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로
방은선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11년 9월
품절


어린 까마귀는 아침부터 호된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처음 위험을 알아차린 건 가장 먼 숲의 경계에서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어치 영감이 퍼덕대며 도망치듯 날아올랐을 때였다. 어린 까마귀는 바짝 긴장하며 빳빳하게 굳은 채 숲의 외각을 주시하고 있었다. 날개도 없이 두 다리로 하늘을 나는 괴이쩍은 짐승이 나타난 것은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그 짐승은 희환했다.
날개도 없는 것이 마치 날것인 양 자유롭게 하늘을 누빈다. 노유(원숭이)처럼 팔다리가 붙어 있는 몸엔 개구리처럼 털이 없었다. 게다가 저것은 또 뭘까.
어린 까마귀는 짐승의 기묘한 껍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결처럼 반드르르 한 것이 깃털처럼 팔랑팔랑 나부댄다. 그 매혹적인 비단의 움직임에 넋을 빼고 있던 까마귀는 제게로 다가드는 짐승의 빠른 속도에 퍼드득 정신을 차렸다.
어린 까마귀는 서둘러 무리의 뒤를 쫓았다. 짐승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쫓아 들었다. 걷고 뛰며, 바람에 상관없이 솟구쳐 날아올랐다.
그날따라 바람이 괴이하게 휘어지고 꺾어져 길을 엉망으로 흩트려 놓았는데도 짐승의 속도는 줄어드는 기색이 없었다.
[까아악-!]-7~10쪽

어린 까마귀는 또 급작스럽게 휘어지는 돌풍에 놀라 발버둥 치며 활갯짓을 했다.
"그러다 다치겠네!"
뜻 모를 소리가 높게 야단을 치자 바람이 순순해졌다. 돌풍에서 놓여난 어린 까마귀는 울며 점점 더 멀어지는 무리를 쫓으려 안간힘을 썼다.
무리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소, 송구합니다."
소오는 퍼덕대지 못하도록 어린 까마귀의 날개짓을 그러쥐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이.......것이 맞습니까?"
그러면서 속으로 투덜거리는 것이다. 요괴나 뭇 신선들은 팔자도 좋지 하며. 천신 소오는 벌써 십수 년째 상제와 함께 천하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중이었다. 요괴나 선신들이 팔자 좋게 일상을 향유하는 동안 벌써 십 수년째 천하를 혼돈에서 구해 내려고 말이다.
"어허, 어찌 그리 손이 모지신가?"
운 노인은 땅으로 내려서는 자신의 수하를 노려보며 혀를 찼다.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는 소오를 내버려두고 노인은 까마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아 이리 와보시게나."
어린 까마귀는 슬그머니 내미는 노인의 손을 가차 없이 콕 쪼아댔다.
노인은 허허 웃더니 조그마한 까마귀 머리통에 꽤 아프게 딱밤을 때렸다.
[까악-!]-7~10쪽

어린 까마귀는 구슬프게 울었다. 노인은 인자하게 허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소오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너무 어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후로 벌써 십수 년이 흘렀는데, 그때 난 것이라 하기에는 조금......."
노인은 한 대 얻어맞고 얌전해진 똑똑한 까마귀를 두 손으로 살포시 덮으며 답했다.
"섭식으로 요력을 얻지 못하니 이러신 게지."
이 첫 령(靈)이 각 어미의 태에 잉태되고, 하늘이 열린 지 십수년. 시간은 벌써 그리 흘러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다 이러하시니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겠나."
노인은 가만히 작은 까마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 보세나. 이 아이도 선기를 흡수하고 있지 않나."
선기를 흡수하는 짐승이라니, 예전 같았으면 듣도 보도 못했다 일갈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소오 역시 가만히 어린 짐승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한데 어째 이 아이만 고기를 먹는 것입니까? 먼저 찾아낸 두 아이는 모두 피를 멀리하는 것이었는데, 까마귀는 잡식이지 않습니까."
소오의 물음에 노인이 혀를 쯧쯧 찼다.-7~10쪽

"짝의 식성이 그러하니 별수 있겠나. 다른 분들과는 달리 그분은 유독 예민해서 말일세. 피는 먹는 것 외엔 입에 대질 않으시니....... 이 아이가 이런 시커먼 몸을 입고 태어난 것도 별수 없는 노릇이겠지."
그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선하며 가장 악한 것이었다. 해서 아마도 가장, 잔악스러운 것.
"뭐 그렇다고 이 아이가 고기를 먹지는 않을 걸세. 그럴만한 성정이 못 되실 터이니."
여리고 순백한, 이 세상에 태어난 첫 생명. 순수한 첫 령(靈)을 그들의 안전에 바쳐야 하는 심정도 무참했다.
하늘을 열어본 노인의 눈앞에는 두 갈래길이 선명했다. 낮과 밤이 모두 진실인 것처럼, 두 갈래길 또한 선명한 진실이었다. 그 중 어느 길을 따라 흐를지는 이 작은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짐이었다.
게다가 이 아이들을 탐내는 것이 비단 그들 혼돈만은 아닐 것이었다.
세상에 내린 첫눈, 그 종(種)의 첫 생명. 짐승과 요괴의 몸을 입고 태어난 이 작은 요신의 반려들은 그렇게 세상에 없던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 작고 여린 몸속에, 그 영혼 속에, 그렇게 첫 령(靈)을 담고 태어난 것이다. -7~10쪽

해서 피를 먹고 고기를 먹는 모든 종류의 요괴들이 이 아이들을 탐하게 될 것이었다. 세상에서 이 아이들보다 더 순수한 요력을 쌓을 수 있는 건 혼돈 외엔 없을 테니까. 요괴들이 이 아이들을 보고 미치는 것도 아마 당연한 일이겠지.
"어찌 되었든 찾을 수 있는 마지막 아이까지 무사히 찾았으니 이제 한시름 덜었네."
노인은 까마귀의 작은 몸을 다정하게 토닥거렸다.
"자, 가자꾸나. 너를 찾아 먼 길을 헤맸으니."
"영산으로 뫼시겠습니다."
노인은 소오의 말에 뭔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마음을 수습했다. 노인은 먼 하늘에서 음사한 마른번개가 치는 것을 보고 짧은 숨을 뱉어냈다. 이 아이가 짐승의 태를 벗고 인간의 태를 얻기까지 앞으로 수십 년, 그동안 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어갈 것인가.-7~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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