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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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존재가 가족을 해체시키는 끔찍한 존재로 돌변하는 순간에의 공포!

여성에게 부여된 임신에의 공포와 의무감 혹은 모성애와 책임감이 어떠한 방식으로 왜곡될 수 있는가를 철저하게 보여준 소설!

 

 

 

  1960년대 런던한 남녀가 직장 파티에서 만나게 된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끌린다그들은 당시로서도 꽤나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이른바 문란한 혼전 성관계나 이혼 또는 혼외정사산아 제한 같은 것들을 거부하는 전통적 의미의 가정을 이루기를 원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그들에게 있어 가정은 행복을 결정짓는 인생의 중대한 목표였으며그 속에서 아이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그래서 가급적이면 자식을 많이 낳기로 결정한다가족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6명 이상의 자녀 계획에 걸맞은 큰 저택을 구입한다그리고 자신들의 왕국에서 6년간 4명의 아이들을 낳는다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부부는 매년 크리스마스나 휴가 기간마다 흩어져 있던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들고아이들의 음성으로 가득한 집안 풍경이 주는 만족감에 젖어 자신들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행복행복한 가정로바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누릴 자격이 있었다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얼굴을 맞대고 누워 있으면 때로는 그들의 가슴속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직도 자신들을 놀라게 할 만큼 엄청나게 강렬한 안도감과 감사의 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지금은 아주 오랜 기간처럼 보이는 그 시간 동안 인내하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탐욕스럽고 이기적인 60년대의 시대 정신이 그들을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을 축소시키던 때에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웠었다이제 보아라자신들의 완고한 개성을 방어하려고 사력을 다한 것이 옳았다그 개성은 너무나도 고집스럽게 가장 최상을 선택했다-바로 이 삶. / 30p

 

 

 

허황된 꿈이 낳은 비극

 

 

  비극은 다섯째 아이가 뱃속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아니부부가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 고단한 현실은 이미 이전부터 야금야금 그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건강하고 매력적인 젊은 여인이 네 명의 아이를 낳으면서 잃게 되는 상실감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오는 아이들로 인해 헤어 나올 길이 없는 피로감자신의 벌이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지출을 나이든 아버지로부터 충당해야 했던 무모함거의 모든 육아를 어머니에게 전담해야 했던 미숙함까지그 모든 것들은 이미 충분히 그들에게 위협적이었음에도 이들은 결국 다섯째 아이까지 갖게 된다.

 

 

 

  그런데 이 아이가 심상치 않다믿을 수 없게도 임신 3개월째가 될 즈음해리엇의 뱃속의 아이에게서 상당히 강한 태동을 느낀다그녀는 수시로 고통을 느끼다 못해 어떤 발굽이어떤 때는 갈고리 발톱이 그녀의 연약한 내장을 자르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이따금 고통을 잊기 위해 시골길을 활보하거나 질주를 하고커다란 부엌칼로 자기 배를 갈라서 아이를 꺼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진정제를 먹어야만 잠잠해지는 아이 때문에 약을 먹을 지경이 될 때까지임신 기간 내내 해리엇의 시간은 고통과 인내환영과 망상들로 채워진다끔찍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듯 그렇게 태어난 다섯째 아이벤은 부부가 보기에 이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벤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난폭한 구석이 있는 데다 아이의 눈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갑다천성적으로 활기차고 친근하던 넷째 폴이 유독 불안해하며 화를 내기 시작하고테리어 개가 죽거나 늙은 회색 고양이가 목 졸려 죽는 일이 발생한다시간이 흐를수록 가족 모임은 해체되고벤은 부부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가족을 파괴시킨다.

