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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마음껏 아프다 가 - 울음이 그치고 상처가 아무는 곳, 보건실 이야기
김하준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5월
평점 :

아이들의 상처 난 마음까지 돌보는 어느 보건교사의 특별한 보건일지!
보건실, 그 작은 방 안에서 일어나는 따뜻한 희망 이야기!
나는 적응에 느린 아이였다. 새 학년, 새 학기가 되면 유독 남몰래 눈물을 자주 흘렸다.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선생님, 늘어난 과목과 어려워진 숙제들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바뀐 환경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그나마 숨통을 틔울 수 있었던 곳은 보건실(당시에는 양호실)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보건실에 가고 싶다는 나를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었을 때는 탐탁지 않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그런 내가 그나마 위안을 얻고 다시 적응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보건실 선생님 덕분이었다. “괜찮아질 거야. 너한테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뿐이야.”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보건 선생님으로부터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약으로 치료를 받은 셈이었다. 보건실 선생님의 얼굴을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말만큼은 여전히 내게 남아있는 걸 보면 말이다.
친구들과 함께 놀고 싶은데 끼워주지 않아서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을 데가 없어서
학교에서 울고 싶은데 울 데가 없어서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아이들은 갈 데가 없어서 보건실에 가기도 한다. / 18p
상처가 아물 때쯤 한 뼘 더 자라 있겠지
2학기 내내 체한 것 같다며 자주 소화제를 먹던 아이가 어느 날, 1교시도 시작되기 전에 보건실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와 꺼이꺼이 울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선생님의 말에 아이가 꺼낸 첫 마디는 가히 충격적이다. 옥상에 올라가 떨어져 죽으려고 했는데 옥상 문이 잠겨 있어서 갈 데가 없어 보건실에 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20년간 보건교사로 일하고 있는 김하준의 에세이 『여기서 마음껏 아프다 가』에는 보건실을 찾는 아이들의 뜻밖의 사연들이 실려 있다. 저자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아이를 꼭 안아주며 여기 오길 정말 잘 했다고, 진짜 잘했다고 다독였다고 한다.
우리는 ‘보건실’ 하면 연고나 밴드를 발라주는 가벼운 외상 정도의 치료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내상을 발견해내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머릿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며 찾아오는 아이, 구내염을 자주 앓아서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해도 갈 수 없는 아이, 특별히 아픈 곳이 없어 보이는데도 자주 아프다고 찾아오는 아이까지. 이 아이들을 위해 보건실은, 어떤 위험한 징조를 감지하기 위한 센서이자 가정과 교실에서 소외된 아이를 마지막으로 걸러낼 수 있는 체의 역할이 될 수 있는 곳이다. 마음의 불편함을 몸을 빌려 아프다고 말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아픔까지 살펴봄으로써 저자는 다짐한다. 아이들을 볼 땐 그림자도 함께 보기를, 그림자가 얼마나 큰지 알아보기를, 그림자가 너무 커 그림자가 없는 줄 착각하지 않기를.
흙 묻은 양말을 신은 채 저벅저벅 보건실로 들어오던 지헌이. 비와 땀에 흠뻑 젖어 “저는 비 맞으면서 축구하는 것도, 비 맞고 다니는 것도 왠지 재밌어요. 답답한 게 다 사라지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던 지헌이. 엄마는 누구에게나 당연히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한 지헌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당당한 날림체처럼 자신만의 빛깔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바란다. / 49p
사춘기 아이들에겐 그런 작은 것들, 누군가의 놀림이 상처나 고민거리가 되곤 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지아의 마음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고 이렇게 손금으로도 상처를 받는다.
세상에 미운 손은 없다. 나쁜 것을 도모하는 손, 남에게 해를 가하는 손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손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아름답다’의 어원은 ‘앎’인데 사람이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손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손은 예쁘다가 아닌 아름답다가 어울린다. 서로 다른 일을 하는 하나밖에 없는 귀한 손이다. 하물며 꼼지락꼼지락 무얼 배우는 아이들의 손은 두말해 무엇 할까.
