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황모과 지음 / 래빗홀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년 전이 뜨거운 역사가 우리에게 건네는 목소리!

형용할 수 없는 이 통증의 기록이 더 이상 돌림노래가 되지 않기를!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9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역에 진도 7.9급의 초강력 지진이 발생했다관동 지역 일대가 궤멸되다시피 했다사망자를 비롯해 행방불명자만 해도 14만 명이재민이 340만 명에 달하는 국가 초유의 재난이었다그런데 이 혼란스러운 상황과 사회 불안 속에서 이상한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조선인이 밭에서 작물 훔쳐 갔다상점 약탈했다여성들을 강간하는 것도 모자라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낭설이 불길처럼 일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이민자나 유학생을 제외하고서도 그해에만 대략 2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노동자로 이주해 있던 때였다지진이 발생한 당일경찰이 주도해 유언비어를 공식적으로 확산시키기 전부터도 조선인을 공격하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목격되었다다음 날에는 간토 지역 전체에 급조된 자경단과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 간토 지역에서만 무려 1,593개의 자경단이 일제히 활동을 개시했다. “좋은 조선인도 나쁜 조선인도 죽여라.” 그들은 조선인과 마주치기만 해도 무기를 들었다조선인으로 의심받았던 중국인이나 조선인을 도운 일본인까지도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을 무참히 죽였다무간지옥이 따로 없었다.

 

 

 

새롭게 쓰인다는 것에 대하여

 

 

  마침 올해가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가 되는 해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나는 부끄럽게도 관동 대지진은 알았으나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지진이라는 거대한 이미지에 경도되어 있었던 것인지학살의 피해자들을 위한 조직적인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미처 미치지 못한 것인지나는 어째서 까마득하게 이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을까실제로 공권력이 독려하여 덮어버린 사건이었으며 대부분이 불문에 부쳐져 아직까지도 진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니 학살의 피해자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줄 길이 사라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다.

 

 

 



 

 

 

 

  이에 작가 황모과는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지금껏 묵인되고지워지고은폐됨으로써 무수하게 사라진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한다그러나 단순히 기술적인 재건을 의미하는 것이 복원이라면황모과는 단순히 광기와 혐오의 역사를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이 통증의 기록이 더 이상 돌림노래가 되지 않도록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연거푸 제안한다. ‘타임 루프(주인공 및 주변인물들이 특정 시간대에 갇혀서 똑같은/비슷한 일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하는 상황)’라는 소설적 장치를 통해 과거를 바꾸고 싶은 욕망과 끝내 바꿀 수 없는 역사의 괴리 사이에서 고뇌하고 환기하고 침묵을 부수어 회복을 모색하는 심리적 토대를 마련해나간다.

 

 

 

싱크로놀로지 채널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현장을 관찰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다일어난 현상을 되돌릴 수는 없다과거의 현상 사이를 탐험할 수 있을 뿐 과거 자체에 변형을 가할 수는 없다하지만 민호는 기대했다시스템을 통해 당대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다면그 순간 말을 전할 수 있다면최소한 도망치라고 소리라고 지를 수 있다면 한두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는 건 아닐까자신이 간 곳에서라도 학살을 막아낸다면 그건 진상을 밝히는 일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 19p

 

 

민호는 사료의 신빙성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다 자주 나가떨어지곤 했다증거를 가져오라는 사람일수록 진상을 알고도 외면하거나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민호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검증된 증거가 있어야만 증면된다면 100년쯤 지나 생존자들이 모두 사망하고 기억조차 희미해지면 민간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한 일도 없던 일이 되리라는 기대 섞인 믿음과 닿아 있다모두의 기억이 퇴색되어 자신들의 죄악까지 희미해지길 원하는 것이다. / 68p

 

 

다카야는 이번 생에도 목격했다그해 일본인을 살해한 자 몇몇이 지극히 가벼운 형 집행을 받았을 뿐조선인을 살해한 자들은 대부분 무죄로 석방되었다공권력이 작정하고 공문서를 소멸하는 것을생사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유족들이 영영 찾을 수 없도록 치밀하고 오나벽하게 유해를 은닉하는 것을어린이들의 수기까지 꼼꼼하게 삭제하는 것을 보았다철저하게 기획된 은폐였다전부 똑똑히 지켜보았다. / 182p

 

 

 




 

 

 

 

