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셀프트래블 - 2018-2019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36
김수정 지음 / 상상출판 / 201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후쿠오카 도심에서부터 벳푸 우후인에 이르는 근교까지!

도심과 자연이 어우러져 다채로운 여행지로 사랑받는 후쿠오카 자유 여행!

 

 

 

   벌써 2017년 한 해가 다 저물어 가는데 돌이켜보니 이렇다 할 여행 한번 다녀오지 못했다.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갑자기 신랑이 내년 2월쯤에 후쿠오카와 유후인으로 가서 온천여행이나 다녀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예전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는데, 동선이 짧아 가족끼리 여행하기에 상대적으로 편한 도시라는 것이었다. 제주도도 가기 쉽지 않은 마당에 일본 여행이라니? 라고 말하려다 그가 말하는 후쿠오카와 유후인이라는 곳은 어떤 곳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믿고 찾아 읽는 자유 여행 가이드북 '셀프트래블' 시리즈 중 후쿠오카 편이 마침 최신판으로 출간되었다. 벳푸와 유후인 지역이 부제로 적혀 있는 걸 보니 신랑이 말했던 후쿠오카와 근교 지역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을 것이란 생각에 마침 잘 되었다 싶었다. 대구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편도 있는데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해도 1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다보니 아이와 함께 다녀오기에 더없이 좋은 지역이란 생각도 들었다. 신랑이 말하길 유명 관광지답게 한국어 표기도 잘 되어 있다 하고, 책 역시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무런 불편함 없이 후쿠오카를 여행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위치와 정보를 체크해 수록했다고 하니 저자가 소개하는 여행지를 일정에 맞게 잘 선별하기만 한다면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All about Fukuoka!

 

 

전체 면적 340㎢로 서울특별시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 하지만 작다고 무시하지는 마시길. 주요 명소간 거리가 멀지 않아 짧은 시간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은 여행자들에겐 후쿠오카가 딱이다. 곳곳에 개성 강한 숍들과 다채로운 먹거리들이 가득해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도 즐거움이 끊이지 않는 곳. 후쿠오카의 주요 관광지는 물론이고 함께 둘러보면 좋은 근교 여행지까지 한눈에 담아 보자. 자, 이제 후쿠오카로 떠나는 일만 남았다. / 18p 

 

 

 

   후쿠오카는 일본의 4대 섬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규슈에 위치하는 도시로, 2006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10대 도시'로 뽑혔으며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경제 도시로 알려져 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약 1시간 정도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우며 대부분의 교통수단, 관광지, 식당에는 한국어 또는 영어 안내판이 잘 마련되어 있고, 지하철은 물론 버스까지 수시로 주요 관광지를 운행하여 이동이 편리한 까닭에 몸도 마음도 가볍게 떠나 보기 좋은 곳이다.

 

 

 

 

 

 

   <후쿠오카 셀프트래블>은 후쿠오카를 크게 도심과 근교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후쿠오카 도심에서는 하카타역 주변, 텐진, 야쿠인, 시사이드 모모치 일대를, 후쿠오카 근교에서는 다자이후, 벳푸, 유후인, 하우스텐보스를 다루고 있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단기 여행자 혹은 맛집 탐방을 위한 1박 2일 코스를 비롯하여 도심 속 후쿠오카와 온천 여행을 할 수 있는 유후인 혹은 일본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후쿠오카와 벳푸를 중심으로 한 2박 3일 코스, 나처럼 아이와 함께 여행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한 3박 4일 여행 코스까지 다양한 추천 일정을 수록하고 있다. 다음으로 후쿠오카 대표 명소 베스트 10과 후쿠오카에서 꼭 먹어야 하는 음식, 드러그스토어 베스트 4, 모두가 만족할 만한 다양한 호텔 등을 한눈에 보기 쉽게 소개하고 있어 실속 있으면서 알찬 여행을 기대해볼 수 있다.

 

 

 

 

 

 

   책은 각 지역별 특징과 이동 방법, 여행 방법은 물론 관광명소, 식당, 쇼핑, 숙소 등을 차례차례 소개하고 있다. 해당 장소를 찾아가는 법과 상세 주소, 오픈과 클로징 시간과 가격, 전화번호, 심지어 구글 맵의 GPS 좌표까지 표시되어 있어 검색창에 입력하면 빠르게 위치를 체크할 수 있는 편리함까지 제공한다. 관광명소의 경우 중요도에 따라 별점이 표기되어 있으며 More&More 혹은 Tip을 통해 추가 정보 및 주의할 점과 미리 체크해두어야 할 점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어머, 여긴 꼭 가봐야 해!!!

 

 

   후쿠오카 여행의 중심지는 단연 유후인, 벳푸, 나가사키 등 규슈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 가능한 교통의 요지, 하카타역이다. 이곳은 백화점과 복합쇼핑센터, 다양한 레스토랑이 모여 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카타역 주변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정도라고 한다. 그 중 도시의 극장이라는 콘셉트로 만들어진 후쿠오카의 대표 랜드마크인 커낼시티 하카타, 아시아 근현대 미술품을 총망라한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테블릿pc로 주문하면 서빙되는 주문식 초밥 전문집 우오베이 요도바시 하카타점이 인상적이다. 또한 약 150여개에 이르는 포장마차가 거리를 수놓으며 여행자의 특별한 밤을 책임지는 후쿠오카의 명물 야타이는 빼놓지 말아야 할 장소 중 하나인 듯하다. 메뉴 하나당 가격이 생각보다 비싼 편이니 넉넉하게 먹다보면 미처 예상치 못한 가격의 압박을 받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것도 당부한다.

