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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원성 글.그림 / 이레 / 1999년 8월
절판
해인삼매
평등한 성품에는 나와 남이 없고
큰 거울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푸른 이끼 낀 석간에 샘물이 맑고
찬 산에는 달빛이 희다.
텅 비어 아무 흔적 없는 마음마냥.- 162쪽
세상은 변해 간다
세상은 변해 간다.
자연은 그렇게 태어나고 죽고
늙어 가고 병들어 죽고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없는데
변함 없는 건 그 진리일 뿐인데
사람들은 나에게 변했다고 한다.
내 얼굴이 변해 가는 것
내 생활이 변해 가는 것
내 마음이 변해 가는 것
겉부터 속까지 변해 버리는
당연한 자연의 순리에
사람들은 내게 변하지 말아 달라 한다.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
또다시 생각이 변할 당신의 마음은 돌아보지 않고
변하고 있는 당신은 챙기지 않고
타인에겐 변하지 말라 한다.
우리는 우리 서로의 변모해지는 모습에
더 탁해지더라도 더 맑아지더라도
언젠가는 완성될 자아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170쪽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세상을 달관한 눈빛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저 가슴 깊이 밀려오는 넉넉한 포근함에.
나의 괴로움에 지친 육체를, 영혼을 떠맡기고 싶다.
숨소리에 가슴을 기대면
그에게서 솔 향기가 베어 난다.
그곳에 쓰려져 깊은 잠이 들어도 좋아.
가득 찬 고향의 정겨움이
온갖 망상과 교만을 잠 재우고
솔바람의 싱그러움을 뿜어내는 그는
아늑한 안도감으로 나를 인도하지.
차를 일구어 내는 손끝에서는 고요히 깃들고
산길을 걷는 뒷모습에는 수행의 무게가 느껴지는
그에게서 밀려오는 넉넉한 포근함에
그대로 나를 떠맡기고 싶다.- 188~189쪽
옷에 대하여
못 먹으면 잘 입기라도 해야지.
뱃속에 든 음식이야 알 바 아냐.
남이 속을 헤집고 보기라도 할 건가.
우선 보이는 게 옷이야.
상대방의 시선이 닿는 곳이지.
멋들어지게 못 입으면
별나게라도 입어야 해.
속에 든 거 없는 것들이나 그렇다지.
돈이 없다고 가난하다고
마음만은 부자인걸
첫인상마저 궁상 흐르긴 싫어.
잘 입자. 세련미라면 더 좋고.
깨끗하게 다림질해 빳빳하게
잘 입자.
기죽는 건 죽음이야.
초라해지긴 정말 싫다구.
골빈 놈이라 해도 어쩌누.
지혜롭지 못할 바엔
겉으로라도 화려한 척하자.
깨침 있는 그 어느 날까지.- 196쪽
선
나는 공기가 되었다.
세간의 온갖 소리가 스치우고
탁함과 더러움도 투영되어 버리는
바람과 구름이 흘러가는 대로
잊혀진 우주의 공간 속으로
단지 어루만질 수 있다한들 깨어지지 않는
차라리 색色이 함께했다면 존재임을 의식할 수 있었던
그런 공기가 되어 버렸다.
시간도 공간도 의식할 수 없는 여행
수천 년 전 호흡해던 또 다른 나의 삶들을
하나 둘 관조하면서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는 소리하지 않는 속삭임으로
내 육체에 스며들면
잔잔한 어둠 속에 정지한 내가 있다.
선.- 2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