  순사들이 동네를 돌며 확성기로 조선인을 주의하라고 경고했다선동된 광기와 위협에 교육받지 못한 하층민들뿐 아니라 지역 유지대학 교수아름다운 글을 쓰던 작가들도 무기를 들었다이에 저항하기 위해 백정 출신인 조선인 달출은 죽을 줄 알면서도 저들에게 달려들며 속으로 외친다. ‘끈질긴 놈들이라 그냥은 안 죽었다고 알려줘야 허니께앞으로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큰일을 저질렀다고 기억하게 해줘야제죽어가면서도 눈을 부라려줘야제!’ 그의 울분에당시 조선인들이 겪었을 분함과 애통함에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그럼에도 도무지 누구의 묘비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능욕의 흔적들을 뒤로 하고새로 새워진 달출의 추모비가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역사는 바뀌지 않아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리라이것이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며 이 불온한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의 메시지가 미더운 이유다.

 

 

 

약자에 대한 혐오가 조장되고 장려되는 한민중의 민중에 대한 학살은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 할머니의 손맛과 손녀의 손길로 완성되는 소박한 채식 밥상
예하.임홍순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리로 인생을 배우게 되는 책!

사람과자연과사랑이 있는 예하 작가와 홍순 할머니의 정다운 밥상 이야기!

 

 

 

 

  ‘홍순씨와 저의 리틀포레스트함께 하실래요?’

  마치 영화 <리틀 포레스트속에서나 나올 법한 제철 채식 밥상 피드에 눈이 황홀해진다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의 저자인 예하 작가의 인스타그램에는 할머니의 손맛과 손녀의 손길로 완성된 요리들이 한 가득이다계절의 변화가 오롯이 담긴향기 가득 몸과 마음을 다채롭게 채워줄 것 같은 아름다운 밥상이다그 가운데 예하 작가와 임홍순 할머니가 다정하게 포토 카드를 찍어 올린 사진이 또 한번 눈길을 끈다할머니와 손녀만이 나눌 수 있는다정함과 애정이 담뿍 담겨 있는 사진이다인스타그램이라는 공간에서아니 우리 일상에서도 보기 드문 장면이라 괜스레 마음이 울컥거린다문득 그들이 함께 만든 음식만큼이나 두 사람의 사연이 더 궁금해진다.

 

 

 

음식과 인생을 배우고 싶어 할머니의 요리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책 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는 대학 대신 진주에 있는 할머니 요리학교에 입학해 세월로 쌓인 요리와 삶의 지혜를 배우고 있다는 예하 작가의 음식에세이다계절마다 산과 들을 누비며 직접 따온 채소들새벽시장에서 넉넉하게 담아온 채소들로 정성껏 만든 임홍순 할머니의 요리에 손녀의 손길을 더해 완성된 소박한 밥상을 소개한다한때 진주를 휘어잡을 정도로 30년 넘게 떡집을 운영했다던 홍순 할머니는 대충이라고는 하지만 온 신경을 세워 요리하는 손녀에게 늘 힘을 빼라고 하신다. “몸에 힘을 빼고시장 들락날락거리면서 먹고 싶은 요리를 하면 되는 거야.” 그래서 정확한 조리법도 없고어림짐작에 오로지 으로 만들어진 기록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지만 할머니의 요리에는 수십 결의 세월이 쌓이고 겹쳐진그래서 계속 듣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짜면 물을 더 넣으면 되고달면 달달한 대로 그 매력을 즐기면 되는 그런 사람 사는 이야기가.

 

 

 

내가 대단한 응원이 되어줄 수는 없지만그래요리요리가 예하의 응원이 된다면 얼마든지 보태줄게나는 못 그랬지만 너는 세월의 흐름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살어.”

