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항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29
이강산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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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산신각 터 벼랑 끝은 가을이다

 

 

벼랑 아래 가을은 어쩌다, 저토록 깊어서

손금 가늘고 빛이 옅다

이 가을에 닿기 전 쉰 번쯤 고비를 넘겼을 듯하다

 

 

도토리 한 분 집 떠나는 소리가 우레다

빈 손, 먼 길 아니더냐

물어올 듯 꽉 다문 입술이 붉다

홀로 걸어와 모르겠노라, 고요히 나도 붉은 침묵이다

 

 

 

품고 온 사람 모두 부려놓았는지

저 가벼운, 투명한 나비 한 마리, 체송화 못 본 척

돌숲으로 총총총 걸어가는

도토리도 나도 신발 끈을 고쳐 묶는 구절사

 

 

벼랑 끝에 홀로 선 가을도 어언 벼랑 끝이다

 

-13페이지

모과가 붉어지는 이유




그러니까 내가 이 골목을 고집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늦바람이 든 거다



곰곰 짚어보자면 바람은 생의 발단쯤에서 복선처럼 스쳐갔던 것,


절정의 뒤꼍에서 가으내 골목 힐끔대는 이 노릇이란
내게 휘어질 생의 굽이가 한 마디쯤 더 남아 있는 탓이려니,



때도 없이 붉어지다 뼈가 부러진 옆집 대추나무 훔쳐보듯 은근슬쩍 바라보면
봉충다리 막냇누이의 봉숭아물 같은, 눈물 같은


선홍(鮮紅),



누군가의 연모 지우려 제 스스로 허벅지 찌르지 않고서야
저토록 노랗게 붉어질 이유가 없지 않느냐



늦바람이 든 거다
저도 나처럼 울긋불긋 바람의 단풍이 든 거다

진흙밭




황태탕 먹다 내려다보니 그 어른 참 고우시다



톡톡 살갗 터뜨려 이룬 생의 무늬들 눈부시다



맨발로 걸어온 길이 천 갈래 만 갈래 또렷하다



뒤엉킨 밥풀조차 수련인 듯 뽀오얀 진흙밭이다

저수지




김치찌개 냄비에서 고기가 또 낚이는 것이다



밥그릇은 어언 밑바닥이 들여다보이는데



둘이나 셋쯤 끝날 줄 알고, 푹, 푹 숟가락질 했는데



냄비 기슭에서조차 돼지비늘이 튀는 것이다



물속이, 주인 여자가 두어 길 저수지여서



진흙에 빠진 듯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다

웃다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에 앉아 만원 열차를 보내고 열차를 기다린다



ㅡ아......, 배고파

옆자리 여자의 목소리가 십 리는 가라앉았다
가까스로 입술을 떼는,
마른 몸을 톡 튕기면 주르르 뼈들이 흘러내리겠다



ㅡ엄마, 참아

엄마의 옆구리에 파묻힌 형제가 이구동성이다
둘이 합해 열 살쯤 될까
참을 수는 있을까



엄마도 형제도 더는 가라앉을 바닥이 없는 지하철
여자는 침묵이다
여자와 나 사이 한 뼘 거리가 건널 수 없는 심연이다



몸집 큰 여자가 심연 속으로 철벙철벙, 안개꽃을 안고 걸
어온다
꽃다발이 여자의 얼굴을 다 가렸다



ㅡ얘들아, 저 꽃 봐

꽃을 향해 엄마가 일어선다
꽃에 대한 기억이 사무치는지 숨죽여 웃는다



열 살이 따라 웃는다
나도 웃는다
열차가 웃고 꽃이 하얗게, 하얗게 웃는다





대둔산 오르막 삼거리, 노점상 여인이 인사한다.
차를 향해 열 배 스무 배 한다.
허리가 반나마 접힌다.
골짜기처럼 깊다.
깊어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안심사 10킬로미터......
길에서 절이 주춤한다.
어디로 가나.
옥수수 품고 가는 내게로 오나,
나를 품고 가는 옥수수에게로 오나.
안심사 2킬로미터, 저만치 절이 앞서 간다.

아카시아




어젯밤 부들부들 손 떨며 쌀밥에 숟가락 꽂던 늙어 가장이
보란 듯 꽃을 피웠다



상추쌈이 흔들려 된장 덩어리가 엄지발톱 위로 떨어졌
는데, 발가락이 떨렸는데



대추씨 같은 몸속으로 상추쌈 밀어 넣으며 젖 먹던 힘 쏟
은 게 분명할 꽃이 피었다



꽃씬 줄 모르고 된장 주워 삼킨 손자 놈 고추에도 몽글몽
글 꽃망울 맺히는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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