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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황모과 지음 / 래빗홀 / 2023년 8월
평점 :

100년 전, 이 뜨거운 역사가 우리에게 건네는 목소리!
형용할 수 없는 이 통증의 기록이 더 이상 돌림노래가 되지 않기를!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9분.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역에 진도 7.9급의 초강력 지진이 발생했다. 관동 지역 일대가 궤멸되다시피 했다. 사망자를 비롯해 행방불명자만 해도 14만 명, 이재민이 340만 명에 달하는 국가 초유의 재난이었다. 그런데 이 혼란스러운 상황과 사회 불안 속에서 이상한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밭에서 작물 훔쳐 갔다, 상점 약탈했다,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도 모자라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낭설이 불길처럼 일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이민자나 유학생을 제외하고서도 그해에만 대략 2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노동자로 이주해 있던 때였다. 지진이 발생한 당일, 경찰이 주도해 유언비어를 공식적으로 확산시키기 전부터도 조선인을 공격하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목격되었다. 다음 날에는 간토 지역 전체에 급조된 자경단과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 간토 지역에서만 무려 1,593개의 자경단이 일제히 활동을 개시했다. “좋은 조선인도 나쁜 조선인도 죽여라.” 그들은 조선인과 마주치기만 해도 무기를 들었다. 조선인으로 의심받았던 중국인이나 조선인을 도운 일본인까지도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을 무참히 죽였다. 무간지옥이 따로 없었다.
새롭게 쓰인다는 것에 대하여
마침 올해가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가 되는 해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부끄럽게도 관동 대지진은 알았으나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지진이라는 거대한 이미지에 경도되어 있었던 것인지, 학살의 피해자들을 위한 조직적인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미처 미치지 못한 것인지, 나는 어째서 까마득하게 이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을까. 실제로 공권력이 독려하여 덮어버린 사건이었으며 대부분이 불문에 부쳐져 아직까지도 진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니 학살의 피해자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줄 길이 사라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다.


이에 작가 황모과는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지금껏 묵인되고, 지워지고, 은폐됨으로써 무수하게 사라진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한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적인 재건을 의미하는 것이 복원이라면, 황모과는 단순히 광기와 혐오의 역사를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이 통증의 기록이 더 이상 돌림노래가 되지 않도록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연거푸 제안한다. ‘타임 루프(주인공 및 주변인물들이 특정 시간대에 갇혀서 똑같은/비슷한 일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하는 상황)’라는 소설적 장치를 통해 과거를 바꾸고 싶은 욕망과 끝내 바꿀 수 없는 역사의 괴리 사이에서 고뇌하고 환기하고 침묵을 부수어 회복을 모색하는 심리적 토대를 마련해나간다.
싱크로놀로지 채널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현장을 관찰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다. 일어난 현상을 되돌릴 수는 없다. 과거의 현상 사이를 탐험할 수 있을 뿐 과거 자체에 변형을 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호는 기대했다. 시스템을 통해 당대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 순간 말을 전할 수 있다면, 최소한 도망치라고 소리라고 지를 수 있다면 한두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이 간 곳에서라도 학살을 막아낸다면 그건 진상을 밝히는 일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 19p
민호는 사료의 신빙성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다 자주 나가떨어지곤 했다. 증거를 가져오라는 사람일수록 진상을 알고도 외면하거나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민호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검증된 증거가 있어야만 증면된다면 100년쯤 지나 생존자들이 모두 사망하고 기억조차 희미해지면 민간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한 일도 없던 일이 되리라는 기대 섞인 믿음과 닿아 있다. 모두의 기억이 퇴색되어 자신들의 죄악까지 희미해지길 원하는 것이다. / 68p
다카야는 이번 생에도 목격했다. 그해 일본인을 살해한 자 몇몇이 지극히 가벼운 형 집행을 받았을 뿐, 조선인을 살해한 자들은 대부분 무죄로 석방되었다. 공권력이 작정하고 공문서를 소멸하는 것을, 생사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유족들이 영영 찾을 수 없도록 치밀하고 오나벽하게 유해를 은닉하는 것을, 어린이들의 수기까지 꼼꼼하게 삭제하는 것을 보았다. 철저하게 기획된 은폐였다. 전부 똑똑히 지켜보았다. / 182p



순사들이 동네를 돌며 확성기로 조선인을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선동된 광기와 위협에 교육받지 못한 하층민들뿐 아니라 지역 유지, 대학 교수, 아름다운 글을 쓰던 작가들도 무기를 들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백정 출신인 조선인 달출은 죽을 줄 알면서도 저들에게 달려들며 속으로 외친다. ‘끈질긴 놈들이라 그냥은 안 죽었다고 알려줘야 허니께! 앞으로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큰일을 저질렀다고 기억하게 해줘야제! 죽어가면서도 눈을 부라려줘야제!’ 그의 울분에, 당시 조선인들이 겪었을 분함과 애통함에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그럼에도 도무지 누구의 묘비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능욕의 흔적들을 뒤로 하고, 새로 새워진 달출의 추모비가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역사는 바뀌지 않아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것이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며 이 불온한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의 메시지가 미더운 이유다.
약자에 대한 혐오가 조장되고 장려되는 한, 민중의 민중에 대한 학살은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