언제까지고 나의 응원이 되고 싶다는 사람. / 61p

 

 

풀을 태우면 연기가 나잖어울 할머니가 그 연기에 부채질을 하면서 우리한테 보내셨어모기한테 물리지 말라고그렇게 한참을 보냈어휘이휘이물리지 말어라우리 아가들 편안하게 잠들어라어찌 그런 정성을 쏟으셨을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하나의 세상을 그려나간다할머니의 부채질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의 단어를당연하게 먹어온 집밥으로부터 맛의 세계를들어온 말로부터 언어의 온도를. / 123p

 

 

 

  책 속에서는 시금치 부침개에서부터 아카시아 시루떡호박꽃 갈레트에 이르기까지 채식 요리 90가지가 수록되어 있다평소 무침으로만 해먹던 시금치를 부침개 재료로 만들어 볼 생각은 왜 안했을까여기에 달달한 고구마 하나양파를 채 썰어 넣어 부침가루와 감자전분을 3대 1비율로 섞어 골고루 가루를 먼저 묻혀준다재료에 가루를 먼저 묻히면 최소한의 반죽으로 얇은 부침개를 만들 수 있다고 하니나도 이대로 도전해 먹어봐야겠다그리고 전이 남으면 토스트 재료에 얹어 부침개 토스트도 해 먹을 수 있다니 이번 주말에 꼭꼭 해먹어야지.

 

 

 

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당신은전을 구울 때면 식구들 먼저 먹이느라 한두 입 먹고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기 바빴어요처음으로 그런 당신을 붙잡고 말해요. “우리 천천히 먹자음식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우리 둘만 있고한 장씩 구워서 가장 맛있을 때 천천히따뜻하게 먹자.” 당신은 가만히 전을 바라보다이내 나를 바라보더니 맑게도 웃어요. / 21p

 

 

 




 

 

 

 

  두 달 전엄마가 독감에 걸려 응급실에 입원까지 하게 되어 그 주를 꼬박 병간호를 다녔다퇴원 후 재검을 위해 한 번 더 병원에 가야 했는데피를 뽑아야 한다고 미리 세 시간이나 일찍 병원에 가 있어야 했다엄마는 아침도 안 먹고 달려왔을 딸을 생각해서 기다리는 동안 먹을 도시락으로 호박잎 쌈밥을 넉넉하게 만들어오셨다이제야 숨 좀 돌리며 지낼 만 하셨을 텐데 그 와중에 딸 먹일 도시락을 싸온 정성에 울컥하면서도 나는 신나게 먹었다어릴 땐 우엉잎호박잎배추잎이 뭐가 맛있다고 자꾸 권하는지 참 그렇게도 싫었는데… 양념고추장을 더해 향긋하게 즐기는 쌈밥은 이젠 엄마가 해주는 게 아니면 먹을 수 없는 거라 그리운 맛이 되어버렸다홍순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우엉잎 쌉밥과 호박꽃 주먹밥도 예하 작가에게 그런 의미가 아닐까그리움을 담은 그런 맛.

 

 

 

예하야천 원짜리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해천 원보다 백 원이 더 중요하고백만 원에서 백 원이 없으면 그건 백만 원이 아닌 거거든큰 보따리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지고는 하니까그러니 작은 일작은 돈에 무뎌지지 말고 신중하게.”

삶과 사람이 엿보이던 우엉잎그리고 천 원. / 21p

 

 

파는 누룽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소한 맛과 향이 집 안 가득 퍼지던 할머니의 마음이 담긴 누룽지백 원 하나쌀 한 톨지나가던 한마디도 귀하게 여기는 할머니를 보며 생각해요. ‘세상에 혼자인 것 같은 순간이 오면 찬밥을 가득 안고서 누룽지를 구워야겠다.’ / 56p

 

 

너는 이 평범한 걸 뭐 그리 열심히 적어예전엔 노다지 이것만 해 먹었어!”

그래서 적어요평범해서 지나쳤던 순간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발견하고어루만지고전하고묻혀 있던 보석을 캐는 마음으로 요리하고 싶어서요.

이거 다아 멋진 당신 보면서 배운 거야내가 살아가는 모든 방식들은 다아 그 손에서 시작된 거야.” 할머니만 모르더라고요. / 127p

 

 

 

  결혼을 하고 시집의 음식 문화에 적응을 해야 했던 때가 있다그 중에 하나가 토란이었다경상도에서는 토란 하면 토란 줄기로 육개장 같은 국물 요리나 고사리처럼 무침으로 해먹는 경우가 많다나는 어머니가 토란국을 해주신다기에 당연히 토란 줄기가 들어있는 국인 줄 알았는데 감자 같은 게 한 가득 들어있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니이거 감자인가요?” 하고 물은 내게 어머니는 한껏 웃어 보이셨다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게 토란이라는 걸 알았다이 책 속에서 홍순 할머니는 토란으로 토란병이라는 걸 만들어주셨다삶은 토란을 부드럽게 으깨어 찹쌀가루와 반죽한 다음 참기름에 지지는 방식인데그 위에 땅콩호박과 홍옥을 설탕에 달달하게 절여서 만든 정과와 꽃조청과 메밀꽃을 얹으니 작품이 되었다언젠가 어머님이 토란을 주시면 나도 홍순 할머니의 토란병을 만들어봐야겠다.

