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얼굴에 혹할까 - 심리학과 뇌 과학이 포착한 얼굴의 강력한 힘
최훈 지음 / 블랙피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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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강한, 얼굴이 가진 힘!

얼굴이 내게 말해오는 것들에 관심을 두다 보면 저절로 소통의 기술도 늘어나지 않을까!

 

 

 

 

  “? 뭐라고? 다시 한 번 더 말해줘.”

  요즘 들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면 꼭 한 두 번은 되묻곤 한다. 마스크를 쓰는 게 일상이 된 뒤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아서다. 평소 상대방의 눈이 아닌 입모양을 곧잘 바라보곤 하는 나로서는,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로 의사소통을 하는 게 이렇게 불편한 일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게다가 이사를 하면서 아이의 새 어린이집 선생님과 같은 반 어머니들의 얼굴을 익히는 일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누구 어머니였더라? 분명 인사를 나누긴 했는데 누구의 어머니인지 금방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게 되면서 나름 이로운 점도 있다. 마스크를 벗을 일이 없을 것 같으면 굳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고, 대화를 나눌 때 얼굴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표정을 애써 감출 필요도 없다. 특히 상대방에게 내 외모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건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렇게 되고 보니 얼굴이란 것이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얼굴은 단순히 얼굴이 아니다

 

 

  『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의 저자이자 심리학자인 최훈 교수는 실제로 얼굴은 소통에 능하도록 진화되어 왔다고 말한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신체적 능력이 떨어졌던 인류는 생존에 유리하기 위해 공동생활을 선택했는데, 이 때 꼭 필요한 능력은 동료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냥을 할 때도 동료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협업이 가능했기에 몸과 제스처, 그리고 얼굴을 통한 비언어적 소통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인류는 다양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형태로 얼굴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흰자위다. 인간의 흰자위가 유독 크고 뚜렷한 이유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흰자위를 넓혀갔던, 더 정확하게는 흰자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생존 확률을 높여주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흰자위가 검은자위와 대비를 이루어 검은자위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시선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상대방이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이점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류는 얼굴을 통해 보다 유리한 방법을 취득해나갔고, 그 결과 많은 정보를 얼굴에 담아 정보를 주고받으며 직관적으로 매우 빠른 시간에 정보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얼굴을 통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는다. 신원, 성별, 연령대는 물론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순간의 얼굴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시선을 통해 상대방의 의도를 알고, 그 사람의 얼굴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도 파악할 수 있다. 더러는 성격과 지적 수준, 살아온 역사를 알 수 있을 뿐더러 관상학에 따르면 사람의 미래까지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얼굴의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얼굴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있으며 또 어떠한 방식으로 얼굴을 활용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 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는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서 출발하는 얼굴 안내서같은 책이다. 우리가 매력적인 얼굴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첫인상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지, 얼굴에 관한 다양한 궁금증을 심리학과 뇌 과학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유사한 많은 연구에서 음성 없는 짧은 동영상을 보여주었을 때 참가자들은 등장인물의 외향성, 신경성, 성실성 등 성격 특성을 비교적 정황하게 판단했다. 게다가 정확한 판단에 필요한 시간은 대개 30초에서 1분 정도였다. 1분보다 더 오래 보여준다고 정확도가 높아지지는 않았다. 찰나의 판단은 정말 빠른 시간에 완성되고는 끝이라는 이야기다. / 38p

 

 

반면 몇몇 사람들에게는 사진을 시간제한 없이 보여주고 평가하라고 했다. 그 결과 사진을 0.1초 보여주었을 때와 무제한으로 보여주었을 때 별 차이가 없었다. 첫인상을 형성하는 데는 0.1초면 충분했던 것이다.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첫인상이 형성되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이해할 만하다. 우리는 생존 확률을 높이는 쪽으로 행동하고 판단하는데, 첫인상을 빨리 형성하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낯선 사람이 나에게 우호적인지 아니면 적대적인지 빠르게 판단해야 할 때 첫인상은 판단에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 118p

 

 

 




 

 

 

 

