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시 - 누구나 가슴속엔 한 편의 시가 살고 있다
황인숙 지음, 이제하 그림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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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빵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하는 거야 저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주마시! 나, 아요?" 바바리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치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신 같았어

 

 

그러면서 오늘까지 우리 엄마는 아버지의 밥때를 꼭꼭 챙기면서 내내 잘 속았다, 잘 속였다, 고맙습니다, 그 아버지랑 오누이처럼. 올해도 목련이 공갈빵처럼 저기 저렇게 한껏 부풀어 있는 거야

 

-24~25페이지

 

 

언젠가도 여기서

 

 

언젠가도 나는 여기 앉아 있었다

이 너럭바위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가슴속 응어리를

노을을 보며 삭이고 있었다

응어리 속에는 인간의 붉은 혀가

석류알처럼 들어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슬픔의 정수리로 순한 꽃대처럼 올라가

숨결을 틔워주던 생각

감미롭던 생각

그 생각이 나를 산 아래로 데려가 잠을 재웠다

 

 

내가 뿜어냈던 그 향기를 되살리기가

이렇게도 힘들다니.....

 

-34~35페이지

 

 

삶의 무게

 

 

파지 1kg 50원

 

신문 1kg 100원

 

고철 1kg 70원

 

구리 1kg 1400원

 

상자 1kg 100원

 

양은 1kg 800원

 

스텐 1kg 400원

 

각종 깡통 1kg 50원

 

-고물상 주인 백

 

삶이 얼마나 무거워져야 가벼워지는지 모르는

허리 굽은 이가 저울 위에 그의 전부를 올려 놓는다

먼저 무게를 다 달고 난 이가 멀찍이서

그, 저울눈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견줘보고는 배식배식 웃는다

햇빛 환한 마당에는 좀 더 무거워야 가벼워지는

삶이 순해진다.

 

-50페이지

 

 

 

김씨

 

 

 

쌀을 씻어 안치는데 어머니가 안 보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가 계실 것이다

나는 김씨! 하고 부른다

사람들이 들으면 저런 싸가지 할 것이다

화장실에서 어머니가

어!

하신다

나는 빤히 알면서

뭐해?

하고 묻는다

어머니가

어, 그냥 앉아 있어 왜?

하신다

나는

그냥 불러봤어

하고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인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똥을 누려고

지금 변기 위에 앉아 계시는 어머니는

나이가 여든다섯이다

나는 어머니보다 마흔 한 살이 어리다

어려도

어머니와 아들 사인데 사십 년 정도는 친구 아닌가

밥이 끓는다

엄마, 오늘 남대문시장 갈까?

왜?

그냥

 

 

엄마가 임마 같다

 

 

-62~63페이지

 

 

사선의 빛

 

 

 

끊은 건 이제 연락밖에 없다

 

 

비관 속에서 오히려 더 빛났던

문틈으로 삐져 들어왔던

그 사선의 빛처럼

사라져가는 것을 비추는 온정을

나는

찬양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빛이

너무나 차가운 살기였다는 걸 알겠다.

이미 늦어버린 것들에게

문틈으로 삐져 들어온 빛은 살기다.

 

 

갈 데까지 간 것들에게

한 줄기 빛은 조소다.

소음 울리며 사라지는

놓쳐버린 막차의 뒤태를

바라보는 일만큼이나

허망한 조소다.

 

 

 

문득

이미 늦어버린 것들로 가득한

갈 데까지 간

그련 영화관에

가보고 싶었다.

 

 

-76~77페이지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84페이지

 

 

목소리들

 

 

 

돌, 거기까지 나와 굳어진 것들

 

빛, 새어 나오는 것들, 제 살을 벌리며

 

벽, 거기까지 밀어본 것들

 

길, 거기까지 던져진 것들

 

창, 닿지 않을 때까지

 

걸, 치밀어 오를 때까지

 

안, 떨어질 곳이 없을 때까지

 

피, 뒤엉킨 것

 

등, 세계가 놓친 것

 

색, 파혜쳐진 것, 혜집어놓은 것

 

나, 거울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

늪에는 의외로 묻을 게 많더군

 

너, 거울에서 이미 빠져나온,

허공에도 의외로 묻힌 게 많군

 

눈, 깨진 것, 산산조각 난 것

 

별, 찢어진 것

 

꿈, 피로 적신 것

 

씨, 가장 어두운 것

 

알, 거기에서도 꼭 다문 것 격렬한 것

 

뼈, 거기에서도 혼자 남은 것

 

손, 거기에서도 갈라지는

 

입, 거기에서도 붙잡힌

 

문, 성급한, 뒤늦은, 때늦은

 

몸, 그림자가 실토한 몰골

 

신, 손가락 끝에 딸려 오는 것

 

꽃, 토사물

 

물, 끓어오르는

 

칼, 목구멍까지 차오른

 

흰, 퍼드덕거리는

 

 

-136~13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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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6-03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이렇게 재미 있어도 무죄 ^^.. ㅋ

후애(厚愛) 2016-06-03 17:04   좋아요 2 | URL
저는 어려운 시보다는 재밌는 시가 좋아요.^^
즐거운 불금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