나는 오늘도 아름다운 손으로 아이들의 귀한 손을 치료한다. / 94p
당뇨를 가진 아이들의 고달픈 마음을 헤아릴 순 없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과 희망의 순간을 경험하리라는 짐작을 해본다. 그 아이들의 마음에도 굳은살이 배기려면 손가락이 얼마나 더 많이 찔리고 또 아물기를 반복해야 할까. 당뇨병 진단을 받은 아이를 보면 그저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 100p


학교를 지키는 단 한 명의 의료인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들도 담겨 있다. 5분 간격으로 홍수처럼 들이닥치는 아이들과 많은 업무, 지속적인 긴장감 속에서 어떤 보건교사가 아이를 매번 사랑으로 치료해줄 수 있을지. 갈수록 많은 법들과 규정 속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일을 하게 만드는 제도 속에서, 어떤 보건교사가 언제까지나 아이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고 눈빛을 살필 수 있을지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무엇보다 그다지 전문적이지 않은 최소한의 의료 기구로, 혼자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 막연한 불안과 긴장을 늘 안고 있다 보니 심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보건교사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성교육 방식의 문제점 또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인 듯하다. 이렇게 20년간 보건교사로 근무하면서 교육 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보건실과 보건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된다.
성교육의 최종 목적은 젠더 감수성 함양이다. 젠더 감수성은 인간관계의 모든 것에 관여되어 있다. 젠더 교육은 남녀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닌 다양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에 있다.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 잘못이 아니라는 것, 서로를 혐오하지 않게 하는 것, 혐오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 남녀 성을 구분하기 전에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바라보는 것,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 결국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을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2010년이 아닌 2020년대를 살고 있고, 2030년대에 어른이 될 아이들을 가르치는 어른이다. 머무르고 고여 있는 학교가 아닌 끊임없이 앞을 내다보고 시야를 확장시키도록 도와주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 234p
보건실에 가는 아이가 없는 교실이 행복한 교실이다.
보건실에 가는 아이가 적은 학교가 행복한 학교다. / 106p
대부분의 과일은 상처가 나면 썩지만, 모과는 상처가 나도 잘 썩지 않는다는 걸 상처 난 모과를 오래 지켜보며 알게 되었다. 오히려 상처 난 자리에서 더 진한 향기가 배어 나왔다. 모과는 완전히 단단해질 때까지 향기를 뿜어냈다. 갈색의 빛깔은 언젠가 박물관 전시에서 본 미라의 색깔을 연상케 했다. 향기가 다하자, 가벼워졌다.
(…) 마음이든 몸이든 상처를 가지고 보건실에 오는 아이들 중에도 향기가 없는 아이는 없었다. 울퉁불퉁 모과 같은 아이들도 자세히 바라보면 그 안에 사랑스럽고 생기 넘치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따뜻한 성질을 가진 모과처럼 아이들은 그 자체만으로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 115p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아픔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상처까지 함께 보려는 보건교사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복도 가장 끝 혹은 건물 밖 외진 곳에 존재했던 보건실의 위치가 이들의 노고를 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을 덮으며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에게 물어 보았다. “너 보건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가봤어?” 혹시나 다치거나 아프면 보건실을 찾아가야 한다고 알려주려 했는데 아이가 당연한 듯 대답했다. “그럼. 내가 얼마나 자주 가는데. 저번에 책에 찍혀서 발가락 다쳤을 때 갔지, 책에 베여서 피 났을 때 밴드 붙이러 여러 번 갔는데?” 아주 사소한 상처에도 밴드를 붙이곤 하는 아들의 평소 행동을 돌이켜보니 걱정은 기우였던 듯하다. 덕분에 한 번 크게 웃은 뒤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혹시나 담임선생님께 하지 못할 말이 있거나, 마음이 아파도 보건실 선생님을 찾아갈 수 있어. 선생님이 네 마음도 치료해주실 거야.” 하고.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