  간혹 사진을 보다 보면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 내가 생각하는 얼굴과 사진 속의 얼굴이 꽤나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내 얼굴의 모습을 심리학 용어로 내 얼굴의 표상이라고 하는데, 내 얼굴의 표상과 실제 얼굴을 비교한 연구를 살펴보면 내 얼굴의 표상은 실제 얼굴과 꽤 차이가 난다고 한다. 우리는 눈, , 입을 실제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위쪽과 아래쪽으로 구분했을 때 위쪽 얼굴은 더 작게, 아래쪽 얼굴은 더 크게 지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이에 대해 뇌 과학자들은 눈, , 입이 상세한 처리가 필요한 중요 부위이기 때문에 뇌의 더 많은 영역이 눈, , 입을 담당해 더 크게 지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 중에서 왼쪽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감정을 느끼고 매력을 평가하는 역할을 뇌의 우반구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타인이 내 얼굴을 보고 매력을 평가할 때는 정작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 얼굴이라는 사실이다. 매력을 평가할 때는 우반구가 작용하니, 왼쪽 눈으로 들어오는 얼굴이 더 중요하고, 타인과 내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으면, 상대방 왼쪽 눈에 비치는 내 얼굴은 오른쪽 얼굴이기 때문이다. 억울하게도 더 매력적인 내 왼쪽 얼굴이 아닌, 오른쪽 얼굴이 내 얼굴 매력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화장이나 얼굴을 매만질 때는 오른쪽 얼굴에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이를 이용해 저자는 특정 이미지를 어필하고 싶을 때는 왼쪽보다 오른쪽을 중심으로 강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이를 테면 갓난아이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강하게 어필하고 싶어 머리에 리본을 단다고 하면, 왼쪽 머리보다는 오른쪽 머리에 다는 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옆에 있는 사람의 매력이 높건 낮건 상관없이, 일단 여러 명이 함께 사진을 찍으면 내 매력이 높아져 보인다는 점도 재미있다. 이를 치어리더 효과라고 하는데, 여러 명이 함께 제시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고, 그 집단의 표상을 구축한다고 한다. 이때 집단의 표상은 집단 구성원의 평균 얼굴과 유사하게 형성된다. 그러면 우리가 평균적인 얼굴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집단 구성원은 그 집단의 표상과 유사하므로 (그 집단의 표상이 그 구성원의 평균 얼굴이니까) 집단에 속한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또 얼굴에 있어서 눈썹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눈썹이 진하면 기본적으로 얼굴의 대비 정도가 높아지는데, 대비가 높은 얼굴은 더 매력적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섀도를 진하고 넓게 칠하는 스모키 화장 역시 눈과 눈썹의 동화 효과를 강화하고, 그 결과 눈 크기가 눈썹 위치까지 확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델뵈프 착시를 불러와 눈이 커진 듯한 착시를 발생시킨다고 한다. 여기에 하얀 얼굴, 빨간 입술, 안경 활용법 등 얼굴을 어떻게 보이게 하느냐에 따라 타인에게 나의 인상을 달리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를 읽다보면 얼굴은 생각보다 나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소통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을 읽고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를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얼굴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을뿐더러, 겉모습으로 상대방을 확신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를 무사히 극복하고 온전히 누군가의 얼굴을 가까이 마주할 수 있는 날, 이 책으로 하여금 저 사람이 나에게 보내는 눈짓과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다 가까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보시길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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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2 - 단골손님을 찾습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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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도 나오지 않을까, 미리 기대하며 읽게 되는 소설!

꿈꿀 수 있는 오늘이 있음에,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는 내일이 있음에 설렌다!

 

 

 

  이곳은 먼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수면에 관련된 상품을 판매하면서 발달해온 도시다. 그 중에서도 달러구트의 꿈 백화점은 유독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이 도시의 랜드마크다.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는 이곳엔 층마다 다양한 장르의 개성 넘치는 꿈들이 구비되어 있어 오늘도 꿈을 구매하고 싶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해, ‘을 판매하는 달러구트의 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편의 동화 같은 판타지를 선보이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드디어 두 번째 책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 책이 신입사원 페니가 달러구트의 꿈 백화점에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다면, 두 번째 책은 그로부터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본격적인 꿈 산업 종사자로 발돋움하게 된 페니가 민원관리국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로 여러 꿈 제작사와 제작자들이 한 데 모여 있는 컴퍼니 구역 내에는 꿈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곳이 있다. 이곳이 바로 민원관리국이다. 달러구트를 따라 민원관리국에 처음 방문하게 된 페니는 한껏 설레면서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장소라고 경고한 매니저 모그베리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이곳에서는 총 3단계의 민원을 해결하는데, 잠을 개운하게 잘 수 없는 정도가 1단계라면 2단계는 일상생활에 피해가 갈 만큼 불편한 정도이고, 3단계는 1, 2단계의 직원들이 처리하지 못해서 국장님이 직접 관리해야 할 정도의 민원이라고 한다. 안내를 받아 국장실로 향하던 페니는 만드는 사람이나, 무작정 파는 사람이나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는 등의 불만 사항을 늘어놓는 민원인들의 살벌한 말투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자신을 팔락이라고 소개하는 직원 역시 매일같이 밀려드는 민원에 지칠 대로 지쳐 페니 일행에게 냉랭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페니는 달러구트로부터 1층 프런트에 온 3단계 민원을 맡아 보지 않겠느냐는 상당히 곤란한 제안을 받는다.

