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머무는 밤
현동경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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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 가는 일상과 비워 가는 여행, 그 모든 순간의 기록!

사사로운 것에 흔들리고 무너지며 기꺼이 동요당할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감성에세이!

 

 

 

   1년 전에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내내 물리적, 정신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한 노인이 우연히 알게 된 아내의 과거 행적을 쫓아 여행을 떠나는 내용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노인에게 있어 여행의 목적은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아내의 과거 찾는 데 있었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깨달아가는 즐거움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사사롭지만 정해진 일상의 규칙에서 벗어나 이제껏 해보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여행'이었다. 그가 자신이 용기를 내어 집밖으로 발을 내딛지 않았다면, 여행을 하는 내내 만나게 되는 갖가지 사건과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마냥 두려워만 하고 있었더라면 감히 '미래'라는 것을 꿈꿀 수 있었을까. 여행이란 그런 것 같다. 반드시 물리적으로 어떤 먼 곳을 떠나는 게 아니라 일상을 떠받치고 미래로 나아가는 하는 어떤 자유의지를 얻어가는 과정 그 모두가 우리에겐 여행인 듯하다.

 

 

 

   <기억이 머무는 밤>의 저자 역시 살아온 틀을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낯선 것을 비롯한 두려움은 모두 여행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새로운 회사와 학교에 면접을 보러 가는 그 길의 두려움은 내 미래에 대한 여행인 것이고, 겪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삶의 성숙을 이끈다. 어쩌면 여행은 익숙하지 않은 또 다른 현실로 나아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나와 앞으로의 나를 견주게 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이국의 풍경과 자유, 낭만과 고행으로 점철된 여느 여행에세이와 조금은 다른 글을 써내려간다.

 

 

 

 

 

 

 

현실. 그러고 보면 여행지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에서 '현실'에서 벗어난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는 듯했다. 먹고 싶은 거 먹고 쉬고 싶은 만큼 쉬는 것. 살아 숨 쉬는 내가 값을 주고 행하는 모든 것이 어찌 비현실이 될 수 있는지. 혹시 그 누군가 이 모든 걸 비현실로 정의 내렸기 때문에 현실과의 이해관계에서 숱한 장애물이 생겨나고 결국 잊어 가야만 살아가기 편하게끔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런지. / 221p 

 

 

 

   어쩐지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름의 저자, 현동경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 강한 사람이라 스스로를 소개한다. 이를 테면 만년필과 종이의 마찰음, 길거리 공중전화나 LP판에 마음이 이끌린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하듯 저자 역시 어느 가을날 건조하게 말라 부스러져 버린 낙엽 같은 세상에서 오늘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공허한 하루가 지나쳐가는구나 하는 일기가 그만 쓰여질 날을 꿈꾼다. 빗물 자국과 여러 얼룩이 뒤섞인 신발의 먼지를 일일이 털어 내는 일보다 어깨를 누르는 일상의 무게를 덜어내는 게 우선일 만큼 고단한 현실의 청춘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여행을 통해 그것을 덜어내는 데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세상이 수놓은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고 써내려가며 위로를 얻는다.

 

 

 

한참을 사막의 능선에 앉아 모래를 휘날리다 바지 한 번 훌훌 털고 일어나며 그래도 지금이 썩 나쁘진 않다고 위로한 이유는 나는 사막처럼 외로울 자신이 없다는 안일한 이유였다. 수많은 이들이 그곳에 내려 두고 갔을 셀 수 없는 근심들을 덮어 줄 만큼 나는 넓지 않아서, 이 좁은 마음에 안타까움을 담고 너를 담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조금은 더디게 지워지는 기억들에 아파하면서, 저기 아지랑이는 저 땅은 슬픔을 지우는 것만큼 행복도 함께 지울 거라는 질투 어린 위로를 하며, 놀이터 그네에 앉아 발밑에 모래를 모아 괜스레 이리저리 흩트려 본다. 이 모래는 그리 쉽게 자국들을 지우지 않을 거라 믿으면서. / 90p

 

 

 

 

 

 

 

   그녀의 글은 화려함에 가려져 그 빛을 숨길지언정 끝내 잃지 않고, 아련할지라도 연약하지 않은 '대낮의 낮달' 같은 은은함을 품고 있다. 덕분에 '나'와 '내 사람들' 또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의 향수와 감정 그 내밀한 속살 속에서 여행을 추억하는 <기억이 머무는 밤>은 좀 특별하다. 발칸의 작은 나라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사람들의 여유 있는 미소와 따스한 눈인사, 바라나시에서 만난 한 꼬마의 순수한 마음을 섣불리 돈으로 보답하려 했다 부끄러워진 기억 같은 것들. 특히 할머니와의 나고야 여행은 이 책의 그 어느 장면보다도 인상적이다.

