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마음껏 아프다 가 - 울음이 그치고 상처가 아무는 곳, 보건실 이야기
김하준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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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상처 난 마음까지 돌보는 어느 보건교사의 특별한 보건일지!

보건실그 작은 방 안에서 일어나는 따뜻한 희망 이야기!

 

 

 

  나는 적응에 느린 아이였다새 학년새 학기가 되면 유독 남몰래 눈물을 자주 흘렸다새로운 친구들새로운 선생님늘어난 과목과 어려워진 숙제들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더욱 의기소침해졌다바뀐 환경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그나마 숨통을 틔울 수 있었던 곳은 보건실(당시에는 양호실)이었다담임선생님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보건실에 가고 싶다는 나를 처음에는 걱정했지만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었을 때는 탐탁지 않아하는 표정을 지었다내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그런 내가 그나마 위안을 얻고 다시 적응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보건실 선생님 덕분이었다. “괜찮아질 거야너한테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뿐이야.”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보건 선생님으로부터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약으로 치료를 받은 셈이었다보건실 선생님의 얼굴을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그 말만큼은 여전히 내게 남아있는 걸 보면 말이다.

 

 

 

친구들과 함께 놀고 싶은데 끼워주지 않아서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을 데가 없어서

학교에서 울고 싶은데 울 데가 없어서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아이들은 갈 데가 없어서 보건실에 가기도 한다. / 18p

 

 

 

상처가 아물 때쯤 한 뼘 더 자라 있겠지

 

 

  2학기 내내 체한 것 같다며 자주 소화제를 먹던 아이가 어느 날, 1교시도 시작되기 전에 보건실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와 꺼이꺼이 울었다고 한다무슨 일이냐고 묻는 선생님의 말에 아이가 꺼낸 첫 마디는 가히 충격적이다옥상에 올라가 떨어져 죽으려고 했는데 옥상 문이 잠겨 있어서 갈 데가 없어 보건실에 왔다는 것이다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20년간 보건교사로 일하고 있는 김하준의 에세이 여기서 마음껏 아프다 가에는 보건실을 찾는 아이들의 뜻밖의 사연들이 실려 있다저자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아이를 꼭 안아주며 여기 오길 정말 잘 했다고진짜 잘했다고 다독였다고 한다.

 

  우리는 보건실’ 하면 연고나 밴드를 발라주는 가벼운 외상 정도의 치료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 생각한다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내상을 발견해내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머릿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며 찾아오는 아이구내염을 자주 앓아서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해도 갈 수 없는 아이특별히 아픈 곳이 없어 보이는데도 자주 아프다고 찾아오는 아이까지이 아이들을 위해 보건실은어떤 위험한 징조를 감지하기 위한 센서이자 가정과 교실에서 소외된 아이를 마지막으로 걸러낼 수 있는 체의 역할이 될 수 있는 곳이다마음의 불편함을 몸을 빌려 아프다고 말하는 아이들그런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아픔까지 살펴봄으로써 저자는 다짐한다아이들을 볼 땐 그림자도 함께 보기를그림자가 얼마나 큰지 알아보기를그림자가 너무 커 그림자가 없는 줄 착각하지 않기를.

 

 

 

흙 묻은 양말을 신은 채 저벅저벅 보건실로 들어오던 지헌이비와 땀에 흠뻑 젖어 저는 비 맞으면서 축구하는 것도비 맞고 다니는 것도 왠지 재밌어요답답한 게 다 사라지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던 지헌이엄마는 누구에게나 당연히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한 지헌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당당한 날림체처럼 자신만의 빛깔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바란다. / 49p

 

 

사춘기 아이들에겐 그런 작은 것들누군가의 놀림이 상처나 고민거리가 되곤 한다나도 그랬으니까 지아의 마음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아이들은 자라면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고 이렇게 손금으로도 상처를 받는다.

세상에 미운 손은 없다나쁜 것을 도모하는 손남에게 해를 가하는 손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손은 아름답다왜냐하면 아름답다의 어원은 인데 사람이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손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니 손은 예쁘다가 아닌 아름답다가 어울린다서로 다른 일을 하는 하나밖에 없는 귀한 손이다하물며 꼼지락꼼지락 무얼 배우는 아이들의 손은 두말해 무엇 할까.

