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 ㅣ 자이언트 스텝 2
김서해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7월
평점 :

네 목소리가 내 마음을 밝힌 거야!
감각적인 언어와 감성으로 세상의 모든 ‘해인’과 공명하는 이야기!
누나는 이름이 뭐예요?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뭐예요? 미술은 언제 시작했어요, 어떻게 시작했어요? 글은 언제 쓰고 싶었어요? 소설? 누나는 어떻게 발산해요? 완전히 새로운 감정을 알게 된 적 있어요? 영원의 끝없는 질문은 해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비추는 사람’이라는 이름에 비해 어엿하지 못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서른을 넘긴 나이와 텅 빈 커리어, 학창 시절 추었던 춤과 대학 시절 그렸던 그림, 몰래 쓴 글, 엎질렀는데 흐르지 않은 꿈들로 자책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자신을 해체하려 드는 것만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해인은 이 질문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해인 스스로도 자신을 긍정할 수 없을 때마다 영원의 질문이, 뜻 모를 대화가 자신의 곁을 맴도는 듯한 것이 어쩌지 나쁘지 않다. ‘무의식은 꿈이고 꿈은 푹 꺼진 사랑이에요, 기쁨도 똑같이 예행연습이 많이 있을 거예요, 그래도 자기만의 질서가 있을 거예요, 영원을 갈망하는 마음이 가치를 만드는 거죠, 죽지 않으면 뭐든 될 수 있어요…’ 이런 말들이 해인의 오기를 달래주고 욕심을 받아주고 영원히 자신의 주변에 있을 것처럼 굴었기에.
“슬픔도 리허설이 있구나. 밴드 같네.”
“밴드 같아요?”
“근데, 기쁨도 똑같이 예행연습이 많이 있을 거예요.”
나는 모든 감정이 그런 식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영원의 말을 듣자마자 그럴지도 모른다고 작은 가능성을 열어 두게 되었다. / 34p
무의식은 꿈이고 꿈은 푹 꺼진 사랑이라고 했다. 수수께끼 같은 말에 꽂혀 나는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보았다. 영원이 지갑을 꺼내 교통카드 단말기에 갖다 댈 때 나는 다소 초조하게 물었다.
“부풀어오른 사랑도 있어요?”
영원은 뭐겠어요? 하며 웃었다. 꿈이 아닌 사랑은 다 부푼 사랑이라고 했다. 남이 묻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사랑은 항상 눈에 잘 띈다고, 그런 것들이 바람이 빠지면 무의식 속으로 사라지는 거라고 했다. / 39p


그가 물으면 나에게 답이 생기는 마법 같은 시간
‘질문’은 ‘나’를 늘리며 확장하는 행위다. ‘이미 알고 있는 나’와 ‘미처 알지 못한 나’가 서로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나도, 미처 알지 못한 나도 결국엔‘나’다. 그 어떤 자아도 무용한 것은 없다. 해인은 영원과 나누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바닥까지 가라앉다 못해 늘 얼얼하기만 했던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이해하고, 모른척하고 묻어두기만 했던 스스로와 화해하며 자신만의 질서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깨달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가짜로 점철된 이야기들이 아닌 자신의 글을,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게 된다.
“난 한 번도 내 말들을 믿은 적이 없었어. 그런데 너와 있을 때면, 네 목소릴 지금까지 찾아 헤맸단 걸 알게 돼. 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 / 172p



이렇듯 『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는 ‘자아 찾기’라는 고전 문학의 클리셰를 감각적인 언어로 그려낸 소설이다. 서사로 이야기를 쌓아올리는 익숙한 전개가 아닌,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숨겨두었지만 언제라도 드러내길 바라왔던 한 사람의 내면을 서서히 길어 올리는 듯한 방식이다. ‘과거 어느 인간이 경험한 통증의 기록이 훗날 유사한 질병을 앓는 다른 인간에게 손을 내미는 것. 우리는 이것이 문학의 쓸모이며 문학의 효용’이라던 박혜진 비평가(『언더스토리』)의 말처럼, 김서해 작가는 끝없는 우울감으로 어디에도 나아가지 못하고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던 해인을 통해 또 다른 이름의 해인들에게 손을 내민다. 우리 모두는 얼마쯤 해인을 닮았다는 점에서, 조금씩 자신과 조우하는 해인의 마음과 저절로 공명하게 된다.
“혼자 지어낸 거라도, 이야기는 위로가 돼.” / 148p
반짝이는 첫 소설을 응원하는 <자이언트 스텝>의 두 번째 책으로, 새로운 감각을 선사하는 특별한 작품을 만나 반가웠다. 김서해 작가의 다음 행보를 응원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