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 시편 - 행성의 사랑
고은 지음 / 창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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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벚꽃 피어나느라고
밤이 그토록 눈 뜨고 있었나보다
벚꽃 피어나느라고
추운 밤이 다하여 그토록 가슴 아프게
먼동 트였나보다
벚꽃 피어나느라고
벚꽃 우르르 우르르 피어나느라고
저 땅속 뻗어내려간 뿌리들까지
저 하늘 속 나뭇가지들 우듬지 끝까지
다 몸 바쳐
힘이란 힘 남김없이 다 바쳐버렸나보다

봄날이 간다 힘이란 힘 다 바쳐버려
더 무슨 힘으로
세상의 재난 막아서겠느냐
벌써 병충해로 오도 가도 못하며
벚꽃 지는 날
징징 울지도 못하나보다

올해 꽃 피느라
내년 꽃 피느라
내 목숨의 힘 다 바쳐버려
몇십 평생 살 것을
몇년인가
몇년 반인가 살고 말아야 하나보다

벚꽃 밑에서 나는 고개 들었다 고개 숙인다
당신 나 안 만났으면
하고 고개 숙인다
당신 나 안 만났으면
힘이란 힘 다 바치지 않고
숨 느른하고
걸음 느른할 텐데
당신 나 아닌 누구 만났으면
하고 고개 숙이다 고개 번쩍 들어올린다

아, 벚꽃 지고 있다-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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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3-07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벚꽃을 한국에서 볼 수가 있겠구나...
벚꽃을 본다면 이 시가 떠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