나는 오늘도 아름다운 손으로 아이들의 귀한 손을 치료한다. / 94p

 

 

당뇨를 가진 아이들의 고달픈 마음을 헤아릴 순 없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과 희망의 순간을 경험하리라는 짐작을 해본다그 아이들의 마음에도 굳은살이 배기려면 손가락이 얼마나 더 많이 찔리고 또 아물기를 반복해야 할까당뇨병 진단을 받은 아이를 보면 그저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 100p

 

 

 



 

 

 

 

  학교를 지키는 단 한 명의 의료인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들도 담겨 있다5분 간격으로 홍수처럼 들이닥치는 아이들과 많은 업무지속적인 긴장감 속에서 어떤 보건교사가 아이를 매번 사랑으로 치료해줄 수 있을지갈수록 많은 법들과 규정 속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일을 하게 만드는 제도 속에서어떤 보건교사가 언제까지나 아이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고 눈빛을 살필 수 있을지 안타까움을 토로한다무엇보다 그다지 전문적이지 않은 최소한의 의료 기구로혼자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 막연한 불안과 긴장을 늘 안고 있다 보니 심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보건교사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성교육 방식의 문제점 또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인 듯하다이렇게 20년간 보건교사로 근무하면서 교육 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보건실과 보건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된다.

 

 

 

성교육의 최종 목적은 젠더 감수성 함양이다젠더 감수성은 인간관계의 모든 것에 관여되어 있다젠더 교육은 남녀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닌 다양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에 있다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 잘못이 아니라는 것서로를 혐오하지 않게 하는 것혐오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남녀 성을 구분하기 전에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바라보는 것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결국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을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2010년이 아닌 2020년대를 살고 있고, 2030년대에 어른이 될 아이들을 가르치는 어른이다머무르고 고여 있는 학교가 아닌 끊임없이 앞을 내다보고 시야를 확장시키도록 도와주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 234p

 

 

보건실에 가는 아이가 없는 교실이 행복한 교실이다.

보건실에 가는 아이가 적은 학교가 행복한 학교다. / 106p

 

 

대부분의 과일은 상처가 나면 썩지만모과는 상처가 나도 잘 썩지 않는다는 걸 상처 난 모과를 오래 지켜보며 알게 되었다오히려 상처 난 자리에서 더 진한 향기가 배어 나왔다모과는 완전히 단단해질 때까지 향기를 뿜어냈다갈색의 빛깔은 언젠가 박물관 전시에서 본 미라의 색깔을 연상케 했다향기가 다하자가벼워졌다.

(마음이든 몸이든 상처를 가지고 보건실에 오는 아이들 중에도 향기가 없는 아이는 없었다울퉁불퉁 모과 같은 아이들도 자세히 바라보면 그 안에 사랑스럽고 생기 넘치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따뜻한 성질을 가진 모과처럼 아이들은 그 자체만으로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 115p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아픔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상처까지 함께 보려는 보건교사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복도 가장 끝 혹은 건물 밖 외진 곳에 존재했던 보건실의 위치가 이들의 노고를 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책을 덮으며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에게 물어 보았다. “너 보건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가봤어?” 혹시나 다치거나 아프면 보건실을 찾아가야 한다고 알려주려 했는데 아이가 당연한 듯 대답했다. “그럼내가 얼마나 자주 가는데저번에 책에 찍혀서 발가락 다쳤을 때 갔지책에 베여서 피 났을 때 밴드 붙이러 여러 번 갔는데?” 아주 사소한 상처에도 밴드를 붙이곤 하는 아들의 평소 행동을 돌이켜보니 걱정은 기우였던 듯하다덕분에 한 번 크게 웃은 뒤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혹시나 담임선생님께 하지 못할 말이 있거나마음이 아파도 보건실 선생님을 찾아갈 수 있어선생님이 네 마음도 치료해주실 거야.” 하고.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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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8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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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바라보고시대의 가치와 인습도덕 등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당대 여성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

제한된 삶으로부터 자유의지에의 욕망과 자아성장을 실현하고자 하는 한 젊은 여성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작품!

 

 

 

  “모든 게 지긋지긋해!”

  6월의 오후산들바람 한 줄기가 언덕 등성이에 걸린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불어와 들판을 가로질러 풀이 우거진 노스도머 거리 아래쪽으로 그림자를 몰고 가는 시각텅 빈 거리를 홀로 걷고 있던 채리티는 나직이 중얼거린다마을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는 열여덟 살의 채리티는 처음 한두 달 동안은 먼지 덮인 책들을 열심히 뒤적이며 전에 느껴보지 못한 정보에 대한 갈증을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지금은 하루 빨리 돈을 모아서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무엇이 되려고 애써봐야 모두 헛수고인 이 작은 마을에서 대체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에서 태어난 그녀가 변호사인 로열 씨의 후원으로 이 마을에 내려와 살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할 수 있었지만아내가 죽은 뒤 로열 씨가 채리티에게 청혼을 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감이 생긴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그러던 어느 날도시에서 유행하는 옷차림에 젊고 자유분방해 보이는 한 남자가 그녀의 시선을 끌기 시작한다도서관장의 조카이자 대도시 출신의 건축가인 하니는 어느 누구보다 지적이고 솔직하며 예의가 바른 남자였고그로 인해 채리티는 처음으로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느낀다.

