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세기에 이르는 시간을 관통하여 삶과 죽음, 신과 믿음이라는 웅대한 주제를

능숙하게 조직한 '이야기 대가'의 귀환!

 

 

 

   이것은 '집'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추억으로 쌓아올려 서로를 향한 의미로 채운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번지와 호수로 그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따위의 것들이 아니라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 곧 집이 되는 삶의 정체성에 관한 소설이다. '기억과 의미가 머물러 있는 집', '현재를 살아가는 집',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집'에 대해 생각하게 함으로써 내 삶의 목적과 가치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찾아나가는 여정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위대한 서사이기도 하다.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파이 이야기> 이후 무려 15년 만에 출간된 얀 마텔의 신작이다. <파이 이야기>가 망망대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신과 진정한 믿음의 합일을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소년의 모험기라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저마다 상실의 아픔을 지닌 각각의 인물들이 삶의 목적과 나아갈 방향을 찾아가는 일련의 여정을 담아낸 것으로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 살던 인물들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마침내 그것이 마치 하나의 이야기인 듯 거대한 서사로 완성되는 마법 같은 스토리다. 1904년부터 1981년까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세 이야기를 절묘하게 하나로 엮은 이 뛰어난 역작은 '이야기의 대가'라는 그의 수식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고 장엄한 스토리, 환상 미학, 삶과 죽음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철학, 기발한 상상력과 은유까지 겸비한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사랑은 집이다. 매일 아침 수도관은 거품이 이는 새로운 감정들을 나르고, 하수구는 말다툼을 씻어 내리고, 환한 창문은 활짝 열려 새로이 다진 선의의 싱그러운 공기를 받아들인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집이다. 그에게도 한때 그런 집이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 35p

 

 

 

 

 

 

   소설은 3부에 걸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현재, 내 삶의 전부로 상징되는 '집'을 잃은 세 남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1부인 '집을 잃다'에서는 1904년 무렵 포르투갈의 리스본 지역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잃은 뒤, 연이어 아버지의 죽음까지 맞게 된 토마스가 등장한다. 예측 불가능했던 죽음이었기에 더욱 큰 상처가 되었을까, 이 가혹한 비극 앞에서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그때부터 1년째 '뒤로 걷기'를 실천한다. 그에게 있어서 뒤로 걷기는 죽은 자들을 위한 애도가 아니라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짐으로써 '반발'하는 은유와 상징의 행위였다.

 

 

 

바람, 비, 태양, 벌레들의 습격, 침울한 타인들, 불확실한 미래 등을 감당하는 데에는 뒤통수나 재킷의 등판, 바지의 엉덩이 부분같이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것들이 더 적합하지 않냐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보호막, 우리의 갑옷이라고. 그것들은 예측불허의 변화를 가져오는 운명을 견디도록 되어 있다고. 또한 뒤로 걸으면 더 섬세한 부분, 즉 얼굴, 가슴팍, 옷에 멋을 더하는 세부 장식을 앞쪽의 잔인한 세상으로부터 가릴 수 있고, 그 익명성은 돌아보고 싶을 때 간단히 몸을 돌림으로써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거라고 말했다. / 18p

 

 

 

   고미술 박물관에서 근무 중이었던 토마스는 일을 하다 우연히 1631년부터 기록된 율리시스 신부의 한 일기장을 발견하게 된다. 일기는 율리시스 신부가 기니 만에 있는 상투메 섬에 머무르며 사제 활동을 했던 때를 기록한 내용이다. 율리시스 신부는 15세기 말부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상투메 섬을 가리켜 '이 주머니는 망연자실한 아프리카의 영혼들로 짤랑거린다'고 표현할 만큼 불화하는 권력자들의 섬이자 아프리카 노예 무역지인 이곳에서 질병과 고독, 적막과 분노, 철저히 이방인으로 취급되어 고립된 백인의 심정으로 점차 환멸을 느끼게 된다. 목적의 상실로 인해 품게 된 깊은 회환, 상투메 종교 당국과의 분열로 결국 파문이라는 혹독한 조치를 당한 그는 마침내 기독교를 발칵 뒤집어 놓을 만한 기이한 십자고상을 만들게 된다.