 

 

 

   어릴 적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한국으로 건너온 할머니는 그 뒤로 아들 둘에 딸 넷을 낳아 평생 자식들을 키우는 데 힘을 쓴 것도 모자라 엄마와 아빠의 부재를 느끼지 못하도록 손녀에게까지 지극정성을 다하셨다. '늘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자신이 우선이었던 이기적인 나는 빳빳하던 여권에 하나둘 스탬프가 늘어 가는 동안에도 그녀가 그리는 고향, 일본에 함께 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던 저자는 마침내 70년 만에 할머니가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도록 나고야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할머니는 자신이 살던 곳이 '상고'인지 '산고'인지 기억조차 흐릿했지만, 막상 고향에 도착하자 70년 만인 것이 무색할 만큼 너무나 익숙한 걸음으로 앞장 서 걸으며 지난날을 떠올린다. 이제는 편히 눈 감을 수 있겠다며 손녀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할머니의 음성과 그녀의 시간 안에 함께 했다는 것에 감사해하는 저자의 글이 코끝을 찡하게 한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70년 전 할머니의 기억과 70년 후 현재의 구글 맵에 의존해 여행을 시작했다. 마치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랄까. 할머니의 고향은 나고야 안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주택단지에 불과해 정보랄 것이 하나도 없어 가는 내내 긴장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런 마음을 알아챈 건지 혹은 나랑은 다른 뜻으로 그녀 역시 마음을 졸이고 있던 건지 그녀는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순간 마음이 아려 왔다. 이유는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그리고 할머니도 모두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 34p

 

 

그래서인지 처음엔 세상을 보겠다고, 그 후엔 여유를 찾는다고 떠났던 여행이 이제는 왜인지 그냥, 하고 머뭇거리다 결국엔 '사람이 좋아서였나' 하고 되뇌게 된다. 지나온 날을 돌이켜 보면 숨 막히던 풍경도 놀랍도록 거대한 건물도 화려한 불빛도 모든 게 익숙해 더 이상 설레지 않을 때 다시금 떠나게 해 준 것도 사람이었고, 우습게도 나를 긴장케 하고 두려움을 안겨 준 것 또한 사람이었으나, 그러한 나를 흐르는 시간 속에 편안히 녹여낸 것 역시 끝내 사람이었기에, 이제는 어디선가 만날 그들에 대한 기대로 하여금 계속해서 떠나는 것 같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 131p

 

 

 

 

 

 

 

   여행에세이를 읽다보면 누군가는 사표 한 장 던져놓고 무작정 배낭 하나 짊어진 채 여행길에 올랐다고 하고, 역마살이 끼었다는 한탄을 늘어놓으며 월급을 모으는 족족 여행을 떠났다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글에는 갑갑한 현실을 뒤로 하고 당신도 떠나보시라, 하고 권하는 무언의 부추김이 존재한다. 하지만 강요와 권유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대리만족 삼아 읽어보고자 했던 것이 때로는 발목을 붙드는 현실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용기를 내어보지 못하는 내 자신의 유약함만 더욱 마음에 남는 경우가 있다.

 

 

 

   고맙게도 <기억이 머무는 밤>은 그런 부분을 경계하려는 저자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질 만큼 가만가만 자신의 생각들을 덤덤하게 풀어놓는 데 그친다. 그녀는 그저 이 넓은 세상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순간순간 포착하고 그것을 글자로 기록하고 싶을 뿐이었던 것 같다. 이것이 여행에세이라 말하지만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에 대한 세상의 수많은 단편들을 담은 이 책이 조금은 특별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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