 

 

 

 

 

 

   후쿠오카의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최대의 번화가 텐진은 대형 백화점과 쇼핑센터 아래 빈티지한 중세유럽풍 거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하 상점가가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텐진 한복판에 위치한 신사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름이 케고 신사다. 여기에 웃는 얼굴의 여우상이 하나 있는데 이것을 쓰다듬으면 사업이 번창한다고 하니 사업을 하고 있는 신랑의 번창을 기원하고 싶은 마음에 꼭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외에 후쿠오카의 명물로 알려진 명란 전문점 원조 하카타 멘타이쥬 식당과 꼭 맛보고 싶은 수플레 팬케이크가 인상적인 호시노 커피 후쿠오카 솔라리아점 또한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이다.

 

 

 

   최근 후쿠오카에서 가장 핫한 지역이라 불리는 야쿠인에서는 골목 곳곳에서 취향 저격인 이색 카페나 숍을 만날 수 있는데, 소극장처럼 꾸며진 내부 인테리어가 이목을 끄는 라멘 전문점 멘게키죠 겐에이와 인생 치즈 케이크를 맛볼 수 있다는 아베키란 곳을 찾아가보고 싶다. 한적한 해변을 산책할 수 있는 힐링 여행지 시사이드 모모치 일대에서는 지중해풍 건물들이 모여 있는 마리존과 높이 60m에 이르는 관람차 스카이 휠을 경험해보고 싶어진다. 교육의 도시인 다자이후에서는 고스넉한 신사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황소 동상을 쓰다듬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하니 가서 열심히(?) 쓰다듬고 와야겠다. 또 매화 가지 떡이라는 뜻의 다자이후 지역 필수 먹거리 우메가에모찌도 잊지 말 것!

 

 

벳푸에서 꼭 해야 할 다섯 가지

하나, 7개의 지옥온천 모두 둘러보기

둘, 뜨거운 온천 증기로 익힌 지옥 찜 요리 맛보기

셋, 해변가에 누워 따뜻한 모래찜질 즐기기

넷, 100엔으로 시영온천에서 온천욕 즐기기

다섯, 벳푸역 앞 아부라야쿠마하치 동상과 기념사진 찍고 바로 옆에서 손 온천 경험하기

 

 

 

   일본 최대의 온천 도시인 벳푸에서는 그 이름도 무서운(?) 지옥온천이 있다고 하니 이 개성 강한 7개의 온천이 유독 기대된다. 시간 여유가 없다면 바다지옥(우미지옥), 가마솥지옥(가마도지옥), 피의지옥(치노이케지옥) 이렇게 세 곳의 온천만이라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청정자연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동화마을 같은 유후인 역시 벳푸와 더불어 온천여행을 하기에 좋은 여행지로, 마을 곳곳에 자리 잡은 수십 개의 료칸에서 다양한 테마의 온천을 즐길 수 있다고 하니 우리 가족이 여유롭게 다녀오기에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외에 동양의 작은 네덜란드라 불리는 대형 테마파크 하우스텐보스에서는 멋진 유럽식 정취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는 일루미네이션을 즐길 수 있다고 하니 이곳 또한 절대 빼놓지 말아야겠다.

 

 

 

 

 

 

   끝으로 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거리일텐데 그 중 후쿠오카에서는 라멘, 우동, 스시를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될 듯하다. 이 세 가지 음식이야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이란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지만, 후쿠오카가 돈코츠 라멘과 우동의 발상지라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맛좋은 스시를 찾을 수 있지만 합리적인 가격과 질 좋은 초밥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상대적으로 많은 후쿠오카에서야말로 놓칠 수 없지 않겠는가.

 

 

 

 

 

 

   이 외에도 단돈 100엔으로 이동이 가능한 100엔 버스 노선도, 렌터카 이용 방법 및 각종 교통패스 활용법, 여행 준비 방법과 알아 두면 유용한 여행 일본어까지 <후쿠오카 셀프트래블> 책 한 권 안에 알찬 정보가 가득하니 후쿠오카 여행 시 가볍게 지참하고 다니기에 더없이 좋을 듯하다. 뜨끈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즐거운 쇼핑과 볼거리가 가득한 후쿠오카로 얼른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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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 - 모두가 쉬쉬하던 똥 이야기 사소한 이야기
리처드 존스 지음, 소슬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곤충학자가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똥의 생태계!

모두가 쉬쉬했던 경이로운 똥의 생태학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예덕선생전>에는 사람과 동물을 배설물을 처리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가 등장한다. 일명 '똥장수'라 불렸는데, 직접 거름지게를 이고 돌아다니며 배설물을 쓸어 담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직업의 특성상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더럽고 천하다고 손가락질 받곤 했지만, 한양에 괜찮은 집 하나 정도를 살 수 있을 만큼 높은 연수입을 올렸다고 하니 그만큼 귀한 직업임에는 틀림없었던 것 같다. 놀랍게도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직업은 실제 존재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눈앞에서 배설물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배변을 처리하는 문제에 대한 인류의 오랜 숙제는 관심에서 한참 멀어지고 말았지만, 여전히 이 부분은 생태계의 순환과 진화를 결정하는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결코 소외될 수 없다. 이를 상기시키는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어 흥미를 끈다. 바로 모두가 쉬쉬하던 똥 이야기, <버려진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이다.

 

 

 

신비롭고 흥미로운 똥의 생태학

 

 

   곤충 사나이라는 별명을 지닌 영국의 저명한 곤충학자, 리처드 존스가 집필하여 완성한 <버려진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는 '똥'을 주제로 한 '똥의 생태학'에 관한 교양 과학 도서이다. 10살 무렵 창턱에서 튼실한 다리와 강한 곤봉모양의 더듬이가 달려있는 빨간다리똥풍뎅이를 발견한 이후 그는 썩어가는 유기물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곤충들에 매혹을 느끼고 이를 통해 '똥'이 보내는 생태계의 메시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똥이란 배설이라는 행위의 사소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지만, 파리와 딱정벌레를 비롯하여 똥을 재활용하는 다른 동물들이 그곳을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생태계의 순환과 진화라는 커다란 그림이 그려지게 되는 것이었다.

