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처롭게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다가오는 여인은 흰 소복을 입고 긴 머리를 풀어헤친, 도무지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부한 모습의 여자 귀신이었다. 그리고 그런 옷맵시만큼이나 매력 없어 보이는 작은 눈의 동그란 얼굴은 여인이 사람이 아닌 귀(鬼)라는 사실을 다시금 알려 주려는 것처럼 창백한 푸른빛이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조선 여인의 외모로군. 그리고 여인을 제외한 다른 것이 모두 흐릿하게 보이는 것을 보면, 이건 꿈이다. 한 번에 사태를 파악한 서린이 머리를 긁적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에, 그러니까 역시 나는 이렇게 물어봐야겠지. 내 꿈엔 왜 나타난 거요, 아줌마?" "그 여자가 제 남편을 꾀어 함께 저를 죽였습니다. ...... 억울하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처첩 간 갈등 끝에 일어난 비극이라는 말이로군. 절대로 반갑지 않다는 감상을 얼굴 근육으로 나타내며, 서린이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건 분명 예지몽. 그렇다면 오늘 나는 이 여인의 한을 풀어 주게 되겠군. 아아, 제발 살인 사건만은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니 그냥 넣어 두시라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은데 말이지. "억울하옵니다."-161~165쪽
"잘 알았으니 이만 안심하고 내 꿈에서 물러가시오." 그렇게 나를 붙들지 않아도 된다니까. 어차피 내 의사 따윈 상관없이 일은 나도 모르게 당신의 한에 이끌려 당신의 억울한 사연이 배어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는 전개로 흐르게 될테니. "억울하옵니다." "아아, 사정은 잘 알았다니까 그러네." "억울하옵니다." "빌어먹을. 당신, 아직 한참 젊어 보이구만 그 나이에 벌써 가는귀라도 먹을 게요? 그만 꺼지라니까!" "억울하옵니다." "아, 젠장!" 거참, 명나라산 고사리만큼이나 질긴 여자네, 진짜. 그렇다면 이쪽도 어쩔 수 없는 일! 이건 정당방위니 내 원망은 마시게! 속으로 그렇게 외친 서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품안에 있던 부적을 꺼내어 여인의 이마에 철썩 붙이고는 검지를 편 손으로 공중에 인을 그리며 외쳤다. "원귀(寃鬼)여, 이만 물러갈 것을 명한다!" 어라, 근데 방 안이 왜 이리 밝지? 젠장. 눈이 부셔서 뜰 수가 없잖아! 대체 누가 방문을 열어 놓고 나간......! 가만, 눈을 떠? 방문을 열어? 그렇다면? 빛에 적응이 되지 않아 욱신욱신한 눈을 두 손으로 벅벅 문지르며 억지로 깜빡여 본다. -161~165쪽
그러자 차츰 돌아오는 시야. 그리고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무슨 일입니까, 낭자!" 이 목소리는...... 승윤 나리?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 서린이 잠에서 깼음에도 아직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얼쩡거리는 원귀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그것을 냅다 걷어차 버렸다. "으악! 이건 반칙이라니까! 대체 왜 냉큼 안 사라지는 거냐고! 이 난청쟁이 원귀 아줌마!" 기습적인 그녀의 공격에 가슴팍을 정통으로 걷어차인 원귀가 그대로 나자빠졌다. 어라? 이래도 안 사라져? 아직도 온전히 잠에서 깨어나지는 못한 서린이었으나, 없는 정신에도 이 원귀가 태렴이나 승윤에게 해를 가하기 전에 어서 쫓아내야 한다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부신 눈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가 다시 품속에 손을 넣어 부적을 하나 더 꺼냈다. 「빛이여, 내 몸에 모여 섬광이 되어......」 심원의 어둠을 떨쳐라. 그렇게 주술을 걸어 그 힘을 증폭시킨 소사요참부(消邪妖斬浮:사악한 기운을 쫓는 부적)를 던지면 어지간한 원귀들은 큰 상처를 입고 물러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체, 지금 누굴 보고 원귀라는 겁니까!" 화가 잔뜩 난 사내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161~165쪽
그것도 승윤 이상으로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 서린이 주술을 멈추고 부적을 도로 품속에 넣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으아아! "헛소리를 하기에 걱정이 되어 깨워 주려고 했건만, 그 대가는 낭자의 고 앙증맞은 발로 걷어차이는 거였군요." 빈정거리는 원귀, 아니 원귀로 오해받은 태렴의 이마에 붙은 것은 하필 산모(産母)의 순조로운 출산을 기원하는 '출산건강대길부(出産健康大吉符)'. 어차피 눈으로 확인한들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부적의 용도를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제발이 저렸던 그녀는 얼른 부적부터 떼어 손으로 구겨 버렸다. "송구합니다, 나리. 제 꿈에 들어온 원귀가 아무리 타일러도 떠나지 않기에 잠시 착각을 했습니다." "......" "이렇게 사죄드립니다, 나리." 지은 죄가 있는 터라 내내 저자세로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녀를 끝까지 외면하던 태렴이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어서 있는 그녀를 한 번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본 그가 그대로 찬바람을 일으키며 방 밖으로 나가 버리자 서린이 한숨을 쉬었다. '그냥도 저렇게 냉기가 폴폴 날리는데, 만약 그 부적이 뭔지 알았더라면......, -161~165쪽
정말 다시는 내 얼굴을 안 보려고 했을테지. 으으, 이건 무덤에까지 가져갈 비밀로 하자.'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인, 그 개성 없는 차림새의 원귀 모습을 허공에 그려 본 서린은 그 환영을 향해 다시금 분노의 발차기를 선보였다. 빌어먹을. 아침 댓바람부터 이 꼴인 것을 보니 오늘의 일진도 알 만하구나.-161~16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