 

 

 

선심 쓰는 게 아니라, 다양한 꿈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파는 사람이 있으니까 손님들이 잠든 시간 동안 여러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당신들이 없으면 꿈을 살 수 없을 테니 불만을 품지 말라는 건가요? 꿈 때문에 지친 사람들이 이렇게 분명히 존재하는데도요? 당신들은 하하 호호 기분 좋은 백화점에서 구김살 없이 일한 티가 나는군요.” / 72p

 

 

 

  달러구트의 백화점에서 꿈을 판매한 지 1년이 되었지만 이렇다 할 목표가 없던 페니는 사실 올해도 작년과 같은 한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웨더 아주머니가 시키는 일만 할 수 있을 수는 없었다. 신입사원이라는 무적의 방패 뒤에 숨으면 어떻게든 해결되던 일들도 더는 기대해선 안 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계획이 있는 직원들과는 점점 격차가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페니는 판매자들의 무심함으로 인해 민원관리국까지 가게 되는 손님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여러 가지의 이유로 달러구트의 백화점을 더 이상 찾지 않고 있는 단골손님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달러구트가 제안한 민원을 해결해보기로 마음먹는다.

 

 

 

페니, 우리가 벌어들인 돈은 손님들의 귀중한 감정과 맞바꾼 것이니까 이 무게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 44p

 

 

하지만 가게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가 아닌 것이, 792번 손님이 꿈값으로 낸 감정은 같은 꿈을 사간 그 누구보다 풍부하고 다양했다.

792번 손님이 지불한 감정은 다른 사람이 지불한 쾌적함’, ‘놀라움’, ‘신비로움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살아 있는 열대우림을 꾸고 나서 소량의 상실감을 함께 지불한 기록이었다. ‘상실감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가 이토록 복잡한 감정을 느낀 것은 왜일까? / 87p

 

 

 



 

 

 

 

  이처럼 달러구트 꿈 백화점 2는 신입사원이었던 페니가 꿈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렸거나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꿈 산업 종사자로서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시력을 잃으면서 일상도 잃고 꿈마저 꿀 수 없게 된 손님이 다시 자신만의 특별한 꿈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더 이상 루시드 드림을 꾸지 못하게 된 손님을 위해 전설의 꿈 제작자인 오트라를 찾아가 그녀만이 만들 수 있는 특별한 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은퇴 후 무기력증에 빠진 여자 손님에게는 추억이라는 꿈을 선물함으로써 지금의 행복을 충실하기 위해 현재를 살고, 아직 만나지 못한 행복을 위해 미래를 기대해야 하며,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행복을 위해 과거를 되새기며 살기를 바라는 가슴 뭉클한 응원을 전한다.

 

 

 

당신과 사는 이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잠을 매개로 이어져 있는 건, 신이 주신 다정한 운명일지도 몰라요. 서로 어떤 말을 나누어도 좋을 꿈속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잖아요.” / 99p

 

 

언제나 인생은 99.9%의 일상과 0.1%의 낯선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기대되는 일이 없다고 슬퍼하기엔 99.9%의 일상이 너무도 소중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도, 매일 먹는 끼니와 매일 보는 얼굴도.

그제야 여자는 내 삶이 다 어디로 갔냐 묻는 것도, 앞으로 살아갈 기쁨이 무엇인지 묻는 것도 실은 답을 모두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278p

 

 

추억을 만든 것은 과거의 손님 본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꿈의 제작자는 손님이지요. 우리는 모두 그 어떤 제작자보다 훌륭한 꿈 제작자예요. 제작하는 사람도 판매하는 사람도 매일을 살아가는 당신 없이는 훌륭한 작품을 완성할 수 없답니다.” / 290p

 

 

 



 

 

 

 

  전 편이 그러했듯 세탁물을 들고 다니는 녹틸루카, 전설의 꿈 제작자들, 하늘을 나는 꿈을 만드는 레프라혼 요정들, 특수 제작된 단골손님들의 눈꺼풀 저울 등 꿈의 도시를 정교하게 이끌어가는 판타지 요소들은 여전히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여기에 특유의 발랄함과 따뜻한 정서는 한 편의 동화처럼 보드랍게 이야기를 품는다. 무엇보다 꿈꿀 수 있는 오늘이 있음에,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는 내일이 있음에 읽는 내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것이 이 책의 다음 편을 또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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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 - 내 것이 아닌 아이
애슐리 오드레인 지음, 박현주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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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이를 위한 완벽한 엄마가 되기를 요구받는 모성의 현주소를 예리하고 가차 없는 시선으로 그려낸 소설!