 

 

 

사랑과 욕망현실과 한계 사이에서 갈망하는 여성의 성장을 그린 드라마

 

 

  식민지 시대의 특징이 남아 있는 가옥을 연구하기 위해 노스도머로 온 하니와 그를 안내하던 채리티는 종종 초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피해 숲으로 들어간다여름 곤충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고흰나비가 무리 지어 자줏빛 분홍바늘꽃의 끝을 부채질하듯 움직이는 푸른 자연 속에서 채리티는 자신과 하니 두 사람만이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인 것처럼 그에게 이끌린다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더러운 오점과도 같은 ’ 출신의 그녀를 과연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두렵지만너무 드러내 놓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태도를 보이면 후견인인 로열 씨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도 모르지만 하니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외면하지 못한다.

 

 

 

사랑이 핏속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데

어디에서 태어났건누구의 자식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74p

 

 

 

  머지않아 채리티와 하니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밀회를 즐기게 되고함께 있으면 여름밤 폭풍우도 두렵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깊어지지만이따금 교육과 기회에서 비롯된 격차는 아무리 노력해도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게 하여 채리티를 심연 속으로 밀어 넣는다집을 몰래 빠져나와 하니와 도시에서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던 그녀를 로열 씨가 발견하고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굴욕을 주는 장면은 여성의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바라보고시대의 가치와 인습도덕 등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당대 여성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하지만 채리티는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와도 같았던 사랑이 비록 슬픔과 절망만을 남겼을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일 것을 선택한다하니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자신을 버리고 떠난 하니를 붙잡지 않는다여성이 스스로를 가엾은 희생자로 바라보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당대 여성들에게 새로운 여성상의 유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크레스턴 연못에서 만난 뒤로 줄곧 하니는 이렇게 생각에 잠긴 채 말이 없었다말이 필요 없어 침묵을 지킬 때와는 사뭇 달랐다그럴 때 그의 얼굴에는 어둠 속에서 보았던 표정이 감돌았고또다시 그녀로 하여금 두 사람 사이에 설명하기 힘든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그러나 평소에 하니는 넋 빠진 듯 멍한 표정이다가도 갑자기 폭발하듯 쾌활한 표정을 지었고그러면 그녀의 마음이 오싹해지기 전에 어두운 그늘이 달아났다. / 133p

 

 

이 갈보 년…… 빌어먹을…… 모자도 쓰지 않은 이 갈보 년!” 로열 씨가 천천히 내뱉었다.

술에 취한 일행이 깔깔대며 웃었다채리티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에 두 손을 갖다 댔다관중석을 떠나려고 벌떡 일어설 때 모자가 무릎에서 떨어진 것이 떠올랐다문득 모자도 쓰지 않고 엉클어진 머리로 남자의 팔에 안긴 채 가련한 후견인이 이끄는 술 취한 일행과 맞부딪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가슴 속에 수치심이 가득 차올랐다. / 141p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숙명적인 체념이 점점 더 채리티를 짓눌렀다상황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무 쓸모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채리티는 지금껏 적응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다만 부러지고 찢기고 파괴될 따름이었다그녀는 앨리와 한바탕 싸우면서 어린아이처럼 야만적으로 행동했다는 수치심에 휩싸였다만약 하니가 보았더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그러나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 사건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리 교양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다르게 행동할 것 같지 않았다채리티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부당하게 맞서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 203p

 

 

 



 

 

 

 

  이처럼 이디스 워튼의 소설 여름은 주인공인 여성이 사랑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현실을 대면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초여름에서 가을이 되기까지의 계절적 배경과 매사추세츠주 서부 산악 지역의 언덕을 배경으로 하는 대자연의 공간적 배경이 한 데로 어우러져제한된 삶으로부터 자유의지에의 욕망과 자아성장을 실현하고자 하는 한 젊은 여성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덕분에 여름이라는 제목과 표지 속 여성의 모습이 소설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연인의 포옹이라는 부서지기 쉬운 은막 뒤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의 삶이 수수께끼처럼 숨어 있었다는 표현처럼 사랑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 없어 이따금 외로워지고 마는 등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다만 결말이 나의 입장에서는 다소 충격적이어서 채리티가 과연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물론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말이다그래서인지 소설 이후의 삶이 어떻게 펼쳐졌을지 사뭇 궁금해진다그녀는 자신의 선택 안에서 행복했을까채리티의 아이는 또 어떤 삶을 살게 될까하고.

