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에 없던 새로운
역사소설의 지평을 열다
11차 조선통신사의 행적을 정교하고도 유쾌하게 그려낸
역사소설!
몇 달 전에 읽은 대마도 여행가이드북에서 유독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조선통신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으로 대마도인들이 더는 조선과 무역을 할 수 없어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중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 다시
관계를 맺어 조선통신사를 초청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그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그 집안의 위패를 모신 흔적을 모셔두었다는 만송원을 비롯하여
마지막 조선통신사가 머물렀던 객사 국분사,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에 있는 조선통신사 비와 통신사행렬도 등 다수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까닭이다.
대마도가 지정학적으로 대한민국과 일본을 이어온 섬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처럼 국사책에서 단 몇 줄의 설명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조선통신사의 자취가 그곳에 오롯이 남겨져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고작 아는 것이라곤 '조선과 일본 양국의 문화적 교류의 상징' 정도뿐이라 역사
속 생생한 현장의 감동을 크게 느낄 수 없어 퍽 아쉬웠다. 그런데 때마침 <조선통신사>라는 이름의 역사소설이 출간되어 지난 독서에서
덮어두었던 아쉬움을 만회할 기회가 생겼다. 왕후장상이 나오는 것도 아니요, 영웅호걸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지만 어쩐지 이 책은 한 번쯤 꼭
읽어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양국의 뿌리 깊은 역사를 좀 더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았고,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졌던 조선 오백 인의 '진짜' 이야기가 무엇일까 과연 궁금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5백 사내, 3백 일,
1만 리의 일본견문록
<조선통신사>는 조일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1763년에서 1764년까지 일본으로 파견된 제11차
계미사행단의 이야기를 그린 역사소설이다. 강호까지 다녀온 마지막 사행단으로 500여 명에 이르는 조선의 사내들이 332일, 1만 리라는 긴
여정을 다녀온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저자가 무려 4년 만에 소설로 구현해낸 집념의 작품이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무척
'사실적'이라는 느낌을 준다는 데 있는 듯하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주인공의 대활약상을 그린 것도 아니고, 조선통신사라는 비교적 상징적인 이미지와
그 의의를 과대포장하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대서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여 명에
이르는 조선 사내들과 이들을 강호로 안내하는 대마도인을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들을 마치 옆에서 면밀하게 관찰한 듯 생동감 있게 구현해냈음은 물론,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재현해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재능 있어 뵈는데 뭘, 꼭 써야 한다. 살해일왕 어쩌고 그건 접어두고 먼저 얘기한
거 말이다. 동고동락한 거. 네 진심이 절반만 발휘되어도 읽을 만하지 않겠느냐?……. 원래 좋은 이야기는 많은 이에게 읽히지 않는 법이란다.
나라와 주군께 충성하고 어버이께 효도하자, 삼강하고 오륜하자, 좋은 놈 잘되고 나쁜 놈 망한다, 사랑은 숭고하다, 이런 도덕 염불로 도배된
이야기나 팔리지. 진짜 이야기는 알아먹는 사람이나 알아먹는 것인지라 안 팔리는 게 당연하다. 자기계발, 처세술 책보다 안 팔리는 게 진짜
이야기야. 대중이 못 알아먹거든. 하지만 진짜 이야기도 필요한 법이란다. 너에게 희망을 건다." / <조선통신사> 1 중에서 60p
소설은 총 책임자인 조엄을 비롯하여 부사, 종사관, 제술관, 군관, 서기, 역관, 의원, 화원, 소동, 악공, 격군
등 이들이 통신사 일행으로 차출되는 과정에서부터 돌아와 가족을 만나기까지 그 여정의 흐름을 차곡차곡 밟아나간다. 굉장히 많은 인물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분산되거나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유려하게 흘러간다. 그 중 도입부에 통신사로 파견될 아랫사람 수백 인을
차출하는 과정이 자못 흥미롭다. 족히 만 명은 넘는 인파들이 모인 가운데 시험과제가 제시되는데 첫 번째가 부산진지성 남문까지 선착순으로 뛰어
삼백 등까지 통과하기, 벼 한 섬을 지고 오백 보 이상 떨어뜨리지 않고 걷기, 노질하기 등이었다. 통신사로 가는데 이런 시험이 왜 필요하냐며
구시렁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사행단에 참가하면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줄 알았던 이들에게 기대할 것 없을 거라며 면박을 주는 소리도 들리고,
더러는 40년 가까이 용상에 올라 물러날 줄 모르는 영조와 그가 내린 금주령에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까지, 온갖 기대와 한탄이 뒤섞여
들려온다.