 

 

 

  아이가 갑자기 바닥에 드러눕더니 세상이 떠나가라 울기 시작했어. 그것도 막 초록불이 깜박이기 시작한 횡단보도 위에서 말이야. 나는 순간 온몸의 핏기가 싹 사라지는 듯했다가 일제히 얼굴로 확 몰려드는 것을 느꼈어. 8차선이나 되는 도로 한복판에서,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 서 있던 운전자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거든. 딱하게 바라보는 듯한 시선 말이야. 그렇게 아이를 끌어안고 강제로 뛰다시피 건너오고나면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나는 얌전히 갈 수 있을까를 걱정해. 겨우 수십 분에 불과한 시간 동안에 아이의 감정은 수시로 변하기 마련이거든.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사람들은 말해.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이 맘 때쯤의 아이들은 다 그렇다고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하지. 나도 모르는 건 아니야. 언젠가는 이 아이도 초록불이 바뀌기 전에 빨리 횡단보도를 건너야 안전하다는 것쯤은 알게 되겠지.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내가 마주해야만 하는 수많은 곤란들은 나를 지치게 해. 그리고 세상은 모성이라는 아주 간단하고 거창한 이름으로 그 모든 것들을 감싸 안아야 한다고 말하지. 그게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

 

 

 

모성이 세상에 던지는 질문

 

 

  “어째서 내가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블라이스는 한시라도 빨리 우리의 아기를 갖고 싶다는 남자친구 폭스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동생을 예쁜이라 다정하게 부르고, 주말에 격주로 집에 가서 아버지를 도우며 따뜻한 포옹을 나누는 그의 완벽한 가족 사이에서 그녀는 불안함을 느낀다. 블라이스는 그녀의 외할머니인 에타에 이어 엄마인 세실리아로 이어져 내려온, 모성 결핍이라는 유전자가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칠 거라는 생각에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폭스에게 어울리는 아내가 되고 싶었고,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기에 그녀는 완벽한 아내가 되고자 노력한다. 어쩌면 자신만은 엄마와는 다르리라는 확고한 사실, 바로 그러한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내가 더 많은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코 캐묻지 않았어.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니 두려웠을 테지. 나도 이해해. 우리는 모두 서로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질 자격이 있지. 모성도 마찬가지야. 우리 모두 좋은 엄마가 있기를, 그런 사람과 결혼하기를,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 20p

 

 

우리는 이미 이전에 여러 번 이 얘기를 했었지. 내가 다른 사람들의 아이를 안거나 무릎을 꿇고 놀아주고 있노라면 당신은 신이 났어. 당신 천부적이야. 하지만 상상으로 그려본 쪽은 나였어. 모성. 그건 어떤 것일까. 어떤 기분일까. 당신에게 잘 어울려.

나는 달라지려 했어. 그런 일들이 쉽게 되는 다른 여자들과 같아지려 했어. 내 엄마가 되지 못했던 건 뭐든 되려 했어. / 35p

 

 

 




 

 

 

 

  하지만 블라이스는 아이를 자신의 몸에서 밀어내는 순간, 격렬한 고통과 함께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초현실적인 시간의 우주 속에서 맥박을 나눈 단둘만의 역사가, 경이로운 감각이 이따금 마음을 뭉클하게 했지만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마는 아이의 생존을 책임져야만 하는 절대적인 역할로 돌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내 그녀는 이 관계 속에서 살아나갈 수 없는 유일한 엄마가 되는 기분을 느낀다. 항문부터 질까지 회음부를 봉합한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 유일한 엄마. 젖꼭지를 면도날로 베는 것 같은 고통을 주는 신생아의 잇몸과 싸워 이길 수 없는 유일한 엄마. 잠을 못 자 머리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유일한 엄마. 커리어를 내려두고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액상 유산균을 주는 일에만 집중해야 하는 엄마. 아이를 낳고 축 늘어진 피부에 마시멜로 같은 몸뚱이를 가진 엄마. 자신과 있을 때만 우는 아이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엄마. 딸을 내려다보고 제발 꺼져버려, 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엄마. 아이를 아기 침대에 내려놓고 한밤에 떠날까 생각하는 엄마. 엄마와 아이란 서로를 원해서 태어난 존재지만, 엄마가 짊어져야 할 모든 현실의 무게에 점점 지쳐간다.

 

 

 

우리는 몇 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어. 그런 다음 여자가 말했어. “애가 나한테 별안간 생긴 것만 같아요. 내 세계로 쿵 떨어져서 가구들을 다 넘어뜨린 것처럼.”