 

 

 

여든 해에 가까운 세월 동안 적혀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적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그 기나긴 세월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달려온 당신의 이야기를 기억해요살아도 살아도 세상이 궁금하다는 당신의 눈빛을 기억해요인생의 비법은 속도가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렸다는느려도 괜찮다는 할머니의 말로 오늘의 수업을 마칩니다. / 103p

 

 

너는 이 평범한 걸 뭐 그리 열심히 적어예전엔 노다지 이것만 해 먹었어!”

그래서 적어요평범해서 지나쳤던 순간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발견하고어루만지고전하고묻혀 있던 보석을 캐는 마음으로 요리하고 싶어서요.

이거 다아 멋진 당신 보면서 배운 거야내가 살아가는 모든 방식들은 다아 그 손에서 시작된 거야.” 할머니만 모르더라고요. / 127p

 

 

 




 

 

 

 

  이 외에도 남편이 좋아해서 처음 만들어봤다가 이제는 내가 좋아서 봄만 되면 만들어 먹는 달래장채식 감자탕유무 나물 말이 등은 채식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해먹어보기 좋은 음식인 것 같다그 중에서도 파개장은 내가 꼭 해먹어보고 싶은 음식이라 다가오는 주말에 꼭 만들어볼 생각이다홍순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파를 무작정 많이 넣으면 칼칼하니 맵지만데쳐서 넣으면 달짝지근해져서 얼마든지 더 넣을 수 있다고 하니 할머니의 비법을 빌려 해봐야겠다.

 

 

 

  “할머니는 제일 친한 친구가 있어?” 예하 작가의 물음에 홍순 할머니는 있지너잖아.” 하고 대답하신다망설임 없이손녀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따뜻한 음성이 듣지 않아도 들리는 것 같다사람과자연과사랑이 있는 예하 작가와 홍순 할머니의 정다운 밥상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자 스파이 -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필사적으로 막은 과학자와 스파이들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자폭탄 개발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독일과 연합국 간의 치열한 경쟁의 역사를 다룬 대중과학서!

전쟁이 남긴 상흔 그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과, ‘발전 그리고 혁명이라는 이름 뒤에 따르는 무한한 책임감을 기억하게 하는 책!

 

 

 

 

  원자를 쪼갠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물리학자들은 우라늄 원자를 쪼개면 막대한 에너지(유명한 공식 E=mc²)가 나오며인류가 안전하게 다룰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1938년 후반까지만 해도 이것은 그저 이론적 염려에 불과했다그런데 독일의 오토 한이 그것을 발견하고 리제 마이트너가 이를 입증했다그리고 1939년 4졸리오가 우라늄 원자는 핵분열을 한 번 할 때마다 중성자가 증식하여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따라서 핵폭탄 제조도 가능하다는 것을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대다수 물리학자들은 이 소식에 전율을 느꼈지만정치적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독일은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과 함께 세계 최고의 산업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였다만약 핵물리학으로 무기를 만드는 나라가 온다면그것은 독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히틀러에게 가공할 만한 무기가 쥐어진다는 뜻이었다오토 한은 훗날 자신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다하지만 기어코 우려할 만한 일은 벌어지고야 말았고핵물리학계에서 핵분열 소식은 세계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분수령이 되었다원자를 쪼갬으로써 세상이 분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치의 원자 폭탄 개발을 막아야 한다!

 

 

  연합국 측은 프랑스와 독일로 진격하기 전에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점령하느라 이미 수백만 명을 희생한 상태였다하지만 그들은 히틀러가 단지 우라늄 몇 킬로그램만으로 연합국을 유럽 대륙에서 축출하다 못해 세상이 그 가공할 힘에 무너지는 광경을 보게 될까 두려웠다독일의 화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은 이미 핵분열을 발견했고우라늄 클럽을 만들어 핵개발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었다여기에 독일은 전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중수 생산 시설인 베모르크를 손에 넣어 핵폭탄 개발에 필요한 중수를 마음껏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또 벨기에를 점령함으로써 벨기에가 아프리카 식민지들에서 수입한 수천 톤의 우라늄광도 손에 넣었다또 졸리오에게서 조건부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사이클로트론(입자가속기)도 얻었다.