 

 

 

글쎄어머니를 그렇게까지 탓할 수 있을까그날 이후로 채리티는 어머니를 인간적인 감정이 조금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그저 불쌍하게 보였다어떤 어머니가 그런 삶으로부터 아이를 구하고 싶지 않겠는가채리티는 배속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자 쓰라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238p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이 비참한 무리 중 하나가 된다는 생각에 오싹함을 느꼈다그런 운명으로부터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길이라도 걷고삶이 부여할지 모르는 어떤 짐이라도 기꺼이 걸머질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238p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선 프롬과 순수의 시대가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특히 이선 프롬은 여름과 자매편과 같은 작품이라고 하니 이 책도 찾아 읽어봐야겠다이디스 워튼의 작품을 미처 접해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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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기다리는 사람 - 택배기사님, 큰딸
택배기사님.큰딸 지음 / 어떤책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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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좀 더 많이 써지고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택배 업무를 하면서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와 고단한 업무를 위로해주었던 따뜻한 순간들!

 

 

 

  어느 날아빠는 느닷없이 택배 일을 시작할 거라고 말씀하셨다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소일거리 삼아 농사를 지은 지 두어 해가 지난 뒤였다택배 기사라는 직업에 거부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상당한 업무량에도 대우를 충분히 받지 못한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걱정이 앞섰다하지만 갈수록 팍팍해져가는 살림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니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다행히도 아빠는 새로운 일에 빠르게 적응해갔다엄마도 오랜만에 아빠의 도시락을 손수 챙기는 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른 시간에 출근하고 해가 진 지 한참이 지나서야 퇴근을 할 수 있는 일이다보니 아빠의 체중이 줄어드는 게 눈에 띌 정도로 고단해보였다게다가 잠들기 직전에까지 걸려오는 고객의 전화를 받아야 할 때도 있었고택배물을 분실했다는 고객과 얼굴을 붉혀야 하는 일도 왕왕 발생하곤 했다그로부터 1년 뒤아빠는 좀 더 안정되고 몸이 덜 힘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그만두기는 했지만 이때의 기억은 나를 택배 기사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더운 날추운 날궂은 날 가리지 않고 반드시 당일 배송의 원칙에 따라 고군분투하는 기사님들을 보면 차마 빨리 가져달라 재촉할 수 없었고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의 제일 꼭대기까지 무거운 짐을 배송하게 하는 것도 죄송스러웠다특히 팬데믹 이후집 안에서 두 아이와 꼼짝없이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와중에도 큰 혼란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유연한 배송 시스템과 택배 기사님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책을 보는 순간제목을 참 잘 지었다 생각했다집 앞에 트럭이 정차하는 소리만 들려도 두 귀를 쫑긋하게 되고저 기사님의 손에 들린 물건이 내가 기다리던 물건이 아닐까 마음이 설레는 것도 잠시기다렸던 택배물이 탁-하고 문 앞에 놓이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찌르르 온몸을 관통하는 이 행복감을 뭐라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오늘 나에게 택배를 전달한 바로 그 기사님이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나에게로 오는 것은 단순히 물건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비대면 방침으로 직접 수령이 쉽지 않은 요즘이지만혹여 이웃집 방문으로도 마주칠 수 있다면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도의 인사쯤에 인색해지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해본다.

 

 

 

문 앞에 두고 온 마음을 담아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은 25년 차 택배기사님이 택배업을 하면서 쓰신 글을 자신의 큰딸이 정리하여 완성한 에세이다책 속에는 택배 업무를 하면서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와 고단한 업무를 위로해주었던 따뜻한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다이 중 택배 기사님들을 폄하하거나 말도 안 되는 컴플레인으로 그들의 업무를 방해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눈살이 찌푸려진다사전에 충분히 문자메시지로 안내가 되었음에도 집에 사람이 있었는데 문 앞 배송했다고 항의를 하는 고객이 있었고택배가 사라졌다고 온갖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뱉어놓고는 사건조사와 분실처리를 돕기 위해 경찰관과 함께 방문하겠다고 하니 갑자기 집에서 물건이 나왔다고 하는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산중턱에 있는 배드민턴장으로 주 소재가 금속인 라켓 열 박스를 배송하느라 무려 열 번의 산행을 해야 했던 일화가 있는가하면배송을 위해 잠시 정차했다가 온갖 욕을 들어야 했던 사연도 있었다한 교회의 교인으로부터 자기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고잘생기고자식들이 하나같이 공부를 잘하는데 기사님은 우리 교회 교인 하고 싶어도 못하겠다는 말까지 들어야했던 걸 보면우리 사회가 여전히 택배 기사님들의 업무를 폄하하고 소위 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부끄러워진다.