 

 

 

   토마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집'을 잃어버린 자신의 모든 불행이 율리시스 신부가 상투메에서 겪은 모든 불행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가 만든 십자고상을 자신이 찾아내고 말겠다는 기묘한 끌림에 휩싸이게 되고 그것이 있다고 추정되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기에 이른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가는 기나긴 여정을 동행할 어마어마한 기계, 놀라움과 고난의 연속이 되어줄 자동차와 함께. 미숙한 운전실력, 세상 놀란 눈으로 자동차를 향해 밀려드는 인파들, 어딜 가나 똑같은 충고의 말, 이해력 부족, 길을 잃어 느끼는 마비, 무기력, 절망감, 극심한 피부병, 이따금씩 솟구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올라 치미는 슬픈 감정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토마스의 지난한 여정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 고난을 통해서 그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했던 십자고상을 만날 수 있을까.

 

 

 

그는 울음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 실컷, 심지어 몸부림치며 울지만, 그 마지막에는 뭐가 남는가? 황량한 피로감. 눈물 콧물에 젖은 손수건. 울었다는 걸 누구에게나 알리는 빨간 눈. 그리고 울음에는 품위가 없다. 울음은 예의범절을 초월한 개인의 언어이고, 표현 방식도 제각각이다. 얼굴 찌푸림, 눈물의 양, 흐느낌의 음색, 목소리의 높이, 소란의 크기, 안색에 미치는 영향, 손의 움직임, 취하는 포즈가 다 다르다. 사람은 오직 울 때 울음-울음의 개인적 특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낯선 발견이다. / 65p

 

 

 

   2부인 '집으로'에서는 시간을 건너 뛰어 1938년 포르투갈의 브라간사에 위치한 상 프란시스쿠 병원의 병리학 과장 에우제비우 로조가 등장한다. 새해인 1939년으로 넘어가기 직전, 그는 처리해야 할 서류들로 둘러싸인 너저분한 사무실에서 두 여인의 방문을 받게 된다. 첫 번째 방문자는 그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다. 강한 신앙심과 문학을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그의 앞에 꺼내놓으며 기나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하나는 예수의 기적들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에 관한 것인데 그녀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속에서 예수 이야기와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신앙이 지닌 비실용성과 이성이 지닌 맹목성, 이 둘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해결책이 될 거라는 난데없지만, <파이 이야기>에서부터 끊임없이 '신'과 '이야기'에 천착한 저자의 철학이 그녀의 육성을 통해 전달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터리에서 살인범은 우리 예상보다 가까운 인물이기 일쑤예요. 몇 가지만 꼽아보자면 <갈색 양복의 사나이><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3막의 비극><에이비씨 살인사건>, 특히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그렇죠. 우리는 멀리 있는 악은 명확하게 보지만, 악이 가까이 있을수록 윤리적 통찰력이 결여되죠. 가장자리가 흐릿해지고 핵심은 보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누가 한 짓인지 드러나면 '브르투스, 너마저?'라는 식으로 반응하죠. 유다가, 친구이자 길벗인 선한 이스가리옷 유다가 배반자임이 드러났을 때 다른 제자들은 틀림없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 거예요. 우리는 가까운 악을 얼마나 보지 못하는지요. 얼마나 외면하려 하는지요." / 192p

 

 

"그런데 애거서 크리스티와 복음서는 중요한 면에서 달라요. 이제 우린 예언과 기적의 시대에 살지 않아요. 복음서 시대 사람들과 달리 이제 우리 중에는 예수가 없어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은 존재의 서술이에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은 부재의 복음서들이고요. 의심은 더 많고 믿음은 더 적은 현대인들을 위한 현대의 복음서죠. 예수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발자취로, 망토와 가면을 쓰고 불명료하게 숨어서 존재해요. 하지만 봐요-예수(Christ)는 그녀의 성씨(Christie) 안에 떡하니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그는 대개 맴돌고 속삭일 뿐이요." / 199p

 

 

 