 

 

 

난 너희들의 하인이야이 집에서 하인 일은 내가 다 하고 있지」 또는 너희는 둘 다 정말 이기적이로구나너희들은 무책임한 사람들이야」 이런 말들이 감돌았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그러나 만약 그녀가 시작만 한다면 이 정도로 그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았다. / 46p

 

 

반쯤 어두운 방 안에서 그 애는 정말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도깨비나 작은 귀신 같았다낮 동안 그 애를 가둬놓으면 그 애는 비명을 지르고 소리쳐서 온 집안이 시끄러웠고 식구들은 경찰이 올까봐 두려워했다그 애는 갑자기 이유도 없이 정원으로 달려 내려가 문 밖의 길로 뛰어나가곤 했다어느 날 그녀는 그 애를 잡으려고빵빵대는 차들이나 경고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무시하고 신호등을 건너는 뭉퉁하게 웅크린 작은 모습만 보면서 1마일 이상 뛰었다그녀는 울면서 숨을 헐떡였고 반쯤 정신이 나가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애를 잡으려고 결사적이었다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오그애를 치어요제발그래요……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 85p

 

 

 



 


 

 

 

  이처럼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이상적인 가정즉 전통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는 작품이다비정상적인 아이 하나가 태어남으로써 일어나는 가족의 붕괴를 매우 사실적이면서 충격적으로 묘사한다벤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공포스럽지만자기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가정의 내밀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의사의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을 보았다그 여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 투영된어둡고 고정된 시선이었다그것은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이질성에 대한 공포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여성에게 부여된 임신에의 공포와 의무감 혹은 모성애와 책임감이 어떠한 방식으로 왜곡될 수 있는가를 철저하게 보여준다또한 벤과 같이 사회적으로 제거된 아이들을 가둔 요양소의 충격적인 장면을 통해우리 사회가 비정상을 소거하는 일에 얼마나 몰두해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집안은 옛날 같지 않았다모든 사람들에게는 긴장감과 경계심이 깃들였다해리엇은 벤이 자아내는 무시무시하고 불안한 호기심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가 없을 때 그 애를 보려고 가끔씩 위층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았다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로 그녀는 그들이 벤을 보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마치 내가 죄인인 것처럼그녀는 분노했다그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마음을 끓이며 보냈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데이비드도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그에게 말했다이게 바로 옛날 원시시대에 변종을 낳은 여자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여주는 거야마치 그 여자만이 잘못한 것처럼하지만 우린 문명시대에 살잖아!/ 82p

 

 

왜 그녀는 그런 말을 하는가벤이 태어난 이후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벤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그녀가 텔레비전의 군중 속에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칼라를 세운 윗도리를 입고 스카프를 하고 있었고마치 데릭의 동생처럼 보였다그는 건장한 학생 같아 보였다그는 변장하려고 이런 옷을 입었던 것일까그 말은 그가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안다는 말인가그는 자신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사람들은 항상 그를 제대로 보는 일을그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할 것인가? / 177p

 

 

 

  이 외에도 소설은 새로운 가정을 준비하는 커플이나 임신한 여성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부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사랑과 행복으로만 가득할 것 같던 결혼 생활이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 어떤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지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이를 테면 부부가 육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자신의 신념이 다른 가족의 희생으로 이루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도 있다벤에게 관심을 쏟느라 온전히 엄마의 시선을 받지 못한 폴에게 일어난 부정적인 변화를 통해부모의 정신적·육체적 환경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무엇보다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책임감을 따르게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서 피할 수 없다내가 벤의 부모라면나라면 벤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게 바로 피임법이 발견되기 전에 여인들이 느끼던 감정일거야」 해리엇이 말했다공포 그 자체매번 그들은 월경을 기다리다가 그것이 오면 한달간 처형 연기를 받는 거야하지만 그 여자들은 괴물을 낳을까봐 겁내지는 않았겠지」 / 88p

 

 

그래요로바트 부인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시겠어요우선 저는 이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그리고 또한 이런 일이 희귀한 일도 아니라는 사실도요우리가 복권 추첨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선택할 수 없듯이 아기를 갖는 일도 마찬가지랍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에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당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 139p

 

 

 

  소설을 갈무리하며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이 가족을 파괴한 건이 정말 벤이었을까 하는 것이었다부부의 허황된 이상이그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끝끝내 외면한 것이 진정한 비극은 아니었을까짤막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주제를 내포하고 있어 도리스 레싱이라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읽은 작품이었다. 2000년에 발표한 후속작 세상 속의 벤도 읽어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언젠가 이 책도 내어주십사 출판사 측에 부탁을 드리며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얼른 주행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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