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익조
엄경희 지음 / 이가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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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이 어명으로 그 짧고 비통한 삶을 천상에 뿌렸다. 목을 타고 넘어와 흩뿌려진 선혈이 도포 위 매화나무에 붉은 꽃을 피웠고 허공을 보고 선 비익조의 눈에 피눈물을 쏟아 놓았다.


한 사람만 기억해 가져가게 해주십시오.
그것이면 족합니다.
한세상 이리 살다 가는 것에 원통하다 한을 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한 사람만 담아가게 허락해 주십시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지엄해 망각의 강을 건너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허나 그 하나는 제 것으로 가져가려 합니다.
이 생을 비익조의 서러운 그리움만 품고 가는 자의 마지막 애통한 염원입니다.
그 사람 제게 주십시오.
저를 그 사람에게 주십시오.
다음 생에 한 쌍의 날개를 달아 원 없이 창공을 날아오르게 해주십시오.

-362~363쪽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와 있을 것이다.
배를 타야 한다.
그 사람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이리 허망하게 나를 놓고 갈 사람이 아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갈 것이다.
가서 그를 만날 것이다.

종현이 그렇게 물조차 넘기지 못하는 날들을 보내면 모든 것을 놓으려하고 있었다.


이리 이곳의 끈을 놓으면 그리운 이를 보게 되는 것이리라.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갈 것이다.
이제 그 무거운 옷들을 다 벗어버렸을 테니 편히 쉬어지질 않겠느냐.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찾아가 너를 만날 것이다.-364~365쪽

내가 태어난 연유를 알지 못했다.
너를 만나 잠시 살아있는 나를 보았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너를 알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가져갈 것 없는 내 마지막이 원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허망하지 않다.
그러니 너를 기억해 가져갈 것이다.
수없는 망각을 강을 건너고 수억 겁의 인연을 거쳐 내가 너를 찾을 것이다.
너를 품은 나는 가는 길이 외롭지 않다.
그러니 너는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 오너라.
귓전을 지나는 바람 한 점도 흘려보내지 말고 가져오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그 모든 것을 네 속에 담아 나를 만나면 원 없이 쏟아 보아라.
나는 오직 한 사람만 기억해 갈 것이다.
내가 너를 은혜 했다.


보이느냐.
오늘은 겨울 산을 담았다.
백설이 세상을 뒤덮어 이 머리에 내려앉은 세월만큼 무상하다.
그곳은 어떠냐.
아무런 시름이 없어 혹여 나를 잊지는 않았느냐.
다 담고 가려니 힘이 드는구나.
개울가에 뒹구는 자갈돌 하나도 네가 보지 못한 것은 다 담아가야하니...
이리도 시간이 더디어 흐르는구나.
너는 여전히 그동안의 얼굴로 나를 맞을 것인데...
나만이 이리 늙어 어찌 하느냐.-368~369쪽

보고싶구나.
나를 향해 웃던 그 얼굴이 너무도 사무치는구나.
이제 더 담을 것이 없다면 내 이 그리움 거두어 가다오.
간밤에 너를 보아 남은 머리에 백설이 더 내렸다.
이만하면 되질 않았느냐.
더 늙어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찌 하녀 하느냐.-370쪽

길고 무거운 생에 잠시 한 마리 나비인 듯 꿈을 꾸다 갑니다.
아직도 꿈인 듯 생시인 듯 아련한 그 기억으로 가는 길이 그리 서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월광의 눈 속에 세월이 무심히 내려앉아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아마도 이 불초소생은 더 많은 축언을 올리고 가야할 듯싶습니다.
부디 다음 생에는 염원을 이루시어 원 없이 창공을 날아오르십시오.


비익조를 그려다오.
왜... 그것을 내게 그리라 하느냐?
그 새는 슬픔이다.
평생을 서러움만 품고 가는 비통함이다.
어째서 그것을 네 도포에 담으려 하느냐?
그리움이다.
평생을 아프게 품어도 서럽지 않을 그리움이다.
그 반쪽을 만나 창공을 날아오르면 수천 리를 한 번에 품어 가질
그리움으로 견디는 새다.
그러니 그려다오.-371쪽

한사람만 기억해 가져가게 해주십시오.
그것이면 족합니다.
한세상 이리 살다 가는 것에 원통하다 한을 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사람만을 담아가게 허락해 주십시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지엄해 망각의 강을 건너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허나 그 하나는 제 것으로 가져가려 합니다.
이 생을 비익조의 서러운 그리움만 품고 가는 자의 마지막 애통한 염원입니다.
그 사람 제게 주십시오.
저를 그 사람에게 주십시오.
다음 생에 한 쌍의 날개를 달아 원 없이 창공을 날아오르게 해주십시오.-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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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5-2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의 사랑이 다음 생에 이루어지면 좋겠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