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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원성 글.그림 / 이레 / 1999년 8월
절판
도반*
도반이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어느 곳에 이르러서는 혼자일 것이라 생각했던 때에도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웃고 떠들 땐 마냥 좋다가도 다툼이 있을 적에는
매몰찬 등돌림. 더러는 서먹서먹
눈치만 살피는 그런 정겨움도 있었습니다.
함께 3천 배 참회를 하였음에도
오히려 풀리지 않던 나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던 그였습니다.
서로 엄마 이야기를 하며 밤새 눈물로 지새웠던
혈육 같은 정도 함께 했습니다.
하얀 병실에서
정작 그리웠던 건 도반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묵묵히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함께 살고 있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언제나 마음 안에 도반을 품고 있으니
우리는 언제나 함께입니다.
*선, 도의 길을 함께 공부하는 동반자.
- 57쪽
행자 시절
계곡에서 걸레를 빨고 쓸고 닦고 또 닦고
포마이카 저리 가라 윤기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샘가에서 찾잔을 씻고
장군수 한 동이 떠다가 물을 끓여
고운 다포 골라 다관 위에 얹어놓으면
녹빛 향그러움에 마시지 않아도 다향삼매茶香三昧.
햇살이 지나칠 땐 대발 걸어 드리우고
찬바람 제법일 땐 구멍 난 창호지문 메웠다.
온 세상이 하얗게 눈 덮인 날이라도 좋아라.
그렇게 온종일 눈 쓸다 날 저물고.
봄나물 고개를 쳐들면 냉리랑 쑥이랑 고사리 할 것 없이 따서
산딸기 지천일 땐 소쿠리 가득 담았지.
들국화 한창일 때 그 누가 말했던가
말린 국화 베개는 몸에 좋다고.
깨끗이 씻어 놓은 하얀 고무신 댓돌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고
풀질하여 물 뿌리고 비비고 밟아 끝없는 손질과 함께
두루마기, 적삼, 옷선 따라 다릴 땐 그 정성, 하늘만 알아.
출타하시는 은사 스님 뒷모습만 보아도
가슴 두근 좋기만 했던 행자 시절.- 58쪽
깊은 밤 홀로,
나의 도반은 마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62쪽
지대방*
여름 한낮
모두 낮잠을 잡니다.
금강경이랑 치문책은 꿈속에 새기고요.
나의 믿음인 님을 향해
발만 뻗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지대방 우리 도반 스님들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 얘기 저 얘기
솔바람 차 향기
대발에 걸어두고
지대방
향그러운 정이 우러나는 곳.
*스님들의 휴식공간- 69쪽
깨달음의 네 가지 소리
산사의 새날을 고하는
우렁찬 울림 소리. 법고法鼓.
영혼을 맑게 하는 범종梵鐘은
거룩한 부처님 음성.
산새들과 물고기에게 들려 주는
목어木魚. 운판雲版.
이른 새벽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들려 주는
깨달음의 울림 소리.
그대는 아시는가요.
사물의 의미를.- 70~71쪽
청솔 아래서
청솔 가지에 누웠습니다.
푸른 하늘이 곱기만 하네요.
조용히 눈을 감으면
산새들 울음 소리
시냇물 소리
바람이 연주하는
산대나무, 풀잎 소리...
이대로 드러누워
나무가 될래요.
바람이 될래요.
산이 될래요.- 72쪽
산사에서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사람 온다던데
부지런히 고무신도 빨고 양말도 빨고
옷 중에 제일 좋은 옷도 마름질해 입었는데
돌담 따라 큰 절 한 바퀴
작은 암자들 문전에서 한 바퀴
탑전을 돌아 일주문 앞에서
한참을 앉았더랬는데
간밤 달무리져서 비가 올까 걱정했는데
땅바닥에 한길 가들 이름을 써 보았는데
해질녘엔 까마귀만 까옥까옥
까마귀 울면 나쁘다던데
까마귀 울면 망조 들 징조라던데
내겐 까치도 울고 까마귀도 울고
까마귀 더 자주 울고
이젠 까치만 울어라.
까치만 울어라.- 74쪽
호수와 소년
옛 고승들이 수시로 포행했다는 외골짜기 숲길.
고목들과 산대나무가 우거져 그늘만이 드리워진 그 길 끝에
작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호수 위에는 언제나 달이 잠들고 구름이 머물고 하늘이 발을
담그어 푸른 향내음이 있다.
짙은 고요함이 있다.
이따금 산수유 붉은 멍울이 물가를 어지럽혀도 호수는 평화롭다.
물 속에는 나보다 더 예쁜 소년이 살고 있다.
더 맑은 눈빛으로 더 진실한 마음으로 나를 맞이한다.
이따금 소년은 펑펑 울다가도 금세 웃곤 한다.
때로 그 소년의 변덕이 싫어질 때면 돌을 던지기도 하지만,
소년은 등을 돌리는 일은 없다.
옛 고승들과 함께 했을 소년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다.
아무런 말을 해 주지 않는 소년이, 내 얘기만 들어 주는 소년이 밉지만은 않다.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고 벌거벗고 누워 있을 때 언제나 함께하는 그가 있어 좋다.걱정스러운 것은 소년은 너무 감성적이어서 내가 떠나가 버리면 쓸쓸해 하지 않을까 하는 가엾음이 나를 이 호수로 자주 찾아오게끔 하는 이유다.- 78쪽
호수 위에는 언제나 햇살이 머물고 달빛을 안고 바람이 잠을 잔다.
녹음이 우거져 푸르름을 간직한 호수에는 철없는 소년이 살고 있다.
그 소년이 보고 싶다.
그 소년이 너무도 보고 싶다.- 78쪽
군불을 지폈다
군불을 지핍니다.
타닥타닥 뼛속 쪼개는 소리.
따스한 화기는 가슴을 데우고 그렇게 쪼그려 앉아 불을
바라보노라면 보송보송한 아련한 기억들이 불꽃 속에 그려집니다.
가슴에 번져 오르는 붉은 불기운에는 한없는 그리움이 밀려오고
붉어진 피부는 당장 터질 것만 같아서 한층 더 웅크려 봅니다.
일렁이는 불길 속에 얼굴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손 닿으면 부서져 버리는 나의 환영은 연기와 함께
허공 속으로 날아가 흩어집니다.
심향은 먼 하늘 향해 실낱같이 타오르며 곧 잊여지겠지.
끝내 검은 숯구덩이만 덩그러니 불씨조차 죽어 버린 그곳에서
차가운 아쉬움만 쓸어내었습니다.
군불을 지필 때면 언제나 반복되는
나의 서정에 하루에 눈물 한 번은 꼭 흘립니다.- 88쪽
강냉이 사연
어느 해였던가. 봄부터 씨 뿌린 옥수수
한 광주리 수확에 신이 났었다.
한낮. 깜짝 먹거리 장만하려고
맛있게 잡수어 줄 스님네들 생각에 흥분과 기쁨으로
죽도록 고생해서 많이도 삶았는데 아무도 없다.
계곡에서 손질하고 옥수수 수염 뜯어
공양간에서 정성스레 삶았는데
그날 따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스님들 모두 방을 떠났다.
산으로 산행 가고 암자로 포행 가고
마을로 물건 사러 가고 시내로 병원 가고
따끈따끈 할 때 먹어야 제맛인데
식어 버리면 맛 다 달아나는데
싫어 싫어 싫단 말이야.
나랑 옥수수랑 차갑게 식어 버린 눈물 젖은 이야기
강낸이 사연.- 104~1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