 

 

 

학교는 선생님과 학생들의 편의를 위한 공간인데그 공간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면 나와 같은 입장이 아니었나물건을 맡아 두는 것마저 그렇게 귀찮고 힘들다면서 고객센터에 전화해 사람을 색종이처럼 자르라고 말하는 것은 안 귀찮고 쉬운 일이었는지. / 24p

 

 

다음 날 물건을 베란다에서 찾았다는 고객님의 전화가 왔다손과 발을 다 사용해야 할 정도로 커다랗고 무거운 물건이 스스로 베란다에 걸어 들어간 것일까손발이 안 맞는 듯한 이야기가 손발이 가루가 되도록 배송을 해낸 기사님의 노고보다 앞설 땐 속이 상한다. / 113p

 

 

최근에는 법도 제정되고 하여 서비스업 종사자의 보호를 위한 안내 문구가 게시되고 있다이런 하나마나 한 것을 왜 입법할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지만얼마나 심각하면 법으로까지 만들어져야만 했을까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우리 집 귀한 자식이다고객을 위한 을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 117p

 

 

 



 

 

 

 

  그러는 와중에도 역시 다정한 사람들이 있어 오늘도 힘을 얻는다택배물에 시야가 가려 아파트 출입문에 부딪쳤고 그 자리에 생각보다 많은 양의 피가 났는데집에 올라가 탈지면과 소독약간단한 연고 같은 것을 가져와 손수 치료를 해준 이가 있었다일하느라 수고가 많다며 아파트에 사는 어르신들이 먹을 것을 나눠먹는 자리에 선뜻 자리를 내어주셨는가 하면다른 동에 배달 다니는 모습을 보니 유독 바쁜 듯하다며 직접 물건을 찾으러 오시는 고객도 있었다고택배 업무를 처리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의미로 직접 따뜻한 밥을 지어 한상 내어주신 분도 있는 걸 보면세상이 이토록 따뜻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 감사하게 된다.

 

 

 

특정 국적이라서어떤 성별이라서 혜택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당신보다 커다란 트레일러를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하며적어도 2개 국어를 할 수 있다그래서 본인의 일상을 꾸려 나간다.

다른 이가 가진 것과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비교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너무 큰 관심을 갖지 말고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집중하는 것으로 두려움을 극복해 보길그러지 못한다면 그저 지질한 것이고 구린 것이다. / 67p

 

 

주차할 곳이 없어서 잠시 정차하겠습니다.

인근 지역을 배달하고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절대 오래 걸리지 않아요.

밥줄 달린 일인데 느리게 할 수 있나요.

빨리 돌아와서 차 빼 드릴게요. / 90p

 

 

그토록 바쁜 사람들이 나에게 그 필요를 맡기고 믿고 기다린다어떤 경우에는 스페어 키를 숨겨둔 장소를 알려 주기도 하고 현관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그만큼 믿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비록 그들이 무슨 물건을 샀는지 잊었더라도 내가 적시에 나타나야만 하는 이유다. / 159p

 

 

 



 

 

 

 

  책을 갈무리 하며 오랫동안 택배업에 종사한 아버지를 곁에서 바라본 큰딸의 글이 인상에 남는다아버지의 휴대폰을 가득 채운 비슷비슷한 현관 앞 택배 상자 사진들손가락을 아래로 아래로 스크롤링을 하고특정 날짜로만 필터링을 해도 그 수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도 한참을 넘어섰다고딸로서는 도저히 구분을 할 수 없는 사진을 아버지는 어느 집 현관 앞 상자인지 망설임 없이 찾아내더란다. ‘서글퍼졌다아빠의 휴대전화에는 본인의 얼굴도당신보다 사랑하는 가족들도 담겨 있지 않았다알지도 못하는 이가 부재중인 문……그 사진들로 꽉 차 있었다전달하지 못할 아빠의 마음만 알아 버린 기분이었다.’는 글귀에서 우리 아버지들의 삶과 노동에 대한 노고가 생각나서 그만 울컥해버렸다.

 

 

 

  비록 마음대로 휴가를 쓸 수 없고주말에 일하는 날도 있지만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으로 행복하고 살고 있습니다다리에 힘이 풀릴 때까지이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라던 책 속의 글귀처럼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택배 기사님의 이야기가 이 책을 통해 세상에 많이 알려질 수 있기를 바란다그리하여 오늘도 소중한 물건을 가지고 오실 택배 기사님을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기를그들에게 수고하셨다는 다정한 말 한 마디 더 건네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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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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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존재가 가족을 해체시키는 끔찍한 존재로 돌변하는 순간에의 공포!

여성에게 부여된 임신에의 공포와 의무감 혹은 모성애와 책임감이 어떠한 방식으로 왜곡될 수 있는가를 철저하게 보여준 소설!