그렇죠.” 나는 그 여자의 아이가 무기라도 되는 양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어. “아이를 원했고 몸 안에서 키웠고 내보내기도 했지만 별안간 생긴 일이기도 하죠.” / 65p

 

 

나는 여전히 너무 피곤했어. 너무 신경이 곤두서서 당신 어머니를 우리 집에 내내 모실 수가 없었지. 어머니에 대한 나의 감정은 복합적이었어. 어머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어. 누구의 도움이라도 필요했지. 그렇지만 어머니의 능력에 대해 분개심을 품게 되기도 했어. 당신의 인생 내내 당신의 어머니가 모든 것을 너무 쉬운 일처럼 처리했다는 것이 싫었어. / 111p

 

 

 

  그런 가운데 블라이스는 딸 바이올렛으로부터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아이가 유독 아빠에게만 애정을 보이더니 급기야 엄마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바이올렛이 미끄럼틀 위에서 발을 걸어 넘어뜨린 친구가 죽는 끔찍한 일까지 발생한다. 불과 10, 그 잠깐의 순간에 벌어진 사고를 보게 된 블라이스는 이때부터 대체 자신의 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경계하게 되고, 이후 둘째 아이 샘의 죽음에도 블라이스가 관련이 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딸이 내 팔을 잡아 당겼어요. 나는 뜨거운 차에 데었어요. 내가 유아차를 놓아버렸어요. 그러자 딸이 그 유아차를 길 위로 밀었어요. 그녀는 경찰에게, 남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처럼 소설 푸시는 완벽한 가족을 이루길 꿈꿨던 한 여성이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지 못함으로써 겪게 되는 모성의 딜레마와 딸의 손끝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죽음의 서스펜스를 정교하게 엮어낸 심리스릴러다.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이전과는 다른 삶으로 돌입하게 되는 나의 시간. 그리고 매순간 아이를 둘러싼 세상으로부터 도전받는 듯한 느낌. “당신은 걔 엄마잖아.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그뿐이야.” 완벽한 아이를 위한 완벽한 엄마가 되기를 요구받는 모성의 현주소를 예리하고 가차 없는 시선으로 그려낸 것은 물론, 자신이 낳은 아이의 손에서 일어난 비극이 과연 그녀만의 망상일까, 혹은 진실일까 혼란의 혼란을 거듭하며 마지막까지 극적 긴장감을 잃지 않는 수작이다. 여기에 소시오패스로 의심될 만한 딸 아이의 공격성이 바로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괴로워하는 엄마 블라이스의 심리까지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모성의 이면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지우는 과도한 무게감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잠 못 드는 밤이면, 엿들은 이야기를 재생하며 점점 이해하기 시작했어. 우리는 무언가로부터 자라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씨앗에 실려 온 것이며, 나는 엄마가 일군 정원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 72p

 

 

내가 마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엄마 중 한 사람이 말했어. “시설에 가면 교도관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해요. 변호사들도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해요. 모두가 내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쳐다봐요. 하지만 나는 아무 짓고 안 했는데.” 그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었어.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안 한 걸까요?” 잠시 생각한 후에 한 엄마가 입을 열었어. / 217p

 

 

 



 

 

 

 

  오늘도 나는 아이의 손에 들려주지 말아야 할 것을 들려준 것은 아닌지, 아이가 흘린 눈길에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이 아이의 마음에 평생 상처로 남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이 모든 게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와 관련된 그 모든 것에 시험받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나만 그런 거 아니죠? 당신들도 그런 거죠?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하는 말을 삼켜가면서.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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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2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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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청춘의 감수성을 치열한 자기 고백과 함께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다자이 오사무의 첫 창작집!

 

 

 

나는 이 단편집 한 권을 위해 십 년을 허비했다. 만 십 년, 보통 시민과 마찬가지로 산뜻한 아침 식사를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책 한 권을 위해 몸 둘 곳을 잃은 채 끊임없이 자존심에 상처 입고 세상의 휘몰아치는 찬 바람을 맞으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 혀를 데고 가슴을 태우고, 내 몸을 도저히 회복되기 어려울 만치 일부러 망가뜨렸다. 백 편이 넘는 소설을 찢어 없앴다. 원고지 5만 매. 그리고 남은 건 겨우 이것뿐이다. 이것뿐. ()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단편집 만년은 해가 갈수록 더욱 더 선명하게 그대의 눈에, 그대의 가슴에 침투해 갈 게 틀림없음을. 나는 오직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 ().”

 

 

 

  『만년을 읽기 전엔, “오직 이 한 권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는 그의 말이 오롯이 작가의 자부심에서 비롯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 단편집을 끝으로 자살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는 또 다르게 읽힌다. 실제로 다자이 오사무는 이 소설집이 자신의 유일한 유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제목을 만년(晩年)’이라 지었다 한다. 죽음을 각오한 이십 대 초반의 작가가 유작을 염두하고 집필했다면 거기엔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과 세계와의 부조화, 자신을 끝까지 괴롭힐 수밖에 없는 집요한 반성 같은 게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작가정신이 일본과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여러 세대에게 영감을 주고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이쯤 되면 만년(晩年)’이 아니라 만년(萬年)’이라 할 만하다.