  두 번째로 방문을 한 여인의 이름 역시 마리아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남편의 시신을 가져와 느닷없이 그에게 부검을 부탁한다. 그리고 에우제비우에게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어요."라고 고백한다. 모든 시신은 들려줄 사연이 담긴 책이라 여기며, 시신 앞에서 마지막 서술자가 되어 늘 죽음이란 존재를 가까이 하지만 늘 결과론에 지나지 않았던 그에게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닌 어떻게 살았는지를 묻는 여인의 낯선 질문은 그는 당혹케 한다. 마침내 뭔가에 홀린 듯 여인 앞에서 남편의 시신을 부검하기 시작한 에우제비우는 그의 몸에서 토사물, 은화, 피리, 굴 껍데기, 장난감 수레, 말린 꽃잎 등등 믿을 수 없는 각종 물건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시신의 몸속에서 발견한 침팬지 한 마리와 침팬지가 보호하듯 안은 갈색 새끼 곰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슬픈 죽음에 관한 이야기 하나와 남편의 시신과 같이 꿰어 달라는 여인의 기괴한 요청, 에우제비우에 얽힌 놀라운 반전에 다다르게 된다. 이어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를 되뇌는 그녀의 음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치 한여름밤의 꿈처럼 펼쳐지는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이것이 1부와 3부를 연결하는 굉장히 중요한 장치로 작용함은 물론, 가장 문학적인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임을 의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3부작인 '집'에서는 1981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상원 의원으로 재직 중인 피터 토비가 등장한다. 아내를 잃고 아들마저 이혼을 하게 되어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 그는 기분 전환 삼아 오클라호마 주 의회의 초청으로 가게 된 곳에서 '오도'라는 이름을 지닌 침팬지를 만나게 된다. 아내를 잃은 상처를 위로받듯 오도로부터 묘한 교감을 주고받게 된 그는 만 5천 달러에 오도를 사게 되고, 한때 그의 모든 것이 머물러있던 집과 일을 정리하고 부모의 고향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이주하게 된다. 낯선 언어, 변변치 않은 살림살이, 해야 할 일이 사라진 시계마저 필요 없는 세상에서 그는 이제 오도와 공생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는 마침내 오도와 함께 하는 이야기가 곧 자신의 집임을 깨닫게 된다.

 

 

 

"침팬지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 예상하는 것 이상을 배웁니다. 침팬지는 진화론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입니다. 우리는 침팬지와 공통의 영장류 조상을 갖고 있지요.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진 것은 600만 년 정도밖에 안됩니다. 로버트 아드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진화된 유인원일 뿐 타락한 천사가 아니다.'" / 273p

 

 

오도와 투이젤루로 이주한 후 캐나다에 돌아가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 이제 그와 같은 종인 인간은 피로를 안겨준다. 그들은 너무 시끄럽고, 너무 성미가 까다롭고, 너무 고민하고, 너무 믿음이 가지 않는다. 피터는 오도의 곁에서 느끼는 강렬한 고요가, 무슨 일을 하든 생각에 잠긴 더딘 움직임이, 대단히 간결한 수단과 목적이 더 좋다. 그게 오도와 있을 때마다 그의 인간다움이, 경솔하게 서두르는 행동이, 복잡다단한 수단과 목적이 수치스럽다는 뜻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 362p

 

 

 

  뒤로 걷기, 침팬지, 포르투갈의 높은 산 그리고 집

 

 

   3부작을 한 데로 엮은 이 작품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신과 믿음, 죽음과 삶, 인간과 동물, 판타지와 현실이라는 이 거대한 주제를 이야기라는 틀에 꿰어 넣는 이 정교함에 저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높은 산'으로 명명되는 이 지역이 사실은 위압적으로 우뚝 선 큰 바위들만 있을 뿐 대평원이나 다름없는 곳임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놀라운 은유와 메시지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필사적으로 쫓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사실은 어떤 거대한 이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나가는 여정에 있다는 것을,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에 있다는 것을.

 

 

 

   공교롭게도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를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얀 마텔의 신작을 바로 읽을 수 있었던 점은 그의 세계관과 메시지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되었다. 감히 말하건데 그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통해 더욱 진화된 이야기를 선보였음은 물론, 남다른 작법으로 문학의 정수를 이끌어내었다. 이래서 이야기란 참으로 매혹적인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이 아름다움 때문에 오늘도 나는 책을 읽고 여기에 나의 집이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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