 

 

 

  1960년대 런던한 남녀가 직장 파티에서 만나게 된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끌린다그들은 당시로서도 꽤나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이른바 문란한 혼전 성관계나 이혼 또는 혼외정사산아 제한 같은 것들을 거부하는 전통적 의미의 가정을 이루기를 원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그들에게 있어 가정은 행복을 결정짓는 인생의 중대한 목표였으며그 속에서 아이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그래서 가급적이면 자식을 많이 낳기로 결정한다가족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6명 이상의 자녀 계획에 걸맞은 큰 저택을 구입한다그리고 자신들의 왕국에서 6년간 4명의 아이들을 낳는다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부부는 매년 크리스마스나 휴가 기간마다 흩어져 있던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들고아이들의 음성으로 가득한 집안 풍경이 주는 만족감에 젖어 자신들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행복행복한 가정로바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누릴 자격이 있었다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얼굴을 맞대고 누워 있으면 때로는 그들의 가슴속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직도 자신들을 놀라게 할 만큼 엄청나게 강렬한 안도감과 감사의 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지금은 아주 오랜 기간처럼 보이는 그 시간 동안 인내하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탐욕스럽고 이기적인 60년대의 시대 정신이 그들을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을 축소시키던 때에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웠었다이제 보아라자신들의 완고한 개성을 방어하려고 사력을 다한 것이 옳았다그 개성은 너무나도 고집스럽게 가장 최상을 선택했다-바로 이 삶. / 30p

 

 

 

허황된 꿈이 낳은 비극

 

 

  비극은 다섯째 아이가 뱃속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아니부부가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 고단한 현실은 이미 이전부터 야금야금 그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건강하고 매력적인 젊은 여인이 네 명의 아이를 낳으면서 잃게 되는 상실감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오는 아이들로 인해 헤어 나올 길이 없는 피로감자신의 벌이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지출을 나이든 아버지로부터 충당해야 했던 무모함거의 모든 육아를 어머니에게 전담해야 했던 미숙함까지그 모든 것들은 이미 충분히 그들에게 위협적이었음에도 이들은 결국 다섯째 아이까지 갖게 된다.

 

 

 

  그런데 이 아이가 심상치 않다믿을 수 없게도 임신 3개월째가 될 즈음해리엇의 뱃속의 아이에게서 상당히 강한 태동을 느낀다그녀는 수시로 고통을 느끼다 못해 어떤 발굽이어떤 때는 갈고리 발톱이 그녀의 연약한 내장을 자르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이따금 고통을 잊기 위해 시골길을 활보하거나 질주를 하고커다란 부엌칼로 자기 배를 갈라서 아이를 꺼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진정제를 먹어야만 잠잠해지는 아이 때문에 약을 먹을 지경이 될 때까지임신 기간 내내 해리엇의 시간은 고통과 인내환영과 망상들로 채워진다끔찍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듯 그렇게 태어난 다섯째 아이벤은 부부가 보기에 이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벤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난폭한 구석이 있는 데다 아이의 눈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갑다천성적으로 활기차고 친근하던 넷째 폴이 유독 불안해하며 화를 내기 시작하고테리어 개가 죽거나 늙은 회색 고양이가 목 졸려 죽는 일이 발생한다시간이 흐를수록 가족 모임은 해체되고벤은 부부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가족을 파괴시킨다.

 

 

 

난 너희들의 하인이야이 집에서 하인 일은 내가 다 하고 있지」 또는 너희는 둘 다 정말 이기적이로구나너희들은 무책임한 사람들이야」 이런 말들이 감돌았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그러나 만약 그녀가 시작만 한다면 이 정도로 그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았다. / 46p

 

 

반쯤 어두운 방 안에서 그 애는 정말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도깨비나 작은 귀신 같았다낮 동안 그 애를 가둬놓으면 그 애는 비명을 지르고 소리쳐서 온 집안이 시끄러웠고 식구들은 경찰이 올까봐 두려워했다그 애는 갑자기 이유도 없이 정원으로 달려 내려가 문 밖의 길로 뛰어나가곤 했다어느 날 그녀는 그 애를 잡으려고빵빵대는 차들이나 경고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무시하고 신호등을 건너는 뭉퉁하게 웅크린 작은 모습만 보면서 1마일 이상 뛰었다그녀는 울면서 숨을 헐떡였고 반쯤 정신이 나가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애를 잡으려고 결사적이었다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오그애를 치어요제발그래요……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 85p

 

 

 



 


 

 

 