 

 

 

지식인에 대한 불신이 강했던 나치는 1939년에 과학자들에게 병역 면제를 거의 해주지 않았다그런데 이 소수의 화학자와 물리학자에게는 예외를 인정했다왜 그랬을까디프너가 상관들에게 야심찬 계획에 도박을 걸어보라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그 계획은 바로 핵분열 폭탄을 만드는 것이었다나중에 이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우라페라인즉 우라늄 클럽이라고 불렀다. / 136p

 

 

만약 독일이 전력을 다해 달려든다면, 1943년 중엽에 히틀러가 핵폭탄을 손에 쥐게 된다는 뜻이었다.

이 보고서는 과학계를 흔들었다그전까지만 해도 많은 유명 물리학자들은 핵폭탄의 잠재력을 인정하면서도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항상 의심을 표시했다이들은 모두가 간과한 미묘한 요인이나 새로운 자연의 법칙이 그러한 무기를 실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이것은 희망적 생각에 사로잡혀 논리적 사고를 도외시한 대표적 사례였다. MAUD 보고서는 그런 희망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영국 과학자들과 미국 과학자들은 마침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끝에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그들은 이미 많이 뒤처져 있었다독일은 2년 전부터 핵무기를 연구하고 있었다. / 182p

 

 

 




 

 

 

 

  이제 과학자와 정치가군인 모두 원자핵에 숨어 있는 초자연적 힘이 곧 미치광이의 손에 들어갈 것을 확신했다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필사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미국의 물리학자인 오펜하이머를 필두로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을 통해 미국 과학자들은 미친듯이 원자폭탄 개발에 매진했다또 연합국 측은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스파이군인물리학자정치인 등을 투입해 그 어떤 극단적인 전술도 마다하지 않았다중수 생산 시설인 베모르크를 파괴하기 위한 프레시먼 작전과 거너 사이드 작전을 비롯해 과학자를 스파이로 만들어 첩보 활동을 감행한 알소스 임무에 이르기까지나치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한 비밀 임무가 동시다발적으로 치열하게 펼쳐졌다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과학자와 정치인이 이보다 더 큰 이해가 걸린 일에 전력투구한 적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혹은 숨 막히는 긴박감이 사람들을 이보다 더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게 한 적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패시는 트럭 수송 부대 둘을 징발했다그리고 통과 튼튼한 과일 포장용 자루를 만드는 근처 공장으로 달려가 노동자들을 설득해 설비를 가동시켰다그들은 며칠 동안 용기를 수천 개나 만들어냈고거기에 우라늄을 담는 작업을 도왔다가끔 포탄이 날아오고 총격적인 발생했지만그들은 일주일 안에 트럭 260대에 우라늄을 남김없이 실었다훗날 그로브스 장군은 이 탈취 작전을 전쟁 동안 자신이 느낀 가장 큰 위안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이렇게 해서 사라졌던 독일의 우라늄 중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 514p

 

 

 

  그 중에서도 메이저 리그 야구 포수 출신에서 미국 최초의 원자 스파이로 변신한 모 버그가 특히 인상적이었다그는 화이트삭스에서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포수 중 하나로 성장하면서도 오프 시즌에는 컬럼비아 법학 대학원을 다니는 인재였다심지어 뉴욕주 변호사 시험까지 치르고 합격까지 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만큼 다재다능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여기에 괴짜 같은 그의 면모는 덕아웃을 찾아오는 스포츠 기자들과 후배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기까지 했는데훗날 야구선수에서 스파이로 변신했을 때 이러한 장점은 확실히 무기가 되어주었다다만 주머니에서 권총을 자주 떨어뜨리는 등 비밀요원으로서는 다소 어설픈 행동을 보이기도 했는데, 3년 후 우라늄 클럽의 핵심인물인 하이젠베르크의 턱 밑까지 추격해 그의 목숨을 놓고 저울질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으니 그 이야기가 참 흥미진진하다.

