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은암
[서울 600년, 대은암]    

청와대입구에서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갈림 길목에 속칭 칠궁으로 불리는 육상궁이 있다. 임금님을 낳은 후궁 일곱분을 모신 사당이다. 이 육상궁의 북녘 개울가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대은암>이라 불렀다. 이 <대은암> 일대가 중종때 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젊고 유망한 선비들을 대량 학살한 원흉 남곤의 집터이다. 남곤은 젊어서 글을 잘 지어 당대의 명사인 홍언충, 박은, 이행 등 일류 선비들과 함께 사귀었으나 마음이 공명에 있어 거리가 있었다. 박은과 이행이 남곤이 사는 '대은암' 경치가 뛰어났기로 술병을 들고 자주 놀러 갔으나 당시 승지벼슬로 있던 남곤이 새벽에 대궐에 들어갔다가 밤 늦게 들어오곤 하여 더불어 자리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공명에 눈이 어두운 것을 희롱하여 박은이 어느 하루는 그 남곤의 집 바위에 <대은>이라 크게 쓰고 집 옆 여울을 <만리뢰>라 써놓고 돌아갔다. 곧 아무리 경관이 좋은 바위일지라도 주인이 공명에 눈이 어두워 알아주질 않으니 크게 숨어있는 것이라 하여 <대은>이라 했고, 여울은 바로 집곁 지척에 있으면서 알아주지 않으니 만리밖에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하여 <만리뢰>라 빗댄 것이다. 이 바위 이름이 <대은암>이라 불리게 된 것은 아마도 박은이 남곤을 빗대는 이 글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위가 크고 펀펀하여 시를 쓰기에 알맞은 면이 많았던지 언젠가는 박은이 다음과 같은 시로써 남곤의 처세를 경계하기도 했다. 

                                주인이 벼슬이 높고 세력이 불꽃처럼 타오르니 

                                문 앞에 문안 드리는 가마들이 그치지 않는구나. 

                                     삼년에 단 하루도 동산을 돌아보지 않으니 

                                                  만일 산신령이 계시다면 

                                                   응당 재앙을 내리련만. 

남곤이 어느 만큼 위선자인가는 그가 문형으로서 알맞은 가를 알아보기 위해 찾아간 정승 신용개에게 지어 바친 시에서 완연하다. 

                                         버드나무 그늘지고 낮 닭이 울려는데 

                                 졸지에 가난한 골목에 수레소리 요란하여 놀란다. 

                                    다투어 풍채를 보노라고 이웃집들 텅텅 비고 

                                          술상을 차리노라 늙은 아내 궁색하네. 

                                         흥이 나서 다만 술을 기울일 줄만 알고 

                                        나이 차이를 잊고서 서대 잡고 만류하네. 

                                             흥얼거리며 고헌과를 지으려나. 

                                               거친 글을 감히 쓰지 못하네. 

<서대>란 물소 뿔로 만든 각띠로 정승만이 찰 수 있어 정승을 뜻하고 <고헌과>란 당나라 때 이장길이 어릴 적에 재주가 있다고 이름이 있었기에 당대의 문장 한유가 찾아가 시를 짓게 했더니 <고헌과>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는 고사를 빗댄 것이다. <서각>의 정승 - 곧 신용개에게 노골적으로 아부하는 것이며 자신의 집은 마치 누추하게 숨어사는 은사의 집으로 빗대는 것이며 또 자신을 이장길로 여기는 자만심이며, 사람된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출세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남곤이었다. 이미 젊어서 부모의 상을 입고 있는 주중에도 출세를 위해 박경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모함하여 죽이더니 끝내 심정과 짜고 조광조 등을 얽어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그리해놓고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날마다 밤이면 변장을 하고 남의 집으로 옮겨 다니며 잠을 잤고 자신이 쓴 글을 모조리 태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 당대나 후세 사람들 모두가 남곤이 형을 받아 살육되지 않고 집에서 늙어 죽은 것을 원통해 했으며, 본 처에서 외손만 있고 아들을 보지 못한 것은 하늘이 내린 벌로 여겼던 것이다.

98년도의 일기장을 정리하다 발견을 했다. 아마도 한인신문에 실린 글을 보고 옮겨 적은 것 같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일기장에 기억도 나지 않은 글들이 많다. 조금씩 서재에 옮겨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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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6-26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기장이 보물 노트예요.^^

후애(厚愛) 2009-06-26 07:2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처음 미국와서 할 일이 너무 없었거든요.ㅎㅎ
그래서 일기장에 낙서도 하고 한인신문을 보고 마음에 드는 글들을 옮겨 적기도 하고 책에서 본 시들도 적어 두었지요. 그런데 기억에 안 나는 글들이 더 많아요.ㅋㅋ

행복희망꿈 2009-06-26 0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기장을 아직도 가지고 계시나봐요? 대단하시네요.
전 학교졸업 이후에는 일기는 못쓰고 있는데요.
요즘은 가계부쓰기만 겨우 하고 있지요.ㅎㅎㅎ
일기를 쓰면 정말 시간이 많이 지나고 하면 대단한 추억이 될것 같아요.
저도 후애님처럼 다시 일기를 써볼까봐요.^^

후애(厚愛) 2009-06-26 07:31   좋아요 0 | URL
어릴적부터 쓴 일기장은 고모가 다 버리고 미국 들어오기 전부터 쓴 일기장은 잘 보관하고 있답니다. 가계부는 어떻게 쓰는지는 몰라요.
저 대신에 옆지기가 가계부를 열심히 쓰고 있답니다.ㅋㅋㅋ
게으름 때문에 일기 안 쓴지가 1년은 된 것 같아요.ㅎㅎ
이제 일기를 써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