  이처럼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이상적인 가정즉 전통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는 작품이다비정상적인 아이 하나가 태어남으로써 일어나는 가족의 붕괴를 매우 사실적이면서 충격적으로 묘사한다벤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공포스럽지만자기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가정의 내밀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의사의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을 보았다그 여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 투영된어둡고 고정된 시선이었다그것은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이질성에 대한 공포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여성에게 부여된 임신에의 공포와 의무감 혹은 모성애와 책임감이 어떠한 방식으로 왜곡될 수 있는가를 철저하게 보여준다또한 벤과 같이 사회적으로 제거된 아이들을 가둔 요양소의 충격적인 장면을 통해우리 사회가 비정상을 소거하는 일에 얼마나 몰두해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집안은 옛날 같지 않았다모든 사람들에게는 긴장감과 경계심이 깃들였다해리엇은 벤이 자아내는 무시무시하고 불안한 호기심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가 없을 때 그 애를 보려고 가끔씩 위층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았다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로 그녀는 그들이 벤을 보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마치 내가 죄인인 것처럼그녀는 분노했다그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마음을 끓이며 보냈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데이비드도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그에게 말했다이게 바로 옛날 원시시대에 변종을 낳은 여자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여주는 거야마치 그 여자만이 잘못한 것처럼하지만 우린 문명시대에 살잖아!/ 82p

 

 

왜 그녀는 그런 말을 하는가벤이 태어난 이후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벤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그녀가 텔레비전의 군중 속에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칼라를 세운 윗도리를 입고 스카프를 하고 있었고마치 데릭의 동생처럼 보였다그는 건장한 학생 같아 보였다그는 변장하려고 이런 옷을 입었던 것일까그 말은 그가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안다는 말인가그는 자신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사람들은 항상 그를 제대로 보는 일을그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할 것인가? / 177p

 

 

 

  이 외에도 소설은 새로운 가정을 준비하는 커플이나 임신한 여성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부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사랑과 행복으로만 가득할 것 같던 결혼 생활이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 어떤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지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이를 테면 부부가 육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자신의 신념이 다른 가족의 희생으로 이루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도 있다벤에게 관심을 쏟느라 온전히 엄마의 시선을 받지 못한 폴에게 일어난 부정적인 변화를 통해부모의 정신적·육체적 환경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무엇보다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책임감을 따르게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서 피할 수 없다내가 벤의 부모라면나라면 벤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게 바로 피임법이 발견되기 전에 여인들이 느끼던 감정일거야」 해리엇이 말했다공포 그 자체매번 그들은 월경을 기다리다가 그것이 오면 한달간 처형 연기를 받는 거야하지만 그 여자들은 괴물을 낳을까봐 겁내지는 않았겠지」 / 88p

 

 

그래요로바트 부인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시겠어요우선 저는 이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그리고 또한 이런 일이 희귀한 일도 아니라는 사실도요우리가 복권 추첨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선택할 수 없듯이 아기를 갖는 일도 마찬가지랍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에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당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 139p

 

 

 

  소설을 갈무리하며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이 가족을 파괴한 건이 정말 벤이었을까 하는 것이었다부부의 허황된 이상이그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끝끝내 외면한 것이 진정한 비극은 아니었을까짤막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주제를 내포하고 있어 도리스 레싱이라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읽은 작품이었다. 2000년에 발표한 후속작 세상 속의 벤도 읽어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언젠가 이 책도 내어주십사 출판사 측에 부탁을 드리며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얼른 주행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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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 한 시절 곁에 있어준 나의 사람들에게
김달님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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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들을 떠올리는 밤일수록 나는 나에게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지게 하는 책!

 

 

 

  수능시험을 마친 뒤 1월의 어느 날나는 난생 처음 친구와 단둘이 춘천으로 여행을 갔다사실 학교 외에는 따로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만수능시험이라는 거사를 치르고 난 뒤에 급격히 찾아온 허무한 마음을 여행으로 달래는 데 의견이 맞았던 것 같다그것도 보호자 없이무려 대구에서 강원도까지 여학생 둘이서 여행을 감행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친구 덕분이었다여행지 선택과 숙박맛집까지… 당시에는 지금처럼 SNS나 블로그가 활발하지 않은 때라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을 텐데 친구는 그 모든 계획을 착착 준비했고 마침내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당일춘천에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린 것이다기차역에서 픽업차를 기다리던 우리는 혹시 픽업 차량도 오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하지만 이 정도 눈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숙소에서 보낸 차량이 무사히 도착했고우리는 체크인 후 아늑한 공간에서 몸을 녹였다챙겨온 컵라면미리 싸온 김밥까지 야무지게 먹으며 바라본 그 날의 바깥 풍경은 내 생애 가장 잊지 못할 풍경 중에 하나가 되었다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모습은 다음날 우리의 일정 따위 어찌되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심지어 숙소에서 그저 창밖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오길 잘했지?” 하고 코를 찡긋거리는 친구의 미소까지뭔가 대단한 비밀을 공유한 듯 우리는 기쁨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이후우리는 졸업을 하고 각자의 대학교로 진학한 뒤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서로의 연락처로 연락해볼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그러고 보니 여행을 하면서도 앞으로 하자.” 같은 막연한 약속조차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어쩌면 이 여행을 끝으로 서로 각자의 갈 길을 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 와서도새하얀 눈을 떠올리는 날엔 어김없이 그 친구가 생각난다그때 우리가 함께 바라보았던 새하얀 풍경겨울 냄새까지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에서는 열 살의 여름난생 처음 친구의 의미를 알게 해준 친구 희진을 떠올리며 전하는 말이 있다. ‘네가 그 저녁 속에 남아 있는 한우리는 언제까지나 친구야.’ 괜찮다면 나도 이 말을 빌려 여기에 남기고 싶다. “네가 그 눈 속에 남아 있는 한우리는 언제까지나 친구야.”