 

 

 

개인적으로 여행 중에 경험한 한 가지 일 때문에 계속 마음이 심란했다. 1933년 1월 하순에 베를린에 도착한 버그는 즉시 여러 신문을 집어들었다모든 신문에 똑같이 헤드라인이 실려 있었다아돌프 히틀러라는 43세의 선동가가 새 독일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버그는 기쁨에 넘친 나치 군중이 거리에서 이 사건을 축하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날을 보냈다미국으로 돌아온 뒤버그는 들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유럽이 큰 불행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말했다. / 40p

 

 

 




 

 

 

 

  이처럼 원자 스파이는 1930년대에 일어난 핵분열의 탄생에서 시작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마지막 날까지원자폭탄 개발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독일과 연합국 간의 치열한 경쟁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여기에 스파이와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특공대 알소스 부대를 중심으로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험한 무기를 둘러싼 과학 첩보 작전이 한 편의 대서사시처럼 스릴 넘치게 펼쳐진다스파이 소설에 관심 있는 분들 뿐만 아니라 2차 세계 대전사와 원자폭탄 개발을 둘러싼 전말을 알고 싶은 분들이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이 무렵의 저명한 과학자인 하이젠베르크마리 퀴리마리 퀴리의 딸인 이젠 졸리오-퀴리오토 한가우드스밋 등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점도 이 책의 특별한 매력이다무엇보다 이 역사를 통해 전쟁이 남긴 상흔과 그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을, ‘발전 그리고 혁명이라는 이름 뒤에 따르는 무한한 책임감을 우리 모두가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 자이언트 스텝 2
김서해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 목소리가 내 마음을 밝힌 거야!

감각적인 언어와 감성으로 세상의 모든 해인과 공명하는 이야기!

 

 

 

  누나는 이름이 뭐예요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뭐예요미술은 언제 시작했어요어떻게 시작했어요글은 언제 쓰고 싶었어요소설누나는 어떻게 발산해요완전히 새로운 감정을 알게 된 적 있어요영원의 끝없는 질문은 해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비추는 사람이라는 이름에 비해 어엿하지 못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서른을 넘긴 나이와 텅 빈 커리어학창 시절 추었던 춤과 대학 시절 그렸던 그림몰래 쓴 글엎질렀는데 흐르지 않은 꿈들로 자책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마치 자신을 해체하려 드는 것만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해인은 이 질문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해인 스스로도 자신을 긍정할 수 없을 때마다 영원의 질문이뜻 모를 대화가 자신의 곁을 맴도는 듯한 것이 어쩌지 나쁘지 않다. ‘무의식은 꿈이고 꿈은 푹 꺼진 사랑이에요기쁨도 똑같이 예행연습이 많이 있을 거예요그래도 자기만의 질서가 있을 거예요영원을 갈망하는 마음이 가치를 만드는 거죠죽지 않으면 뭐든 될 수 있어요’ 이런 말들이 해인의 오기를 달래주고 욕심을 받아주고 영원히 자신의 주변에 있을 것처럼 굴었기에.

 

 

 

슬픔도 리허설이 있구나밴드 같네.”

밴드 같아요?”

근데기쁨도 똑같이 예행연습이 많이 있을 거예요.”

나는 모든 감정이 그런 식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영원의 말을 듣자마자 그럴지도 모른다고 작은 가능성을 열어 두게 되었다. / 34p

 

 

무의식은 꿈이고 꿈은 푹 꺼진 사랑이라고 했다수수께끼 같은 말에 꽂혀 나는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보았다영원이 지갑을 꺼내 교통카드 단말기에 갖다 댈 때 나는 다소 초조하게 물었다.

부풀어오른 사랑도 있어요?”

영원은 뭐겠어요하며 웃었다꿈이 아닌 사랑은 다 부푼 사랑이라고 했다남이 묻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사랑은 항상 눈에 잘 띈다고그런 것들이 바람이 빠지면 무의식 속으로 사라지는 거라고 했다. / 39p

 

 

 



 

 

 

 

그가 물으면 나에게 답이 생기는 마법 같은 시간

 

 

 

  ‘질문은 를 늘리며 확장하는 행위다. ‘이미 알고 있는 나와 미처 알지 못한 나가 서로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시간이다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나도미처 알지 못한 나도 결국엔그 어떤 자아도 무용한 것은 없다해인은 영원과 나누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바닥까지 가라앉다 못해 늘 얼얼하기만 했던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이해하고모른척하고 묻어두기만 했던 스스로와 화해하며 자신만의 질서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깨달아간다그리고 마침내 가짜로 점철된 이야기들이 아닌 자신의 글을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게 된다.

