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 한 시절 곁에 있어준 나의 사람들에게
김달님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4월
평점 :

그리운 것들을 떠올리는 밤일수록 나는 나에게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지게 하는 책!
수능시험을 마친 뒤 1월의 어느 날, 나는 난생 처음 친구와 단둘이 춘천으로 여행을 갔다. 사실 학교 외에는 따로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수능시험이라는 거사를 치르고 난 뒤에 급격히 찾아온 허무한 마음을 여행으로 달래는 데 의견이 맞았던 것 같다. 그것도 보호자 없이, 무려 대구에서 강원도까지 여학생 둘이서 여행을 감행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친구 덕분이었다. 여행지 선택과 숙박, 맛집까지… 당시에는 지금처럼 SNS나 블로그가 활발하지 않은 때라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을 텐데 친구는 그 모든 계획을 착착 준비했고 마침내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당일, 춘천에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린 것이다. 기차역에서 픽업차를 기다리던 우리는 혹시 픽업 차량도 오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이 정도 눈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숙소에서 보낸 차량이 무사히 도착했고, 우리는 체크인 후 아늑한 공간에서 몸을 녹였다. 챙겨온 컵라면, 미리 싸온 김밥까지 야무지게 먹으며 바라본 그 날의 바깥 풍경은 내 생애 가장 잊지 못할 풍경 중에 하나가 되었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모습은 다음날 우리의 일정 따위 어찌되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심지어 숙소에서 그저 창밖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오길 잘했지?” 하고 코를 찡긋거리는 친구의 미소까지, 뭔가 대단한 비밀을 공유한 듯 우리는 기쁨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이후, 우리는 졸업을 하고 각자의 대학교로 진학한 뒤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서로의 연락처로 연락해볼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행을 하면서도 “앞으로 ~ 하자.” 같은 막연한 약속조차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이 여행을 끝으로 서로 각자의 갈 길을 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 와서도, 새하얀 눈을 떠올리는 날엔 어김없이 그 친구가 생각난다. 그때 우리가 함께 바라보았던 새하얀 풍경, 겨울 냄새까지.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에서는 열 살의 여름, 난생 처음 친구의 의미를 알게 해준 친구 희진을 떠올리며 전하는 말이 있다. ‘네가 그 저녁 속에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친구야.’ 괜찮다면 나도 이 말을 빌려 여기에 남기고 싶다. “네가 그 눈 속에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친구야.”
나를 다정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는 이름마저 은은하게 빛나는 김달님 작가의 에세이다. 그녀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밝힌다. ‘내게 글쓰기는 이러한 일이다.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내 쪽으로 돌아보게 하는 것. 오랜만에 마주하는 돌아본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맞아, 너 거기 그렇게 있었지. 반가워하는 것.’ 그리고 ‘혹시라도 들려올지 모를 너의 대답을 지금 여기에서 기다려보는 것. 그렇게 너를 다시 사랑해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글에는 어느 한 시절을 따스하게 채웠던 사람들이 있다. 덕분에 그들을 떠올릴수록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여길 봐라, 저길 봐라”는 할머니의 오랜 말버릇이 ‘본 것을 소중히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글을 쓰게 했음을 기억한다. 덕분에 어디서든 잘 보고, 기꺼이 감탄하는 당신을 매일 닮아가며, 그렇게 쓰며 살아갈 것이라 다짐해보기도 한다. 엄마와 아빠의 빈자리를 대신해 열 다섯 살의 고모 선희가 포대기로 업고서 자신을 병원에 데리고 다녔던 그 수고로운 마음도 헤아려본다. 또 수능 전날 갑작스레 기숙사 앞에 찾아와 두꺼운 외투 한 벌을 사준 아빠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한다. 냉동실에 파와 양파를 소분해두면 오래 먹을 수 있다던 동창생 K와 자취방에서 눈물을 쏟아내며 썰어댔던 추억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아주 작지만, 누군가 알려준 생활이 내게 익숙하게 변해버린 순간들에 마음이 따듯해지며 ‘나는 결코 나 혼자서 내가 될 수 없음’을 깨닫기도 한다.


소박하지만 다정하고 애틋하지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순간을 감각적인 언어로 길어 올리는 김달님 작가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나와 다른 시공간에 존재했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공간에 머물렀던 비슷한 얼굴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 모두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 공유된 감각이 읽는 내내 나의 모난 마음을 가다듬고 보드랍게 한다.
시간이 지나 친구는 부스럭 소리가 나던 아버지의 호주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힘을 내서 살아가기 위해선, 혼자서도 남은 길을 마저 걸어가기 위해선 따뜻하고 단 기억들로 호주머니를 채워놓아야 한다고. 언제든 쓸쓸해지는 날에 손을 집어넣어 내게 남아 있는 것들을 만져보고 꺼내 볼 수 있도록. 그러면 어느 날에는 호주머니 속에서 들리는 부스럭 소리만으로도, 어떤 기억인지 떠올라 조용히 미소 짓는 날이 있지 않을까. / 20p
“누나! 봄이 왔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랬더니 신이 난 네가 제자리에서 두 발에 힘을 주고 콩콩 뛰더니 말하더라.
“저번 주엔 내가 땅을 밟으면 딱딱했는데 이제는 폭신폭신해.”
막내야. 나는 일곱 살의 네가 알려준 덕분에 봄은 폭신폭신하게 온다는 걸 알아. / 72p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장 자주 물어본 것은 ‘왜?’였다. 왜 마음에 남았니. 왜 기분이 좋았니. 왜 쓸쓸해졌니. 스스로 왜?라고 물어보는 일이 우리를 글로 데려가 줄 것이기 때문이다. / 120p
한동안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내가 사라지는 상상을 자주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저 사람들이 기억하는 나는 왠지 거기 그대로 두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다른 시간들도 스르르 괜찮아졌다. / 135p


최근 자격증 시험공부를 준비하면서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나와의 외로운 싸움에 몰두한다는 건 상당히 외롭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시험을 앞두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격려와 응원을 받았다. 시험 당일,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에 데리고 가 준 덕분에 시험에 집중할 수 있었고 끝난 뒤, 어머님이 해주신 따끈한 밥에 그동안의 피로도 싹 잊을 수 있었다. 오직 나 홀로 견뎌 내야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곁에서 함께 한 마음으로 지지해주고 배려해준 이들이 있었기에 내가 성장할 수 있었음을 느끼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를 칭찬하느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은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모든 순간에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이 글을 빌어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