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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즐거운 ㅣ 산지니시인선 11
표성배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평점 :
참 좋겠네
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시(時) 한편 쓰는 심정으로 심어야겠네
한 쪽으로 약간 기울게 심어야겠네
햇볕이 한 쪽으로 돌아간다고 심어야겠네
바람이 한 쪽에서만 분다고 심어야겠네
가끔 편지가 는개처럼 와 주었으면 하고 심어야겠네
기다리는 마음도 함께 심어야겠네
장장 애채가 지붕처럼 우거지면 좋겠네
그런 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당신이 그 나무 아래 잠시라도 머물러 주기라도 한다면
참 좋겠네
-14~15페이지
마지막 말 같은
한 나무가 한 나무에게 손을 건네요
잡을 듯 잡을 듯 손을 건네요
달빛 아래 그림자처럼 슬쩍 손을 건네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괘종소리처럼 손을 건네요
내리막길엔 속도가 좀 불어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손
을 건네요
다 내려가기 전에 갱상도 사내들처럼 툭 손을 건네요
마지막 말 같은 손을 건네요
사랑해요 손을 건네요
단 한 번쯤은 일방적으로 바람처럼 손을 건네요
사랑해요 손을 건네요
-26~27페이지
바위에 살짝 엉덩이를 걸쳐봐
산을 오르다 바위에 살짝 엉덩이를 걸쳐봐
가만히 숨 쉬고 숨 내뱉는 동안 바위의 어깨가 살짝 들썩
이는데
바위를 감싼 이끼는 나의 이불처럼 포근하여 바위가 내뱉
는 숨소리 따라 내 숨도 자지러지는데
스르르 잠들 것만 같은데
멀리 무뚝뚝하지만 튼실한 어깨를 가진 바위의 아침이 보
이고 바위처럼 단단한 어깨를 가졌던 내 아버지가 보이고
따라, 앞산 이마가 가물 잠잠해지는데
저만치 새 한 마리 날아가고 한참, 산꿩 울음소리 따라 들
리고 한참, 한참을 그렇게 해 지는 앞산만 바라보는데
바위에 살짝 엉덩이를 걸쳤을 뿐인데
-28~29페이지
집
꽃이 진 벚나무 아래를
파란 잎들로 뒤덮인 벚나무 아래를
꽃 피었던 벚나무를 기억하지 못하는 벚나무 아래를
잎이 지고 벌거벗은 민둥산처럼 겨울을 나고 다시 꽃이 핀
벚나무 아래를
꽃의 그림자만 기억하는 네모난 보도블록 그 틈새를
개미들이 줄지어 가는 벚나무 아래를
소나기 한 줄기 확 쏟아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마른
벚나무 아래를
시간마저 잊어버린 백발의 부부가 한참 그늘을 쐬고 있는
벚나무 아래를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가 쌩앵 바람처럼 지나가는 벚나무
아래를
그 벚나무 아래를 떠나지 못하는 벚나무의 자손들이 마당
을 쓸고 화단을 가꾸기도 하고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를 깨
끗이 정돈하기도 하고 낮잠을 즐기는 게으른 시간을 깨워보
기도 하는 벚나무 아래를, 벚나무 아래마저 기억하지 못하
는 벚나무 아래에
꽃이 피고 꽃이 언제 졌냐는 듯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처럼
당신과 한 살림 차리고 싶은 이런 집 어디 있을까요?
-32~33페이지
좋은 시들이 참 많아요~
많이 올리고 싶었지만 천천히~
행복하게 즐독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