 

 

 

난 한 번도 내 말들을 믿은 적이 없었어그런데 너와 있을 때면네 목소릴 지금까지 찾아 헤맸단 걸 알게 돼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 / 172p

 

 

 




 

 

 

 

  이렇듯 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는 자아 찾기라는 고전 문학의 클리셰를 감각적인 언어로 그려낸 소설이다서사로 이야기를 쌓아올리는 익숙한 전개가 아닌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숨겨두었지만 언제라도 드러내길 바라왔던 한 사람의 내면을 서서히 길어 올리는 듯한 방식이다. ‘과거 어느 인간이 경험한 통증의 기록이 훗날 유사한 질병을 앓는 다른 인간에게 손을 내미는 것우리는 이것이 문학의 쓸모이며 문학의 효용이라던 박혜진 비평가(언더스토리)의 말처럼김서해 작가는 끝없는 우울감으로 어디에도 나아가지 못하고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던 해인을 통해 또 다른 이름의 해인들에게 손을 내민다우리 모두는 얼마쯤 해인을 닮았다는 점에서조금씩 자신과 조우하는 해인의 마음과 저절로 공명하게 된다.

 

 

 

혼자 지어낸 거라도이야기는 위로가 돼.” / 148p

 

 

 

  반짝이는 첫 소설을 응원하는 <자이언트 스텝>의 두 번째 책으로새로운 감각을 선사하는 특별한 작품을 만나 반가웠다김서해 작가의 다음 행보를 응원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터디 위드 X 창비교육 성장소설 9
권여름 외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회적 이슈들을 매우 현실적이고도 기묘한 형태의 이야기로 엮어낸 학교 괴담집!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밤이 되면 책 읽는 동상이 깨어나 책을 읽는다던데이순신 동상이 차고 있던 칼이 밤사이 반대쪽으로 바뀌어 있었대과학실에 있던 뼈들이 밤마다 하도 돌아다녀서 교문 밖에서도 딱깔딱깔 소리가 들린대학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상당히 비슷한 내용의실제로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그래서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황당무계하기도 한 괴담들이 떠돌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서 학교 괴담이 구체적인 공포로 다가왔던 시기는 학업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학교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빚어지는 온갖 갈등을 은유하고 암시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던 때인 것 같다가장 연약하고 민감한 감정들이 예리하게 조형된 공간욕망과 불안 그리고 절박함여기에 죄책감과 슬픔까지 아우르는 상징적 공간으로써 학교는 우리가 성장하는 모든 순간에 여러 형태의 고통과 공포를 아로새겼다아니어쩌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가장 조악하고도 편리한 도구로 이용된 것이 공포는 아니었을까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대체 누구를 위해무엇을 위해.

 

 

 

소화되지 못한이해받지 못한 마음들이 낳은 공포라는 그림자

 

 

   『스터디 위드 X』 속 여섯 편의 소설들은 우리 시대의 학교가 품고 있는 공포들을 비춘 학교 괴담집이다성적이라는 서열로 줄 세워진 아이들, ‘카더라라는 소문이 가장 퍼지기 좋은 교실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괴롭힘과 따돌림 그리고 폭력에 이르기까지학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회적 이슈들을 매우 현실적이고도 기묘한 형태의 이야기로 엮어낸다그 중에서도 권여름의 소설 영고 1830는 학교를 배경으로 과열된 입시 경쟁과 성적 지상주의가 낳은 사회적 공포를 날카롭게 그려낸 작품이다. ‘믿고 맡기십시오아니면 보내지 마십시오.’ 영고(영홍고)는 지역 내 여러 학교에서 보낸 수를 합친 것보다 명문대를 보낸 학생 수가 많기로 유명한 명문고다그만큼 학부모와 아이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인 곳이지만오롯이 성적으로만 반 배치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데다 성적을 내기가 쉽지 않아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오래전부터 영고에는 불쾌하고 무서운 소문이 따라다녔다. 1학년 8반 30즉 전교 꼴찌를 가리키는 ‘1830’에게 해마다 일어나는 기이한 사고와 죽음 때문이었다영고에서 오랫동안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필사적으로 공부해 겨우 영고에 입학한 희준은 반 배치 고사 결과 날명단에서 자신의 번호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다름 아닌 자신이 그 해의 1830이었던 것이다불행해지지 않을 거다살아남을 거다희준은 과거의 1830과 자신은 다를 거라고 의지를 다져보지만 마치 저주의 낙인이라도 찍힌 듯 연거푸 섬뜩한 공포와 마주한다과연 희준은 예고된 추락을 피할 수 있을까그렇게 입시 경쟁이라는 사회 구조가 낳은 지독한 불행의 사슬은 어느 한 개인의 희생으로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소설은 피가 난무하는 공포 영화보다 더 냉혹한 현실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누구도 희준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말을 걸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희준에게 닥칠 불행이 자기에게 옮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기말고사가 다가오자 몸 상태는 심각해졌다조금만 숨을 크게 쉬어도 갈비뼈가 부스러질 것 같았다신경과 근육그것이 무엇이든 툭 하고 끊어질 것만 같았다소리 내어 끙끙대도 누구 하나 바라보거나 묻지 않았다어떻게 이렇게까지 없는 사람 취급을 할 수 있나 싶었다. / 영고 1830」 중에서 107p