 

 

 

흔들리는 존재를 끌어안는 영원한 청춘 문학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 집안 출신에 대한 부끄러움, 숙모와 보모의 손에서 성장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정서적 결핍, 자살 기도 후 동반 여성만이 죽은 데 대한 죄책감 등 유년시절부터 청년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지배했던 일련의 사건은 그의 문학 세계를 이루는 원형이 된 듯하다. 때문에 총 열 다섯 편의 단편 중 자전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이 다소 눈에 띈다. 소설 죽을 생각이었다. 올해 설날, 옷감을 한 필 받았다. 새해 선물이다. 천은 삼베였다. 회색 줄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여름에 입는 옷이리라. 여름까지 살아 있자고 생각했다로 시작한다. 특별한 스토리를 갖추었다기보다 일상의 단상에 가까운 이 소설은 그날그날을 질질 끌리다시피 지내고있는 오늘과 나는 평생 이런 우울과 싸우다 죽게 되겠지같은 상념들이 한 편의 시처럼 엮여 있다. 외롭고 쓸쓸했던 유년시절, ‘뾰루지가 욕정의 상징이라는 생각에 눈앞에 캄캄해질 정도로 창피할 만큼 예민했던 학창시절, 마음을 두고 있으면서도 먼저 다가가지 못했던 첫사랑, 학교 기피증이 심해지는 와중에도 수재라는 명예를 지키려 애썼던 일화들이 담긴 추억은 다자이 오사무의 정서적 근간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나아가 만년의 중심이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어릿광대의 꽃에서는 좌익 운동을 하다 술집 여성과 바다에 투신자살을 기도한 뒤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과 예술가로서의 고뇌, 청년 다자이의 의식과 자기 고백이 요조라는 화자를 통해 보다 명징하게 드러난다.

 

 

 

바보! 뭘 지껄이고 있어. 도대체가 넌 너무 뻔뻔스러워. 하긴 사실 너나 나나 생산적인 일과는 도통 거리가 먼 인간이지. 그렇다고 해서 결코 마이너스 생활을 한다고 생각지 않아. 넌 대체 무산 계급의 해방을 바라는 거야? 무산 계급의 대승리는 믿어? 정도의 차는 있지만 우리는 부르주아지에 기생하고 있어. 그건 확실해. 하지만 부르주아지를 지지하는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달라. 프롤레타리아트 하나에 대한 공헌과 부르주아지 아홉에 대한 공헌이라고 말했는데, 뭘 가리켜 부르주아지에 대한 공헌이라는 거야? 굳이 자본가의 주머니를 두둑이 채워 준다는 점에선 우리든 프롤레타리아트든 마찬가지야.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서 사는 게 배반이라면, 투사는 어떤 신선이 되는 거지? 그런 말이야말로 극단주의라는 거야. / 중에서 15p

 

 

청년들은 언제나 진정으로 논의하지 않는다. 서로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아야지 하고 최대한 조심하면서, 자신의 신경도 소중히 감싼다. 허튼 경멸을 당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한번 상처 입으면, 상대를 죽일까, 내가 죽을까, 기어이 이런 생각까지 골똘이 한다. 그래서 다투는 걸 싫어한다. 그들은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많이 알고 있다. 아니라는 한마디 말조차, 열 가지 쯤은 너끈히 가려 써 보이리라. 논의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타협의 눈동자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웃으며 악수하고는, 속으로 서로에게 함께 이렇게 중얼거린다. 멍청한 녀석! / 어릿광대의 꽃중에서 128p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왁자지껄 포복절도한다. 웃는 얼굴을 만드는 것은, 청년들에게 숨을 내쉬는 것큼이나 손쉽다. 언제부터 그런 습성이 배기 시작했을까? 웃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 웃어야 할 어떤 사소한 대상도 놓치지 마. 아아, 이거야말로 탐욕스러운 미식가의 덧없는 편린 아닐까? 그런데 슬프게도 그들은 진정으로 웃지 못한다. 몸을 가누지 못할 만치 웃어 대면서도, 자신의 자세에 신경 쓴다. 그들은 또한 남을 잘 웃긴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남을 웃기고 싶어 한다. 그건 어쨌든 허무한 마음에서 시작되었겠지만, 좀 더 깊숙이 뭔가 작심한 마음가짐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희생정신. 얼마간 자포자기 적이고, 이렇다 할 목적도 갖지 않는 희생정신. / 어릿광대의 꽃중에서 132p

 

 

 




 

 

 

 

 

  수차례에 걸친 자살 시도 때문일까.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라고 하면 온통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로 가득할 것 같지만, 유머와 풍자의 기교를 활용하여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도 있다. 고독한 산골소녀가 자그마한 붕어로 변신해 마침내 자유를 찾는 어복기, 동물원 안에서 길들여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일본 원숭이가 야생에서 자란 원숭이의 독려에 탈출을 시도하는 원숭이 섬, 세입자인 세이센으로부터 일 년이 넘도록 방세를 받지 못하는 주인의 이야기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등이 그러하다. 사실 만년을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이른바 불안, 죽음, 방황, 허무 같은 세기의 정서가 다소 과격한 형태를 띄지 않을까 예상했던 나로서는 일종의 반전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속에서 매번 새로운 일을 시도할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실상은 월세 한 번 내지 못하는 처지의 세이센과 얼마 안 되는 유산으로 그럭저럭 살면서 변변한 생활력조차 없는 ’, ‘서로 다른 구석이 한 점이라도, 있나?’ 하고 자조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낭만적 현실 도피와 생의 허무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어루만져지는 듯하여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다들 모르는 거야?”

