나오며
애쓰는 마음에 대해 곰곰 생각하느라
앞서간 일생을 잠시 놓치기도 했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