 

 

 

   책은 사람을 비롯하여 각종 동물들이 어떤 소화과정을 통해 똥을 생산하는지, 어떻게 오물을 처리는 방법을 개선해왔고 또 어떻게 재활용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더불어 저자가 가장 애정을 드러내는 똥딱정벌레는 물론, 다양한 방식으로 똥을 이용하는 여러 딱정벌레와 파리 및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생물들을 관찰한다. 마지막으로 종에 따라 다른 똥의 형태와 특징, 똥과 관련된 곤충 도감, 분변학 용어까지 수록되어 있어 마치 '똥'에 관한 백과사전 한 권을 들여다보는 알찬 재미까지 얻을 수 있다.

 

 

 

배설하는 똥은 화학물질과 섬유질의 구성이 상대적으로 비슷하지만, 수분함량과 크기는 각 종의 진화사와 개체의 생태환경에 따라 다르다. / 37p

 

 

 

   앞서 소개했듯 책의 전반부에서는 인체는 물론 소, 말, 토끼 등의 동물들이 신체의 여러 기관과 효소들이 얼마나 능동적이고 유기적이며 복합적인 작용을 거친 끝에 똥이라는 배설물을 몸에서 내보내는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각 종의 진화사와 개체의 생태환경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똥의 성질과 형태를 비교한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를 테면 대개 육식동물은 겉으로 보이는 몸집을 고려했을 때 초식동물 보다 장이 훨씬 짧다. 초식동물은 셀룰로오스처럼 화학적으로 질긴 식물섬유를 소화시키기 위해 긴 소화과정이 필요하지만 육식동물은 그렇지 않다. 고기를 소화시킬 때는 채소를 소화시킬 때보다 시간과 에너지가 훨씬 덜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람의 대변과 소똥이 같은 75%의 수분함량을 지니고 있음에도 사람의 경우 섬유질을 거의 소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섬유질이 우리의 대변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반면, 소는 박테리아 효소를 저장하고 있는 위에서 섬유질을 더 잘게 부수고, 반고체상태보다는 더 유동적인 상태에서 밖으로 배출됨으로써 좀 더 질척이는 형태를 띤다는 차이점을 보인다. 한편 약 72%의 수분을 지닌 말똥의 경우, 말이 되새김질을 하지 않고 소화를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더 복잡하게 얽힌 섬유질이 대변에 섞여 나옴으로써 약간 더 건조한 형태를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은 소장과 대장의 경계에 있는 주머니인 맹장에서 발효가 일어나는데, 풀이 주식이 아닌 사람의 경우 맹장이 줄어들어 부록처럼 변했지만 말의 경우 맹장은 소화과정에서 원래의 목적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그 크기도 1미터 가량이나 된다고 한다. 저자가 상세히 설명한 이 기록들은 비록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배설물 배출이라는 이 자연스러운 행위가 어쩌면 저마다 필요한 기능을 강화화고 불필요한 기능을 축소하여 진화를 거듭해온 생태학에 있어 사실은 매우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지해주는 대목이어서 인상 깊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똥이 이미 그 자체로 유용한 천연 자원이자 매우 높은 수준의 이용 가능한 영양분이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코끼리 똥은 건드리지 않은 섬유소나 다름이 없는데, 중앙아프리카에 사는 시타퉁가라는 늪영양은 코끼리 똥에 들어있는 씨앗과 씹어놓은 목초에서도 필요한 영양분의 상당부분을 얻는다고 한다. 개코원숭이와 새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은 코끼리 똥으로부터 씨앗과 소화되지 않은 귀리를 찾고 수확개미는 꼬리감는원숭이의 대변에서 과일씨앗을 꺼내며, 가시주머니생쥐는 소똥과 말똥에서 씨앗을 골라낸다. 이는 씨앗이 뿔뿔이 흩어지고 묘목이 더 멀리 분산됨으로써 서로간의 눈에 띄는 경쟁을 희석시키고 미래의 유전자 다양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똥은 생태계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원활한 거름 시장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잘 썩은 말똥은 버섯 재배업자들에게 버섯을 배양하는 판으로도 인기가 많고, 양계농장에서 나오는 수 톤의 닭똥은 작은 알갱이로 뭉친 다음 가정용 비료로 판매된다. 한때 조류의 배설물로 만들어진 조분석 섬과 조분석의 양이 상당하기로 유명한 아타카마 사막을 사이에 두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국가 간에 전쟁까지 벌인 역사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심지어 커피콩을 먹은 사향고양이의 똥을 볶고 갈아서 만든 커피도 그 맛이 좋다고 하지 않는가. 늘 기생충과 질병, 위생 문제만을 떠올리게 되는 똥이 이제는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할 존재에 그치지 않기를,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임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똥이 얼마나 생태계의 놀라운 신비를 품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를 둘러싼 다양한 생물들을 꽤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한 데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똥에 사는 동물과 똥을 먹는 동물들을 기록한 것인데, 매우 정밀한 자연 다큐 여러 편을 감상한 듯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주로 파리목, 딱정벌레목, 나비목(나비와 나방), 바퀴목(흰개미와 바퀴벌레), 벌목(말벌과 개미), 꼽등이와 지네, 민달팽이, 지렁이와 같은 무척추동물, 이른바 똥개라 흔히 부르는 개속, 오소리, 이집트대머리독수리 등이 등장한다.

 

 

 

 

 

 

   그중 똥딱정벌레를 향한 저자의 애정은 남다르다. 이 책은 거의 똥딱정벌레 관찰 도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똥을 굴리는 똥딱정벌레는 곤충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환상적인 행동 중 일부를 보여준다. 여기에 영감을 받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이를 신성시여기며 숭배했고, 기묘한 동물신이 지배하는 복잡한 사후세계의 체계 속에 이 곤충을 포함시켰다. 영원히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 올라가야 하는 형벌을 제우스로부터 받은 에피아의 왕 시지포스는, 긴 다리를 갖고 있는 경단형 딱정벌레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기까지 했다. 구멍을 파고, 땅굴을 뚫고, 똥을 묻고, 똥 경단을 다루는 의욕 넘치고 친절하며 철저히 계산된 듯한 행동을 보여주는 이들의 모습은 때로는 똥의 존재를 잊을 정도로 복잡하고 우월한 생태학의 신비를 몸소 우아하게 펼쳐 보인다.