 

 

물론 수아가 공부를 빡세게 한다는 건 사실이다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고이자 서울대를 제일 많이 보내는 여고로 유명한 이곳 휘일여고의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아이니까하지만 수아가 쓰러진 건요즘 들어 갈수록 안색이 창백해지고 몸이 말라 가는 건 공부에 지쳐서가 아니다.

수아에게는 귀신이 붙어 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귀신이. / 스터디 위드 미」 중에서 11p

 

 

 



 

 

 

 

  김민령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온전한 성장과 자립이 두려움과 불안을 딛고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 호러가 갖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학교 괴담은 우리에게 잠재된 공포와 불안을 자극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여전히 안전하고 밝은 지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안도하게 만든다고또한 공포가 우리를 엄습하지 않도록 현실을 잘 관리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한다고 말이다따라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재현하되 그 안에서 변화의 움직임과 기꺼이 손을 내밀어 타인의 온도를 감지하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조진주의 소설 그런 애에서는 학교 뒤편에 일명 지니의 구멍이라 불리는 구덩이가 나온다한때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은 여자의 이야기가 떠돌고 있지만아이들은 그 구멍 안에 무언가를 던지고 소원을 빌곤 했다예나는 연기 지망생인 솔희가 SNS에 올린 신체 노출 사진으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학교도 나오지 않은 채 자신과 찍은 영화가 담긴 USB마저 구덩이에 던진 것을 알고 솔희를 찾아간다예나는 죽은 여자가 더 이상 누군가의 욕망을 받아 내는 쓰레기통으로 지내지 않도록 구덩이를 태워버린다그리고 솔희에게 손을 내민다더 이상 괴담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진정으로 자신의 꿈을 응원해줄 친구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예나는 구멍에 갇힌 여자를 꺼내 주고 싶었다더는 누군가의 욕망을 받아 내는 쓰레기통으로 지내지 않도록연기가 되어 바람결에 자유로이 날아갈 수 있도록. / 그런 애」 중에서 150p

 

 

나는 그 붉은색 오래된 벽돌집 앞에서 종종 그 애를 기다리곤 했다그러니까 나는 정말로아이들에게 입증해 줄 수도 있었다그 아이의 집은 하수구가 아니라고이제 이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하자고 말이다동시에 두려웠다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볼까 봐우리 사이를 들키고 같은 취급을 받게 될까 봐.

쟤도 같은 하수구에 사나 보지. / 하수구 아이」 중에서 166p

 

 

 



 

 

 

 

  이 외에도 이유리의 스터디 위드 미윤치규의 카톡 감옥은모든의 벗어나고 싶어서나푸름의 하수구 아이」 모두 성장통으로 상징되는 청소년들의 고통과 공포를 리얼하게 묘사한다소화되지 못한이해받지 못한 마음들이 낳은 공포라는 그림자를 기묘하되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덕분에 학교 괴담은 불안한 십 대들의 현실과 감정을 담은 초상으로가볍게 소비될 장르가 아니라 다양하게 쓰이고 읽힐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이따금 내 안의 두려움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때청소년들이 이러한 작품에 마음을 기울여 보길 추천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