그는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밑에서 대답했다.

알기는! 알고 있는 건 아마, 나하고 너뿐일걸.”

어째서 도망치지 않아?”

넌 도망칠 거야?”

도망쳐.” / 원숭이의 섬중에서 110p

 

 

나는 그만 불안해지고 말았다. 그가 내게 영향을 주고 있나? 내가 그에게 영향을 주고 있나? 어느 한쪽이 뱀파이어다. 어느 한쪽이 알게 모르게 상대의 기분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그의 표변을 기대하고 방문하는 내 기분을 그가 알아차린 탓에 그러한 내 기대가 그를 얽매어, 더욱더 변화해 나가야만 한다고 그가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이리저리 생각하면 할수록 세이센과 나의 체취가 뒤엉키고 서로 반사하는 것 같아, 나는 가속도로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중에서 249p

 

 

인간 만사 거짓은 진실, 문득 그 말이 이제 비로소 피부에 착 달라붙듯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아아, 이건 코미디의 정점이다. 오손의 뼈를 정성껏 묻어 주고 나서 사부로는 오늘부터 한번 거짓 없는 생활을 해 보자고 마음 먹었다.

() 거짓 없는 생활. 그 말부터 이미 거짓이었다. 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한다. 그것도 거짓이었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마음에 거짓이 있으리라. 저것도 더러워, 이것도 더러워, 하고 사부로는 매일 밤 잠 못 이루며 괴로워했다. 사부로는 드디어 한 가지 태도를 발견했다. 무의지 무감동, 백치의 태도였다. 바람처럼 사는 것이다. / 로마네스트중에서 289p

 

 

 



 

 

 

 

  20세기를 풍미한 일본 근대 문학의 아이콘이 여전히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방황하는 청춘의 감수성을 치열한 자기 고백과 함께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그의 언어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만년은 청년 다자이의 첫 창작집이자 문학세계의 토대가 된 원형 같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꼭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실격을 읽어 보기 전이라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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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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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오늘도 묵묵하게 자신의 힘을 키워나가고 있는 세상의 불펜들에게!

누군가가 지킨 필사적인 아름다움이 우리 각자의 조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되기를!

 

 

 

 

  그는 야구를 사랑한다고 했었다. 누구보다 긴 시간 동안 꾸준한 활약을 해 왔기에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선수였다. 통산 135승에 빛나는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그는 영구결번이라는 명예와 함께 레전드로 팬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승부조작을 했단다. 현금 5억 원에 부정청탁을 받은 혐의로 그가 법정으로 향하는 장면은 그를 사랑했던 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것도 모자라 숙소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방역수칙을 어긴 선수들이 코로나19에 확진되면서 한국 야구 역사상 리그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거짓 진술 및 은폐 의혹, 특정 팀 봐주기식 리그 중단 사태에 관한 논란은 그동안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킨 선수들과 팬들을 무시한 처사로 야구 팬 전체의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 소설 불펜의 시간속 주인공으로, 10여 년 간 팀의 불펜 투수였던 혁오는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나치게 좁은 프로의 문과 소수의 선수가 연봉을 독식하는 구조,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구단, 프로에 데뷔하지 못한 어린 선수들과 평생을 바친 일에서 물러나야 하는 사람의 좌절을 함께 책임지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는다면 야구장은 머지않아 경마장이 될 거라고. “이미 경마장인가요?” 하고 되묻는 그의 말이 너무나 뼈아픈 요즘이다.

 

 

 

커브, 그 작은 반등과 궤적의 의미

 

 

  불펜(bullpen). 야구에서 구원 투수가 경기 중에 준비 운동을 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앞서 선발로 출장한 투수를 대신하여 공을 던질 계투조를 이르기도 한다. 야구라는 스포츠를 두고 투수 싸움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경기 운용에 있어 투수는 절대적이다. 특히 해당 경기의 엔트리에 있어 선발 투수는 경기의 승패를 미리 짐작해볼 수 있는 가늠좌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장 주목받는 선수 중에 하나다. 반면 계투조인 불펜 선수들의 경우 선발 선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는 주목을 덜 받는 게 사실이다. 경기가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 그날의 등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이닝 혹은 단 한 타자를 막기 위해서, 이 경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 오늘도 묵묵히 뒤에서 준비한다. 소설 불펜의 시간은 바로 이런 불펜들에 관한 이야기다.