 

 

 

모든 것은 건축의 결실과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자손의 수라는 번식 보상과 관련이 있다. / 167p  

 

 

새끼의 몸 크기와 수컷일 경우 뿔의 길이는 유충 시절의 영양 상태를 나타내는 좋은 척도로 사용할 수 있는데, 혼자 일을 할 경우 매우 큰 암컷만 멋지고 뿔이 달린 '우월한' 아들을 기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수컷이 도와준다면 심지어 가장 작은 어머니조차 '우월한' 아들을 기를 수 있었다…(중략)…수컷이 돕는다고 해서 새끼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며, 증가하는 것은 새끼의 크기와 힘이다. 또 적응도를 높일 수 있는데, 적응도란 다음 세대로 넘길 수 있는 유전자의 최대치를 다윈주의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 172p

 

 

 

 

 

 

   그간 쉽고 재미있는 교양 과학 도서를 전문으로 출간하는 출판사 MID에서 이번에는 '똥'을 주제로 한 도서가 나왔다기에 냉큼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자신의 몸속에서 나오는 똥을 신기하게 여기고, 동화책에 등장하는 똥을 집중해서 보는 아들 녀석 때문에 더 관심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이 책을 읽고 나서 아들에게 동물마다 똥의 형태가 왜 저마다 다른지, 똥이 사실은 더럽고 추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자원임을 설명해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아주 유용한 독서가 된 듯하다. 이 책을 접하려는 이들에게 권하기를, 처음에는 주제 자체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으나 읽다보면 생태계의 아름다운 순환과 재순환의 신비에 매료될 것이라고 감히 자부하며 추천해본다. 아, 길거리에 있는 어느 동물의 배설물이 이젠 예사롭지 않게 보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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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파는 가게 1 밀리언셀러 클럽 149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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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을 공포로 뒤집어버리는 놀라운 이야기꾼의 단편작!

악몽을 파는 가게로 들어서는 순간, 나가는 문은 사라지고 없을 지도!

 

 

   한창 글쓰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누군가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작가가 된다면 어떤 장르의 작가가 되고 싶으냐고. 나는 기꺼이 공포소설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귀신이 등장하거나 자극적인 연출이 시종일관 지속되는 류의 소설이 아닌, 일상이 공포가 되고 무엇이 현실인지 가늠할 수 없이 모든 가치들이 한순간에 전복되는 놀라운 반전이 있는 이야기를 꿈꾼다. 하지만 정확하고 예측 가능한 일상의 틀을 고집하고 있는 나에게 그럴 만한 기회가 영영 주어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들이 부럽고 짜증이 날 만큼 질투가 난다. 나는 하지 못하는 상상을 어쩌면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냐고. 스티븐 킹, 당신은 어떻게.

 

 

 

자정에만 문을 여는 이야기 노점상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스티븐 킹은 원작이 가장 많이 영화화되어 기네스북에까지 올라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작가이지만, 나는 이제야 그의 작품을 글로써 만났다. <미저리>,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1408> 등 그의 작품이 원작인지도 모르고 봤던 영화들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익히 알려진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작품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현역 작가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일본 추리 소설의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의 새로운 작품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원통한 나로서는 스티븐 킹의 <악몽을 파는 가게> 1권을 읽고서 그가 여전히 우리 시대에 살아 숨쉬고 활발히 글을 쓰고 있는 작가란 사실이 이렇게도 기쁘고 반가울 수가 없다. 자정에만 문을 여는 노점상 주인의 모습을 하고서 안 잡아먹을 테니 가까이 와서 내 이야기 좀 들어봐, 하는 그의 손짓에 어느 누가 이끌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악몽을 파는 가게>는 스티븐 킹의 미출간 신작을 모아 두 권으로 나눠 출간된 소설집이다. 총 20편에 이르는 단편과 함께 해당 작품 앞에는 간단한 해설 및 작품 구상에 관한 에피소드를 접할 수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혹자들은 스티븐 킹의 작품은 단편에서 보다 더 빛을 발한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아직 그의 장편을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단편 소설만이 지닐 수 있는 강렬한 인상과 가슴을 선뜻하게 만드는 놀라운 반전을 여러 편에 걸쳐 만날 수 있다는 기쁨 때문에라도 이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몽을 파는 가게> 1권에는 총 10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자동차의 이야기 「130킬로미터」, 느닷없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능청스럽게 주절대는 유머들이 기분 나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프리미엄 하모니」, 알츠하이머를 겪는 아버지와 그를 돌보는 아들의 단조로운 이야기가 예기치 않은 공포의 상황으로 돌변하는 「배트맨과 로빈, 격론을 벌이다」, 죽음을 예언하는 기묘한 섬 이야기 「모래 언덕」,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집요한 죽음의 그림자 「어느 못된 꼬맹이」, 살해 혐의 앞에서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는 남자의 기막힌 반전과 죽음 앞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묘한 여운을 주는 「죽음」, 몽환적인 내레이션 작법이 돋보이는 기이한 작품 「납골당」, 거부할 수 없는 환상적인 거래 앞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가 늘 도덕성이라는 시험대에 올려져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도덕성」, 사후세계와 환생을 다룬 「사후세계」, 잘못 배달되어 온 기계로 인해 현실과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은 대체 현실의 판타지 「우르」까지.