조선의 강렬함을 주지시킬 것이며, 왜국의 사정을 속속들이 살펴봐야 할 이 중대한 사행단의 의미야 더 말해
무엇할까마는 대체 누구를 위한 행차라 할 것인지, 이 수백여 명이 먹고 잘 곳을 마련해야 하는 각 지역에서는 이들에게 지공할 것들을 마련하느라
하루에 백여 금의 비용이 들 지경이니 각종 폐단도 만만치 않다. 신분 차별로 인해 아랫사람들이 비루한 대접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고, 모호한 신분
처지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깔보기도 하며, 각 고을의 여기저기서 온 사내들이 무려 오백 여명이 있는 곳이다 보니 감정싸움이 왕왕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가무와 놀이판, 이야기판과 같은 흥겨운 광경이나 단합이 이뤄지기도 하니 조선의 풍속과 저마다의 목소리를 매우 사실감 있고
유쾌하게 담아내는 저자의 놀라운 입담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구경은 잘한다. 도대체 이름도 모르겠는 그 진귀한 것들을 얼마나 실컷 봤는지 지금 내
눈이 내 눈이 아니다. 그게 다 어디서 오는 거냐? 불쌍한 팔도 백성들한테 빼앗은 거 아니냐? 다 그만두고 호피, 호랑이 껍데기 말이다, 그것만
열 장은 봤다. 죽여주더라. 호랑이 한 마리 잡으려면 얼마나 많은 인민이 개고생을 해야 하냐?
…… 나도 알아. 주는 것만큼 받아온다고. 지들 딴에는 교린을 빙자한 무역이라는
건데, 문제는 지들끼리 나눠 먹는 거잖아. 팔도 백성은 그만두고, 봉물 싸고 나르고 쌔 빠지게 고생한 우리 격군, 아니, 격군 생병신들한테
떨어지는 게 있느냐고? 뭐, 쪼금 주기는 준다던데 받기 전에는 받은 게 아니고. / <조선통신사> 1 중에서 65p
대마도를 거쳐 강호로 들어가기까지의 여정 또한 참 만만치 않았음을 실감할 수 있다. 통신사가 꾸려지면 배를 타고
왜국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 사정으로 인해 조선 사공과 왜 사공이 일치되어야 배를 띄울 수 있음은 물론 각종
관행과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한 고장에서 여러 며칠, 수십 일을 지체하는 일도 허다했던 것이다. 문득 박물관이나 국사책에서 본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낯설게 느껴진다. 조선통신사 하면 자칫 조선인들로만 이루어진 행렬인 줄 알기 쉽지만 이들을 인도하는 강호인 천여 명, 배행하는 대마인
2천여 명, 통신사 수천 명, 호행하는 고장인 2천여 명 등 무려 만 명에 달하는 장대한 행렬이고 보니 어찌 온갖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장엄하고 엄숙한 풍경 뒤에 이토록 지난한 여정이 숨어 있었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통신사의 표면 목적은, 임금의 국서-별 거 아니고, 관백 직위 이어받는 것을
축하한다는 몇 문장-를 새 관백에게 전하는 '전명'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외교사절이 오가는 것은 겉으로는 간단명료해 보여도, 속은 시시콜콜
복잡하다. 뭐, 저런 사소한 문제 가지고 저토록 사생결단 우기고 버티고 티격태격한단 말인가. 단순한 목적 안에 오사리잡놈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 <조선통신사> 2 중에서 108p
어쩌면 다른 까닭은 다 빚 좋은 개살구고, 조선과 일본은 오로지 '초량왜관'을
유지하기 위한 보증수표로 통신사를 보내고 받았는지도 모른다. 통신사가 오가던 시절에 일본은 막대한 은 생산국이었다. 일본의 은이 교토에 모인다.
교토에서 대마도를 거쳐 초량왜관으로 들어간다. 은은 조선 서울로 옮겨졌다가, 중국 가는 연행사 편에 베이징으로 이동한다. 중국 베이징은 비단의
집결지였다. 조선 사신은 비단을 매입하여 귀국한다. 이 비단이 한양을 거쳐 초량왜관으로 들어간다. 대마도를 거쳐 교토로 들어간다. 일본의 최대
산업이 비단 방직이었다. 초량왜관은 중국·조선·일본을 잇는 비단길의 거점이기도 했고, 일본·조선·중국을 잇는 은길의 거점이기도 했다. 조선·일본
간 인삼길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 300p
제11차 계미사행단의 면면을 살펴보면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간혹 총 책임자인
조엄이나 한학 암물통사 이언진, 부사 서기 원중거의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다. 이 소설에 있어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토록 낯설고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역사 인물들을 매우 입체감 있게 재현하면서, 동시에 커다란 역사 뒤에 숨겨진 이면의 역사들을 끄집어내
역사란 결코 한 단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왕후장상이 나오지 않아도, 영웅호걸이 나오지 않아도 이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다.
후대인들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잘 알고 우러러보지만, 원중거의 『승사록』과
『화국지』는 잘 모르고 알아도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 학자의 눈에는 분명 수준 차이라는 게 확연하겠지만, 박지원의 책은 조선보다 앞선다는
선입견이 강했던 중국에 대한 기록이고, 원중거의 책은 오랑캐 금수의 나라로 여겼던 일본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무시당한 바도 크지 않을까?
강호에 머무는 통신사는, 사사건건 무식하고 해괴한 오랑캐놈들이라 깔보려고 애썼다.
한데 어떤지 오랑캐놈들의 격물과 문화가 더 발전되고 볼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느낌을 주체할 수 없었다. / 138p
책의 말미에 '조선통신사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이 적혀 있어 무척 반갑다. 덕분에
<조선통신사>역시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또 다른 기록물처럼 여겨진다. 부산에 가면
'조선통신사역사관'도 있다고 하니 언젠가 아이와 손잡고 가봐야겠다. 오랜만에 읽는 역사소설인데 정말 흠뻑 빠져서 읽었다.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