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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8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평점 :

여성의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바라보고, 시대의 가치와 인습, 도덕 등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당대 여성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
제한된 삶으로부터 자유의지에의 욕망과 자아성장을 실현하고자 하는 한 젊은 여성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작품!
“모든 게 지긋지긋해!”
6월의 오후. 산들바람 한 줄기가 언덕 등성이에 걸린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불어와 들판을 가로질러 풀이 우거진 노스도머 거리 아래쪽으로 그림자를 몰고 가는 시각, 텅 빈 거리를 홀로 걷고 있던 채리티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마을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는 열여덟 살의 채리티는 처음 한두 달 동안은 먼지 덮인 책들을 열심히 뒤적이며 전에 느껴보지 못한 정보에 대한 갈증을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하루 빨리 돈을 모아서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무엇이 되려고 애써봐야 모두 헛수고인 이 작은 마을에서 대체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산’에서 태어난 그녀가 변호사인 로열 씨의 후원으로 이 마을에 내려와 살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할 수 있었지만, 아내가 죽은 뒤 로열 씨가 채리티에게 청혼을 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감이 생긴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에서 유행하는 옷차림에 젊고 자유분방해 보이는 한 남자가 그녀의 시선을 끌기 시작한다. 도서관장의 조카이자 대도시 출신의 건축가인 하니는 어느 누구보다 지적이고 솔직하며 예의가 바른 남자였고, 그로 인해 채리티는 처음으로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느낀다.
사랑과 욕망, 현실과 한계 사이에서 갈망하는 여성의 성장을 그린 드라마
식민지 시대의 특징이 남아 있는 가옥을 연구하기 위해 노스도머로 온 하니와 그를 안내하던 채리티는 종종 초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피해 숲으로 들어간다. 여름 곤충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고, 흰나비가 무리 지어 자줏빛 분홍바늘꽃의 끝을 부채질하듯 움직이는 푸른 자연 속에서 채리티는 자신과 하니 두 사람만이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인 것처럼 그에게 이끌린다.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더러운 오점과도 같은 ‘산’ 출신의 그녀를 과연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두렵지만, 너무 드러내 놓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태도를 보이면 후견인인 로열 씨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도 모르지만 하니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외면하지 못한다.
사랑이 핏속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데
어디에서 태어났건, 누구의 자식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74p
머지않아 채리티와 하니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밀회를 즐기게 되고, 함께 있으면 여름밤 폭풍우도 두렵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깊어지지만, 이따금 교육과 기회에서 비롯된 격차는 아무리 노력해도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게 하여 채리티를 심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집을 몰래 빠져나와 하니와 도시에서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던 그녀를 로열 씨가 발견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굴욕을 주는 장면은 여성의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바라보고, 시대의 가치와 인습, 도덕 등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당대 여성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채리티는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와도 같았던 사랑이 비록 슬픔과 절망만을 남겼을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일 것을 선택한다. 하니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자신을 버리고 떠난 하니를 붙잡지 않는다. 여성이 스스로를 가엾은 희생자로 바라보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당대 여성들에게 새로운 여성상의 유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크레스턴 연못에서 만난 뒤로 줄곧 하니는 이렇게 생각에 잠긴 채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 없어 침묵을 지킬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럴 때 그의 얼굴에는 어둠 속에서 보았던 표정이 감돌았고, 또다시 그녀로 하여금 두 사람 사이에 설명하기 힘든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평소에 하니는 넋 빠진 듯 멍한 표정이다가도 갑자기 폭발하듯 쾌활한 표정을 지었고, 그러면 그녀의 마음이 오싹해지기 전에 어두운 그늘이 달아났다. / 133p
“이 갈보 년…… 빌어먹을…… 모자도 쓰지 않은 이 갈보 년!” 로열 씨가 천천히 내뱉었다.
술에 취한 일행이 깔깔대며 웃었다. 채리티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에 두 손을 갖다 댔다. 관중석을 떠나려고 벌떡 일어설 때 모자가 무릎에서 떨어진 것이 떠올랐다. 문득 모자도 쓰지 않고 엉클어진 머리로 남자의 팔에 안긴 채 가련한 후견인이 이끄는 술 취한 일행과 맞부딪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가슴 속에 수치심이 가득 차올랐다. / 141p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숙명적인 체념이 점점 더 채리티를 짓눌렀다. 상황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무 쓸모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채리티는 지금껏 적응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다만 부러지고 찢기고 파괴될 따름이었다. 그녀는 앨리와 한바탕 싸우면서 어린아이처럼 야만적으로 행동했다는 수치심에 휩싸였다. 만약 하니가 보았더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러나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 사건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리 교양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다르게 행동할 것 같지 않았다. 채리티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부당하게 맞서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 203p


이처럼 이디스 워튼의 소설 『여름』은 주인공인 여성이 사랑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현실을 대면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초여름에서 가을이 되기까지의 계절적 배경과 매사추세츠주 서부 산악 지역의 언덕을 배경으로 하는 대자연의 공간적 배경이 한 데로 어우러져, 제한된 삶으로부터 자유의지에의 욕망과 자아성장을 실현하고자 하는 한 젊은 여성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덕분에 『여름』이라는 제목과 표지 속 여성의 모습이 소설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연인의 포옹이라는 부서지기 쉬운 은막 뒤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의 삶이 수수께끼처럼 숨어 있었다’는 표현처럼 사랑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 없어 이따금 외로워지고 마는 등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다만 결말이 나의 입장에서는 다소 충격적이어서 채리티가 과연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소설 이후의 삶이 어떻게 펼쳐졌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 안에서 행복했을까. 채리티의 아이는 또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하고.
글쎄! 어머니를 그렇게까지 탓할 수 있을까? 그날 이후로 채리티는 어머니를 인간적인 감정이 조금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그저 불쌍하게 보였다. 어떤 어머니가 그런 삶으로부터 아이를 구하고 싶지 않겠는가? 채리티는 배속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자 쓰라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238p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이 비참한 무리 중 하나가 된다는 생각에 오싹함을 느꼈다. 그런 운명으로부터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길이라도 걷고, 삶이 부여할지 모르는 어떤 짐이라도 기꺼이 걸머질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238p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선 프롬』과 『순수의 시대』가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이선 프롬』은 『여름』과 자매편과 같은 작품이라고 하니 이 책도 찾아 읽어봐야겠다. 이디스 워튼의 작품을 미처 접해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