 

 

 

   이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라면 「130킬로미터」, 「모래 언덕」을 꼽을 수 있겠다. 「130킬로미터」의 경우 위험에 처한 누군가를 도와줘야겠다는 인간의 선의를 이용한 잔혹한 공포와 우리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자동차라는 평범한 사물이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로 돌변하는 데에서 오는 섬뜩함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작품이다. 여느 작품보다 유년기에서부터 비롯되는 인간의 가장 말초적인 공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보다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우연히 발견한 모래 언덕이 있는 섬이 사실은 데스노트처럼 죽음을 예고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설정의 「모래 언덕」은 예고된 죽음이 현실로 이어지는 오싹한 체험을 하게 한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들의 죽음을 예고하려는 듯 수많은 이름으로 얼룩진 모래 언덕의 광경과 마지막 한 문장의 반전이 가희 압도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놀라운 작품이니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들은 단연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이 외에도 「어느 못된 꼬맹이」와 「우르」 역시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니 기억해두시길.

 

 

 

판사는 생각한다. 그는 플로리다 고속도로 순찰대의 지미 캐슬로에게 들은 말을 기억한다. 그가 말하길 콘도르는 단순히 썩은 고기가 있는 곳을 아는 게 아니라 썩은 고기가 생길 곳을 안다고 했다…(중략)… 이름 없는 이 조그만 섬에는 거의 언제나 콘도르들이 있다. 이곳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 모양인데 왜 아니겠는가. / 「모래 언덕」 중에서 152p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악마를 움직일 수는 없다고 하지. 악마는 언제나 살아남아서 커다란 새처럼 날아올라 다른 누군가에게로 옮겨가고. 그게 사람을 진 빠지게 만드는 거야, 그렇지 않니? 그게 정말로 진 빠지게 만드는 거야." / 「우르」 중에서 448p   

 

 

 

 

 

 

   <악몽을 파는 가게>를 읽으며 스티븐 킹은 불안과 상처와 같이 인간이 지닌 가장 연약한 감정에서 파생되는 공포를 재현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평소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악마성과 광기가 극한의 상황에서 얼마나 큰 공포를 불러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능력 또한 남다른 듯하다. 요코미조 세이시 이후로 계속해서 만나고 싶은 작가가 생긴 점에 즐겁다. 이제라도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된 점에 감사하며 오랫동안 독자와 함께 하는 작가로 남아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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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세기에 이르는 시간을 관통하여 삶과 죽음, 신과 믿음이라는 웅대한 주제를

능숙하게 조직한 '이야기 대가'의 귀환!

 

 

 

   이것은 '집'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추억으로 쌓아올려 서로를 향한 의미로 채운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번지와 호수로 그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따위의 것들이 아니라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 곧 집이 되는 삶의 정체성에 관한 소설이다. '기억과 의미가 머물러 있는 집', '현재를 살아가는 집',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집'에 대해 생각하게 함으로써 내 삶의 목적과 가치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찾아나가는 여정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위대한 서사이기도 하다.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파이 이야기> 이후 무려 15년 만에 출간된 얀 마텔의 신작이다. <파이 이야기>가 망망대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신과 진정한 믿음의 합일을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소년의 모험기라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저마다 상실의 아픔을 지닌 각각의 인물들이 삶의 목적과 나아갈 방향을 찾아가는 일련의 여정을 담아낸 것으로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 살던 인물들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마침내 그것이 마치 하나의 이야기인 듯 거대한 서사로 완성되는 마법 같은 스토리다. 1904년부터 1981년까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세 이야기를 절묘하게 하나로 엮은 이 뛰어난 역작은 '이야기의 대가'라는 그의 수식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고 장엄한 스토리, 환상 미학, 삶과 죽음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철학, 기발한 상상력과 은유까지 겸비한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사랑은 집이다. 매일 아침 수도관은 거품이 이는 새로운 감정들을 나르고, 하수구는 말다툼을 씻어 내리고, 환한 창문은 활짝 열려 새로이 다진 선의의 싱그러운 공기를 받아들인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집이다. 그에게도 한때 그런 집이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 35p

 

 

 

 

 

 

   소설은 3부에 걸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현재, 내 삶의 전부로 상징되는 '집'을 잃은 세 남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1부인 '집을 잃다'에서는 1904년 무렵 포르투갈의 리스본 지역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잃은 뒤, 연이어 아버지의 죽음까지 맞게 된 토마스가 등장한다. 예측 불가능했던 죽음이었기에 더욱 큰 상처가 되었을까, 이 가혹한 비극 앞에서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그때부터 1년째 '뒤로 걷기'를 실천한다. 그에게 있어서 뒤로 걷기는 죽은 자들을 위한 애도가 아니라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짐으로써 '반발'하는 은유와 상징의 행위였다.

 

 

 

바람, 비, 태양, 벌레들의 습격, 침울한 타인들, 불확실한 미래 등을 감당하는 데에는 뒤통수나 재킷의 등판, 바지의 엉덩이 부분같이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것들이 더 적합하지 않냐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보호막, 우리의 갑옷이라고. 그것들은 예측불허의 변화를 가져오는 운명을 견디도록 되어 있다고. 또한 뒤로 걸으면 더 섬세한 부분, 즉 얼굴, 가슴팍, 옷에 멋을 더하는 세부 장식을 앞쪽의 잔인한 세상으로부터 가릴 수 있고, 그 익명성은 돌아보고 싶을 때 간단히 몸을 돌림으로써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거라고 말했다. / 18p

 

 

 

   고미술 박물관에서 근무 중이었던 토마스는 일을 하다 우연히 1631년부터 기록된 율리시스 신부의 한 일기장을 발견하게 된다. 일기는 율리시스 신부가 기니 만에 있는 상투메 섬에 머무르며 사제 활동을 했던 때를 기록한 내용이다. 율리시스 신부는 15세기 말부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상투메 섬을 가리켜 '이 주머니는 망연자실한 아프리카의 영혼들로 짤랑거린다'고 표현할 만큼 불화하는 권력자들의 섬이자 아프리카 노예 무역지인 이곳에서 질병과 고독, 적막과 분노, 철저히 이방인으로 취급되어 고립된 백인의 심정으로 점차 환멸을 느끼게 된다. 목적의 상실로 인해 품게 된 깊은 회환, 상투메 종교 당국과의 분열로 결국 파문이라는 혹독한 조치를 당한 그는 마침내 기독교를 발칵 뒤집어 놓을 만한 기이한 십자고상을 만들게 된다.