 

 

 

나를 다정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는 이름마저 은은하게 빛나는 김달님 작가의 에세이다그녀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밝힌다. ‘내게 글쓰기는 이러한 일이다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내 쪽으로 돌아보게 하는 것오랜만에 마주하는 돌아본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맞아너 거기 그렇게 있었지반가워하는 것.’ 그리고 혹시라도 들려올지 모를 너의 대답을 지금 여기에서 기다려보는 것그렇게 너를 다시 사랑해보는 일이라고 말한다그래서인지 그녀의 글에는 어느 한 시절을 따스하게 채웠던 사람들이 있다덕분에 그들을 떠올릴수록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여길 봐라저길 봐라는 할머니의 오랜 말버릇이 본 것을 소중히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글을 쓰게 했음을 기억한다덕분에 어디서든 잘 보고기꺼이 감탄하는 당신을 매일 닮아가며그렇게 쓰며 살아갈 것이라 다짐해보기도 한다엄마와 아빠의 빈자리를 대신해 열 다섯 살의 고모 선희가 포대기로 업고서 자신을 병원에 데리고 다녔던 그 수고로운 마음도 헤아려본다또 수능 전날 갑작스레 기숙사 앞에 찾아와 두꺼운 외투 한 벌을 사준 아빠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한다냉동실에 파와 양파를 소분해두면 오래 먹을 수 있다던 동창생 K와 자취방에서 눈물을 쏟아내며 썰어댔던 추억을 떠올린다그러면서 아주 작지만누군가 알려준 생활이 내게 익숙하게 변해버린 순간들에 마음이 따듯해지며 나는 결코 나 혼자서 내가 될 수 없음을 깨닫기도 한다.

 

 

 



 

 

 

 

  소박하지만 다정하고 애틋하지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순간을 감각적인 언어로 길어 올리는 김달님 작가의 글을 읽고 있으면나와 다른 시공간에 존재했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공간에 머물렀던 비슷한 얼굴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우리 모두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 공유된 감각이 읽는 내내 나의 모난 마음을 가다듬고 보드랍게 한다.

 

 

 

시간이 지나 친구는 부스럭 소리가 나던 아버지의 호주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그리고 생각했다앞으로도 힘을 내서 살아가기 위해선혼자서도 남은 길을 마저 걸어가기 위해선 따뜻하고 단 기억들로 호주머니를 채워놓아야 한다고언제든 쓸쓸해지는 날에 손을 집어넣어 내게 남아 있는 것들을 만져보고 꺼내 볼 수 있도록그러면 어느 날에는 호주머니 속에서 들리는 부스럭 소리만으로도어떤 기억인지 떠올라 조용히 미소 짓는 날이 있지 않을까. / 20p

 

 

누나봄이 왔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랬더니 신이 난 네가 제자리에서 두 발에 힘을 주고 콩콩 뛰더니 말하더라.

저번 주엔 내가 땅을 밟으면 딱딱했는데 이제는 폭신폭신해.”

막내야나는 일곱 살의 네가 알려준 덕분에 봄은 폭신폭신하게 온다는 걸 알아. / 72p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장 자주 물어본 것은 ?’였다왜 마음에 남았니왜 기분이 좋았니왜 쓸쓸해졌니스스로 왜?라고 물어보는 일이 우리를 글로 데려가 줄 것이기 때문이다. / 120p

 

 

한동안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내가 사라지는 상상을 자주 했다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그런데 이상하지저 사람들이 기억하는 나는 왠지 거기 그대로 두고 싶다고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다른 시간들도 스르르 괜찮아졌다. / 135p

 

 

 



 

 

 

 

  최근 자격증 시험공부를 준비하면서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나와의 외로운 싸움에 몰두한다는 건 상당히 외롭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그런데 시험을 앞두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격려와 응원을 받았다시험 당일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에 데리고 가 준 덕분에 시험에 집중할 수 있었고 끝난 뒤어머님이 해주신 따끈한 밥에 그동안의 피로도 싹 잊을 수 있었다오직 나 홀로 견뎌 내야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나의 곁에서 함께 한 마음으로 지지해주고 배려해준 이들이 있었기에 내가 성장할 수 있었음을 느끼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를 칭찬하느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은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나의 모든 순간에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이 글을 빌어 고맙다고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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