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시선 387
문태준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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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10페이지

 

 

 

 

 

 

아침을 기리는 노래




시간은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나누어주시네
햇볕,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통의 물을 길어오네
물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번째, 분수의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

누구에게라도 미리 묻지 않는다면




나는 스케치북에 새를 그리고 있네
나는 긴 나뭇가지를 그려넣어 새를 앉히고 싶네
수다스런 덤불을 스케치북 속으로 옮겨 심고 싶네
그러나 새는 훨씬 활동적이어서 높은 하늘을 더 사랑할지 모르지
새의 의중을 물어보기로 했네
새의 답변을 기다려보기로 했네
나는 새의 언어로 새에게 자세히 물어
새의 뜻대로 배경을 만들어가기로 했네
새에게 미리 묻지 않는다면
새는 완성된 그림을 바꿔달라고
스케치북 속에서 첫울음을 울기 시작하겠지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요를 깔고 아주 아겨붕ㄴ 이불을 덮고 있네
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
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
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
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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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나니총총 2015-05-09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좋은글귀 들 많이 보고 갑니다.
이런 사랑방이 있는줄 몰랐어요.
다녀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종종 이곳 사랑방에 좋은글 보러 다녀갈게요.~~^^

후애(厚愛) 2015-05-10 11:3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 서재에 방문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꾸벅
좋은 시집을 선물로 받아서 올렸는데 이리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댓글 남겨서 주셔서 참 좋고 행복하네요.^^
편안한 주말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