 

 

 

   토마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집'을 잃어버린 자신의 모든 불행이 율리시스 신부가 상투메에서 겪은 모든 불행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가 만든 십자고상을 자신이 찾아내고 말겠다는 기묘한 끌림에 휩싸이게 되고 그것이 있다고 추정되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기에 이른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가는 기나긴 여정을 동행할 어마어마한 기계, 놀라움과 고난의 연속이 되어줄 자동차와 함께. 미숙한 운전실력, 세상 놀란 눈으로 자동차를 향해 밀려드는 인파들, 어딜 가나 똑같은 충고의 말, 이해력 부족, 길을 잃어 느끼는 마비, 무기력, 절망감, 극심한 피부병, 이따금씩 솟구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올라 치미는 슬픈 감정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토마스의 지난한 여정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 고난을 통해서 그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했던 십자고상을 만날 수 있을까.

 

 

 

그는 울음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 실컷, 심지어 몸부림치며 울지만, 그 마지막에는 뭐가 남는가? 황량한 피로감. 눈물 콧물에 젖은 손수건. 울었다는 걸 누구에게나 알리는 빨간 눈. 그리고 울음에는 품위가 없다. 울음은 예의범절을 초월한 개인의 언어이고, 표현 방식도 제각각이다. 얼굴 찌푸림, 눈물의 양, 흐느낌의 음색, 목소리의 높이, 소란의 크기, 안색에 미치는 영향, 손의 움직임, 취하는 포즈가 다 다르다. 사람은 오직 울 때 울음-울음의 개인적 특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낯선 발견이다. / 65p

 

 

 

   2부인 '집으로'에서는 시간을 건너 뛰어 1938년 포르투갈의 브라간사에 위치한 상 프란시스쿠 병원의 병리학 과장 에우제비우 로조가 등장한다. 새해인 1939년으로 넘어가기 직전, 그는 처리해야 할 서류들로 둘러싸인 너저분한 사무실에서 두 여인의 방문을 받게 된다. 첫 번째 방문자는 그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다. 강한 신앙심과 문학을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그의 앞에 꺼내놓으며 기나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하나는 예수의 기적들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에 관한 것인데 그녀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속에서 예수 이야기와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신앙이 지닌 비실용성과 이성이 지닌 맹목성, 이 둘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해결책이 될 거라는 난데없지만, <파이 이야기>에서부터 끊임없이 '신'과 '이야기'에 천착한 저자의 철학이 그녀의 육성을 통해 전달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터리에서 살인범은 우리 예상보다 가까운 인물이기 일쑤예요. 몇 가지만 꼽아보자면 <갈색 양복의 사나이><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3막의 비극><에이비씨 살인사건>, 특히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그렇죠. 우리는 멀리 있는 악은 명확하게 보지만, 악이 가까이 있을수록 윤리적 통찰력이 결여되죠. 가장자리가 흐릿해지고 핵심은 보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누가 한 짓인지 드러나면 '브르투스, 너마저?'라는 식으로 반응하죠. 유다가, 친구이자 길벗인 선한 이스가리옷 유다가 배반자임이 드러났을 때 다른 제자들은 틀림없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 거예요. 우리는 가까운 악을 얼마나 보지 못하는지요. 얼마나 외면하려 하는지요." / 192p

 

 

"그런데 애거서 크리스티와 복음서는 중요한 면에서 달라요. 이제 우린 예언과 기적의 시대에 살지 않아요. 복음서 시대 사람들과 달리 이제 우리 중에는 예수가 없어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은 존재의 서술이에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은 부재의 복음서들이고요. 의심은 더 많고 믿음은 더 적은 현대인들을 위한 현대의 복음서죠. 예수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발자취로, 망토와 가면을 쓰고 불명료하게 숨어서 존재해요. 하지만 봐요-예수(Christ)는 그녀의 성씨(Christie) 안에 떡하니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그는 대개 맴돌고 속삭일 뿐이요." / 199p

 

 

 

  두 번째로 방문을 한 여인의 이름 역시 마리아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남편의 시신을 가져와 느닷없이 그에게 부검을 부탁한다. 그리고 에우제비우에게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어요."라고 고백한다. 모든 시신은 들려줄 사연이 담긴 책이라 여기며, 시신 앞에서 마지막 서술자가 되어 늘 죽음이란 존재를 가까이 하지만 늘 결과론에 지나지 않았던 그에게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닌 어떻게 살았는지를 묻는 여인의 낯선 질문은 그는 당혹케 한다. 마침내 뭔가에 홀린 듯 여인 앞에서 남편의 시신을 부검하기 시작한 에우제비우는 그의 몸에서 토사물, 은화, 피리, 굴 껍데기, 장난감 수레, 말린 꽃잎 등등 믿을 수 없는 각종 물건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시신의 몸속에서 발견한 침팬지 한 마리와 침팬지가 보호하듯 안은 갈색 새끼 곰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슬픈 죽음에 관한 이야기 하나와 남편의 시신과 같이 꿰어 달라는 여인의 기괴한 요청, 에우제비우에 얽힌 놀라운 반전에 다다르게 된다. 이어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를 되뇌는 그녀의 음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치 한여름밤의 꿈처럼 펼쳐지는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이것이 1부와 3부를 연결하는 굉장히 중요한 장치로 작용함은 물론, 가장 문학적인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임을 의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3부작인 '집'에서는 1981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상원 의원으로 재직 중인 피터 토비가 등장한다. 아내를 잃고 아들마저 이혼을 하게 되어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 그는 기분 전환 삼아 오클라호마 주 의회의 초청으로 가게 된 곳에서 '오도'라는 이름을 지닌 침팬지를 만나게 된다. 아내를 잃은 상처를 위로받듯 오도로부터 묘한 교감을 주고받게 된 그는 만 5천 달러에 오도를 사게 되고, 한때 그의 모든 것이 머물러있던 집과 일을 정리하고 부모의 고향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이주하게 된다. 낯선 언어, 변변치 않은 살림살이, 해야 할 일이 사라진 시계마저 필요 없는 세상에서 그는 이제 오도와 공생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는 마침내 오도와 함께 하는 이야기가 곧 자신의 집임을 깨닫게 된다.

