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즐거운 산지니시인선 11
표성배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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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를 한다

 

 

 

 

 

세수를 한다

 

 

 

세수하고 돌아서면 또 세수하고 싶다

 

 

 

물기를 닦고 거울을 보면 저 자신 없는 얼굴,

 

 

 

 

씻고 씻어내도 남아 있는 어두운 얼룩들

 

 

 

  박박 밀고 뽀득뽀득 문질러도 햇살이 비집고 들어올 틈

하나 없는 얼굴,

 

 

 

  무겁고 침침한 커튼 같은 벽을 걷어 내는 일은 세수를 하

는 일

 

 

 

   희미한 등불 아래 벽거울 앞에 두고 세수를 하고 또 한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피가 솟듯 피부가 발개지도

록 빡빡 문지른다

 

 

 

  세수하지 않은 얼굴을 누가 볼까 세수를 한다

 

 

 

  세수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듯

세수를 한다

 

 

 

  손발을 씻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얼굴을 씻는 일이기에

세벽부터 공을 들인다

 

 

 

  저이의 얼굴은 얼마나 자주 세수를 했기에 저리도 반짝

당당할까

 

 

 

  반질반질 광채가 날까

 

 

 

  신호위반 속도위반 한 번 하지 않았다는 듯 코가 우뚝하다

 

 

 

  어머니의 손을 오래오래 지긋이 잡아 주었다는 듯 눈매가

선하다

 

 

 

  이런 얼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더 주눅이 든다

 

 

 

  아이들 어깨가 처지는 이유가 세수하는 일에 있다는 듯

 

 

 

  아이들을 다그치느라 입은 쉴 새 없다

 

 

 

  씻다가 씻다가 피부가 벗겨지더라도 폭포 아래서 피를 토

하고 득음을 얻듯이

 

 

 

  오늘도 나는 세수를 한다

 

 

 

-36~38페이지

 

영영 가을이다

 

 

 

가을이다 아니

 

 

귀뚜리가 우는 것을 보니 가을이다

 

 

     시집을 살짝 펼치면 파란 하늘이 보이겠지 파란 하늘에

빨랫줄 같은 흰 선을 팽팽하게 당겨두고 비행기 한 대 날아

나오겠지

 

 

  조는 듯 빨랫줄에 앉아 있던 고추잠자리 떼들 왕창 비행기

를 따라 나와서는 그 얇은 날개를 서로 부딪칠 듯 가을이다

 

 

  붉게 물드는 단풍잎을 좀 구경하다 심심하면 심심해서

 

 

  가을이다 가을이니까

 

 

 

  시집을 펼쳐놓고 좀 멍하게 앉아 있어도 좋겟지

 

 

  가을은 좀 느슨해도 괜찮으니까

 

 

  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자전거 한 대 있으면 더 좋겠지

 

 

  멀리 산 우듬지에는 파란 하늘 흰 구름 몇 걸려 있고, 자전

거 긴 머리카락 바람을 가르며 아! 나도 저 머리카락을 따라

 코스모스 길을 달려가겠지 달려가다 달려가다 머리카락 사

이로 해는 지고

 

 

   어이쿠, 이런!

 

 

   시집을 펼쳐놓고는 가을이다 가을이라

 

 

   그만 덮는 것을 잊어버렸지 뭡니까

 

 

  아직도 그 시집 속에서 비행기가 고추잠자리가 귀뚜리가

오, 곱게 물든 단풍이 그래요

 

 

   코스모스 길만은 살짝 도로 집어넣어 자전거 긴 머리카락

이 가을이 다 가도록 좔좔 체인 소리 영영 시집을 덮지 못하

겠어요

 

 

  내가 시집을 덮지 않으면 영영 가을이다

 

 

-39~4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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