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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페퍼 -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이진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평점 :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20180104_151934.jpg)
아내가 죽은 뒤 스스로를
가두고 살았던 남자에게 찾아온 놀라운 삶의 변화!
과거가 아닌 앞으로 나아가는 삶에 대한 희망을 주는 가슴 따뜻한 소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아내 혹은 남편이 곁을 떠나 홀로 남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잠깐의 이별도 아쉽기
마련인데, 하물며 사랑하는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다면 그 거대한 상실감을 무슨 수로 메울 수 있을지 차마 짐작하기도 어렵다.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흔히 하는 위로의 말로,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 하듯 바쁜 일상과 삶의 변화에 기대어 조금이나마 잊을 수는 있겠지만 예순아홉 살이 된
은퇴한 열쇠수리공이자 미래라는 꿈을 꾸기엔 너무나 나이가 들어버린 노인으로서는 그저 아내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깃든 공간 속에 자신을 가두어두는
일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을 듯하다.
딸 루시와 아들 댄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미리엄의 웃음소리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아서 페퍼는 아내가 죽은 지 1년
째 되는 날, 그녀의 유품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고 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식상한 위로를 건네던 딸
루시와 이제는 새 가정을 꾸리고 고향인 영국을 떠나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해 살고 있는 아들 댄이 더 이상 집 안을 박물관으로 만들지 말고 다
내다버리라고 퉁명스럽게 말한 것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아서는 아내와의 추억이 묻어난 유품을 정리하던 도중 벼룩시장에서 산 부츠 한쪽에서 하트
모양의 상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화려한 금팔찌가, 엄밀히 말하자면 코끼리, 꽃, 책, 팔레트, 호랑이, 골무,
하트, 그리고 반지까지 여덟 개의 참이 달려있는 장신구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여덟 개의 참, 그 의미를 찾아 아내의 과거를 추적하다
초록빛의 에메랄드 보석이 박혀 있는 코끼리 참이 유독 인상적이었던 아서는 꼬리 부분에 새겨진 "아야, 0091
832 221 897"이란 글자를 발견한다. 그는 아야가 ‘동아시아나 인도의 보모 또는 가정부’를 일컫는 말이며, 인도의 국가번호가 0091이란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된다. 그는 누구에게든 충동적으로 전화를 거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참에 얽힌 호기심에 이끌려 적혀진 번호를 누르고 만다.
이날의 전화 통화는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과거 아내의 행적을 추적하는 신호탄이 된다. 이후 호랑이, 책, 꽃, 골무, 팔레트, 하트 참의
순서에 따라 그는 아내가 떠난 뒤로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집을 떠나 영국 배스, 런던, 프랑스, 인도 등에 이르는 뜻밖의 여행을 하기에
이른다.
드 쇼펑이라는 작자에 대해 아서가 느끼는 감정이 불안과 질투라고 해도, 그 감정으로
인해 그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의 몸에는 충격요법이 필요했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안락한 감옥을 뒤흔들 무언가가 필요했다. 미리엄과의 추억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 집에 살고 있는 아서에게는 뭔가 다른 게 필요했다.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서 프레더리카가 촉촉하게 잘 있는지 보고
옷가지를 더 챙겨야지. 그다음엔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 126p
"만약 당신이 어떤 여자를 만났는데, 당신을 만나기 전에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귀었고 전혀 다른 세상에 살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했는데 그 얘기를 당신한테 하지 않았다면, 그게 문제가 될까요?"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했다. "아뇨. 그건 그 여자 사정인 거죠.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요. 현재에 충실하고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현재에 만족한다면 왜 뒤를 돌아보겠어요?" /
163p
여행을 하면 할수록 아서는 그가 알지 못했던 아내 미리엄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꽤나 멋진 삶을 살기도 했던 그녀가 별 볼일 없는 열쇠수리공일 뿐인 자신에게로 와 과연 행복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수시로 고개를 든다. 아이들을
키운 뒤로 그들은 함께 새로운 곳들을 가보고 새로운 경험들을 했어야 했다고, 늘 정확하게 계획된 삶을 살았던 그의 고집스러운 생활 방식이 그녀의
숨통을 조인 것은 아닌지 후회와 자괴감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과거를 쫓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는 와중에 그는 서서히 깨닫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아내가 죽은 뒤 제자리에 머물러만 있던 그가 조금씩 궁리를 하고 결정을 내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자신이 스스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강하고 더 속 깊은 사람이었고, 자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발견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실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어요." 그가 시인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변하고 성장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다른 사람들도 날 만나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얻을 수도
있겠지요. 기분이 묘합디다." / 172p
그 사람들과 사건들이 아서의 내면에서 불러일으킨 것은 갈망이었다. 욕정이나 그리움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는 돕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호랑이가 그를 공격했을
때 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오렌지색 짐승이 그를 내려다볼 때, 그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생각했다. / 226p
참의 역사, 아내의 과거를 추적하는 동안 아서가 발견한 것은 결국 그 자신에 관한 것들이었다. 참은 아내의 과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소원했던 딸과 아들과의 유대를 복원하고, 벽을 세우고 있었던 이웃과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에게 한 발짝씩 다가가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아내 미리엄은 지금 비록 곁에 없지만 그녀를 추억하고 함께
사랑했던 이들이 그의 곁에 있는 한 흘려보내기보다 채워가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여행을 하면서 미리엄이 알았던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내가 하는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이 날 기억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더구나. 미리엄은 더 이상 여기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아직 살아 있어." / 272p
<아서 페퍼>는 <오베라는 남자>와 <브릿마리 여기 있다>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과 유사한 경향이 있지만 깐깐하고 모난 구석이 있는 노년의 캐릭터가 아닌,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고
평범하지만 연륜과 지혜를 지닌 캐릭터가 주인공이란 한다는 점에서 보다 공감이 가는 작품이다. 때문에 늘 과거에 집착하고 후회의 말들을 곧잘 하곤
하는 나의 조부모님에게 아서의 이야기가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당신 삶은 과거에 멈춘 것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때가 나에게도 오기를
바래보게 된다. 무엇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내 사람과의 삶을 더욱 사랑하고 충만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아서가 그러했듯, '왜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땐 그 순간을 즐기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미련으로 삶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삶의 순간순간과 그것을 함께 한 사람들에 감사해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닫게 해준 <아서
페퍼>는 이 차가운 겨울날, 그 어느 책보다 내게 완벽하고 따뜻한 독서가 되어 주었다. 꽤 오랫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