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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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



1
느티나무를 돌고 마을 앞을 지나 신작로로 나가면
종일 통통대며 쌀겨를 날리는 정미소가 있고
매화가 피어 담 밖을 넘겨다보는 연초조합이 있었다.
병원이 있고 싸전 앞에 말강구네 밤나무집이 있고
그 아래 친구네 어머니가 빈대떡을 부치는 술집은
구수한 참기름 내와 술 취한 사람들로 늘 붐볐다.
양조장과 문방구와 잡화점과 포목점을 지나야
할머니와 삼촌이 국수틀을 돌리는 가게가 있었다.
할머니가 구워주는 국수 꼬랑지를 먹으러
나는 하루에도 여러차례 이 길을 오고 갔다.
어두워도 나는 이 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게마다 대롱대롱 매달린 전깃불이 동무였다.-11~13쪽

2
그날이면 아버지와 당숙들은 흰 두루마기를 차려입었다.
노란 들국화와 보랏빛 쑥부쟁이가 깔린 산자락을 오르면
갓을 쓴 일가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이 모여 있었다.
산소에 돌아가며 절을 하고 나면 할아버지들은
콧물을 훌쩍이는 우리들의 주머니를 다투어
대추와 밤과 곶감과 다식으로 채워주었다.
어른들은 이내 둘러앉아 술과 부침개를 먹으면서
누가 죽고 누가 잡혀갔다며 목소리를 죽였지만
모처럼 모인 아이들은 구슬치기로 신명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와 당숙들은 주막엘 들르고
먼저 돌아온 우리가 마중을 가야 자리를 뜨는데
비틀대는 어른들 어깨 너머엔 둥그런 달이 떠 있었다.-11~13쪽

3
장날이 우리 집은 그대로 잔칫날이었다.
아버지 광구에서 일하는 광부의 아낙들이 몰려와
아침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는 국수를 삶고 전을 부쳐댔고
아이들까지 따라와 종일 북새를 쳤다.
억센 사투리로 늘어놓는 돈타령 양식 타령이
노래판으로 바뀔 때쯤엔 남정네들도 한둘 나타나
어느새 마당에서는 풍물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이런 날일수록 아버지는 늦어서야 돌아왔다.
할머니를 따라가 광에서 훌쭉한 쌀자루를 들고
사내와 아이들을 챙겨 뒷문을 나서는
아낙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이윽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마을 뒷길에서
새파란 칸델라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흔들렸다.-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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