 

 

 

"침팬지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 예상하는 것 이상을 배웁니다. 침팬지는 진화론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입니다. 우리는 침팬지와 공통의 영장류 조상을 갖고 있지요.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진 것은 600만 년 정도밖에 안됩니다. 로버트 아드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진화된 유인원일 뿐 타락한 천사가 아니다.'" / 273p

 

 

오도와 투이젤루로 이주한 후 캐나다에 돌아가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 이제 그와 같은 종인 인간은 피로를 안겨준다. 그들은 너무 시끄럽고, 너무 성미가 까다롭고, 너무 고민하고, 너무 믿음이 가지 않는다. 피터는 오도의 곁에서 느끼는 강렬한 고요가, 무슨 일을 하든 생각에 잠긴 더딘 움직임이, 대단히 간결한 수단과 목적이 더 좋다. 그게 오도와 있을 때마다 그의 인간다움이, 경솔하게 서두르는 행동이, 복잡다단한 수단과 목적이 수치스럽다는 뜻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 362p

 

 

 

  뒤로 걷기, 침팬지, 포르투갈의 높은 산 그리고 집

 

 

   3부작을 한 데로 엮은 이 작품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신과 믿음, 죽음과 삶, 인간과 동물, 판타지와 현실이라는 이 거대한 주제를 이야기라는 틀에 꿰어 넣는 이 정교함에 저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높은 산'으로 명명되는 이 지역이 사실은 위압적으로 우뚝 선 큰 바위들만 있을 뿐 대평원이나 다름없는 곳임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놀라운 은유와 메시지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필사적으로 쫓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사실은 어떤 거대한 이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나가는 여정에 있다는 것을,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에 있다는 것을.

 

 

 

   공교롭게도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를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얀 마텔의 신작을 바로 읽을 수 있었던 점은 그의 세계관과 메시지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되었다. 감히 말하건데 그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통해 더욱 진화된 이야기를 선보였음은 물론, 남다른 작법으로 문학의 정수를 이끌어내었다. 이래서 이야기란 참으로 매혹적인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이 아름다움 때문에 오늘도 나는 책을 읽고 여기에 나의 집이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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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여성의 언어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본격 페미니즘 소설!

일곱 명의 작가가 모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단어가 있다면 단연 '페미니즘'이다. 그간 억압되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각종 차별적인 문제에 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뤄왔지만, 남성들의 시각에서 다루는 제한적인 형태가 아닌 여성들이 스스로 다양한 음성과 언어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에야 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소설을 쓰기 위해, 우리 시대의 역량 있는 여성 작가 일곱 명의 작품이 한 데로 모여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소설집이 탄생한 것은 그 뚜렷한 정체성이 오히려 낯설고 다소 이례적일만큼 남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나와 당신 모두 한번쯤은 겪었을, 현남 오빠라는 존재

 

 

   <82년생 김지영>이란 작품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조남주 작가를 비롯하여 주목받는 대표적인 여성작가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의 페미니즘 단편 소설 일곱 작품이 한 데에 모였다. 작품 뒤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 노트를 통해 미루어 짐작하건데, 처음부터 페미니즘 소설집을 구성하고자 하는 출판사의 기획 하에 작가들이 뜻을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여성들의 삶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일상적인 작품들은 물론, 소설적 상상력과 판타지를 결합한 독특한 시도가 눈에 띄는 작품 또한 상당수 있어 보다 다채로운 페미니즘 소설집이 완성된 듯하다.

 

 

 

   표제작인 「현남 오빠에게」는 현남 오빠의 청혼을 거절하려는 주인공이 그에게 쓰는 편지를 쓰는 것으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소설은 두 남녀가 만나 흔한 연애 생활 속에서 겪는 일상성을 매우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별을 앞둔 주인공의 고백에서 그간 말하지 못했던 이 연애의 불편한 기억과 감정들이 곳곳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를 테면 남녀가 만나서 사랑이란 감정을 공유하는 사이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들, 즉 주도권과 선택의 몫은 늘 남자 쪽에 있고 자신을 인생의 부속품으로 생각하는 듯한 오만한 태도와 그 뻔한 편견들을 조목조목 읊는 그녀의 말투에서 지긋지긋함과 질린 듯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분명 처음 읽는 소설인데 이 낯설지 않은 기시감은 뭘까. '어쩔 수 없다고, 별일 아니라고, 원래 그렇다고 생각했던 일들에 대해 자주 의심합니다'고 고백하는 작가 노트에서도 알 수 있듯 소설은 사실 미처 느끼지 못했거나 알고 있었으나 밖으로 꺼내 말하지 못했던 연애 관계의 불균형에서 이제는 의심하고, 외부로 한 발짝 나와 관계의 중심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꿈꾼다.

 

 

 

오빠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삶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해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빠의 질문은 "아이를 낳는 게 좋다고 생각해?"가 아니라 "아이를 몇 명이나 낳는 게 좋다고 생각해?"였고, "네가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가 아니라 "네가 아이를 몇 년쯤 직접 키울 수 있을까?"였으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해본 적 없다고 대답을 피하곤 했고 오빠는 왜 그렇게 계획 없이 사느냐고 저를 한심해했습니다. 하지만 오빠, 오빠가 아이를 직접 낳을 것도 키울 것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런 계획을 혼자 세우죠? 한심한 건 제가 아니라 오빠예요. / 「현남 오빠에게」 중에서 34p   

 

 

 

   결혼을 앞둔 동생 커플을 바라보는 누나 유진의 시선을 통해 모순된 결혼 관념, 맏딸에게 부여된 엄마라는 그늘 등을 다룬 「당신의 평화」 역시 「현남 오빠에게」만큼이나 매우 사실적인 작품이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유진에게서 나의 모습을 거울처럼 바라보곤 했다. 나 역시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일까, 자식들에게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히듯 살아온 수많은 엄마들의 삶의 무게를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자식 혹은 며느리들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상황들을 마주할 때면 숨이 막힐 때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당신의 평화」가 엄마를 향한 이중적인 감정들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라면, 「경년(更年)」은 두 아이를 낳고 사는 중년 엄마의 삶을 그린 소설로 이 역시 낯설지 않은 우리 시대 엄마들의 현주소를 들여다보게 한다. 소화가 잘 안 되고, 월경전증후군이 심해지고, 급뇨 증상이 일어나거나 갑자기 사소한 것에도 화가 나서 감정을 추스를 수 없게 될 때면 으레 '갱년기라서 그래'라는 말을 듣곤 하는 엄마들. 중학교 사내아이가 여자 친구를 만나고 관계까지 맺고 다닌다는 소식에 '요즘 애들은 워낙 빠르니까'라는 변명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착잡한 심정들까지. 특히나 사내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의 입장에서는 머지않아 닥쳐올 나의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해서 남다르게 여겨졌다.

 

 

 

내가 누구한테 말하겠니.

누가 내 얘기를 들어주겠니.

정순은 그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인정으로 느껴졌던 그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을 옥죄었다. 남동생이 태어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순은 아들에게는 자신이 겪은 괴로움을 시시콜콜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 「당신의 평화」 중에서 50p

 

 

랜소이스의 사막을 본 아침, 나는 내가 사뭇 이렇게 늙어가게 될 것 같은 아득한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는 음모 새치를 아무렇지 않게 뽑을 것이고, 아이들은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 곳곳을 아무렇지 않게 다닐 것이며, 나는 그 사실을 무감하게 받아들이겠지. 이십대에 가졌던 꿈이라든지, 삼십대에 열망했던 미래에 대한 희망은 결국 기억에 남지도 않을 것이었다. 나는 노트북을 소리 나게 덮어버렸다. / 「경년」 중에서 87p

 

 

 

   이처럼 여자로, 딸로, 엄마로 살아가는 숱한 여성들의 삶을 사실감 있게 그려낸 소설들이 많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면, 「모든 것을 제자리에」, 「이방인」,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화성의 아이」는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여성들의 삶을 외부로 끄집어낸다. 붕괴된 건물을 촬영하는 낯선 직업의 율이 등장하는 「모든 것을 제자리에」의 경우, 책 속에 수록된 여러 작품들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작품이기는 했지만 여성 스스로가 가지고 있었던 내 안의 여성혐오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한 남다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방인」 역시 여성이 주인공인 느와르풍의 소설이라는 다소 낯선 풍경이 이색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지닌 작품은 단연 구병모 작가의 작품 「하루피아이와 축제의 밤」이다. 친구의 부탁으로 남장 여장 대회에 참가하게 된 표는 처음 와보는 섬의 낯선 도시에서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여성들처럼 화장을 하고, 옷과 구두, 장식을 한다. 참가자의 이력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여성으로 치장된 남성들이 1번부터 무대에 오름으로써 축제가 시작되는데, 느닷없이 수많은 화살 다발이 그들을 향해 퍼부어지고 이내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내몰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무자비한 공습의 이면에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그 존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그간 수많은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잔인한 남성들의 역사'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것 아닌 신에 발을 꿰기 전에는, 영원한 타인의 옷을 입어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감각들이 표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럼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증보다는 가려움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중에서 237p

 

 

 

   이어 「화성의 아이」는 화성으로 쏘아진 열두 마리의 실험동물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와 실험동물의 원조로 인간보다 빨리 우주로 나간 최초의 생명체이나 이미 죽은 개의 영혼을 한 '라이카', 버려진 탐사로봇 '데이모스'가 화성에서 의지해 살아가는 이야기다. 공상 과학 혹은 우주 소설과 같은 판타지 형식의 소설이 대체 왜 페미니즘 소설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에 의문을 내내 가지게 되는데, '나'가 알고 보니 뱃속에 새끼를 품은 암컷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임신한 나를 자신의 딸처럼 돌보는 라이카와 데이모스를 통해 생명이란 존재의 유한한 가치와 공존, 희망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렇게 「현남 오빠에게」로 대표되는 일곱 편의 소설집은 저마다 다른 문체와 개성 있는 구성으로 페미니즘의 가치를 실현한다. 의미 있는 것은 '책으로 읽는 페미니즘과 SNS에서 드러나는 페미니즘, 내가 아는 페미니즘과 희망하는 페미니즘, 내 집에서의 페미니즘-딸들에게 설명하는 페미니즘과 남편을 설득하는 페미니즘, 내가 쓰고 싶었던 소설 속의 페미니즘과 결국 내 소설 속에 갇혀버리고 만 페미니즘이 모드 다 다른 언어'여서 '무엇보다도 실제의 내가 실천하는 페미니즘이 그 모든 페미니즘을 따라잡을 수 없어 나는 너무 자주 곤란해지곤 했다'는 김이설 작가의 고백처럼 여전히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와 고민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단 점이다. 여성들뿐만 아니라 많은 남성들이 이 책을 읽고 함께 이해와 공감의 시간을 가져주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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