 

 

 

혁오는 벤치에 앉아 쉬면서 후배 투수가 실점하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 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야구장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여덟 명의 수비수가 마운드에 모여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도 보았고, 과중이 마지막 투수에게 보내는 단단한 박수 소리도 들었다. 환호는 내 몫이 아니니까. 혁오는 마운드로 올라가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후배 투수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 32p

 

 

넌 프로 선발 1순위가 확실하니까.”

혁오는 우리랑 다르잖아.”

선배님 같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왜 아무도 나의 노력은 봐주지 않는 걸까? 나의 과정은 왜 못 본 척하는 걸까? / 47p

 

 

 

  야구 명문 중학교 출신의 혁오는 완벽한 투구폼으로 타고난 재능을 갖춘 투수다. 그는 이미 프로 선발 1순위가 확실시되는 야구계의 촉망 받는 선수였고, 이를 입증하듯 고교 전국체전 결승전에서 20의 완봉승을 거두며 자신의 손으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프로 데뷔 경기에서 단 하나의 스트라이크도 잡지 못한 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고, 두 번째 경기에서도 볼넷을 연발하며 교체된다. 설상가상으로 9회에 등판하기만 하면 아웃 카운트를 잡지 못하는 트라우마까지 생기면서 그는 탄탄대로일 것 같던 자신의 인생이 의도치 않은 커브를 그리기 시작했음을 직감한다.

 

 

 

  사실, 혁오에게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하나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열등감을 자기고 있었던 친구 진호가 혁오와의 승부에서 진 다음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게 발단이었다. ‘너의 승리가 다른 사람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던 엄마의 당부가 화근이었을까, 혁오는 교통사고로 포장된 진호의 죽음이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 날 이후 혁오는 꽤 오랫동안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고, 진호의 환영은 항상 중요한 순간에 타석에 드러내 번번이 그를 괴롭혔다. 이를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완벽한 투구폼을 갖춘 그가 왜 9회만 되면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는 공을 던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승부조작에 가담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긴장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먹고 던진 네 번째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걸 지켜보며 혁오는 탄탄대로일 것 같던 자신의 인생이 의도치 않은 커브를 그리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툭투두둑, 툭툭툭. 곳곳에서 사람들의 기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혁오는 두 번째 타자와 세 번째 타자에게도 볼넷을 내주었다. 그다음 타자에겐 안타를 맞았다. 혁오가 단 하나의 스트라이크도 잡지 못하고 다섯 번째 타자에게도 볼넷을 내어주자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코치가 걸을 때마다 투욱, 투우욱, 투우우욱. 떨어진 기대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 35p

 

 

객관적인 조건만 보면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이기려는 욕심이 강한 진호는 프로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최고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비교 대상을 다 이긴다고 해서 최고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경쟁 상대를 이기는 선수의 첫 번째 단계에 불과했다. 그다음엔 약점이 있는 자신, 나약한 마음을 가진 자신, 다른 걸 욕망하는 자신, 안주하는 자신, 자만하는 자신,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자신, 자유롭지 못한 자신, 자신을 한계 짓는 자신……. 그 외에도 도망갈 수 있는 자신과의 승부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 41p

 

 

 

  한편, 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꿈을 접어야 했던 기현은 이제 여성 최초의 스포츠신문 편집장이 되겠다는 목표로 스포츠신문사에 입사한다. 우연히 오빠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돕다가 전·현직 야구인 4명이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속에서 김승일 선수의 승부조작이라는 특종을 얻게 된다. 김승일은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써야 할 위기에 처하자 구단이 어떻게 꼬리 자르기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야구선수가 브로커의 유혹을 받고 있는지, 자신의 조작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작고 하찮은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며 자기가 브로커에게 이름을 들은 선수만 해도 다섯이라고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속에 권혁오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9회에만 오르면 볼넷을 남발하는 권혁오가 승부조작에 가담했을 거라는 의심은 분명 합리적이었고, 특종에 목이 마른 기현은 그렇게 권혁오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작년 김승일 사건에 이어 올해 또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이 야구에 완전히 등을 돌릴 가능성이 있었다. 이건 타이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성적이 좋지 않다고 해서 떠나는 팬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팬들은 져도 계속 응원한다. 아니 질수록 더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진심으로 응원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란 기대가 야구장에선 아직 작동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승부조작은 기만이고 배신이다. 팬을 쫓아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 153p

 

 

자기도 초등학교 때 야구를 했었는데 여자를 받아주는 중학교 야구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도나 질서가 있을 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야구를 하는 여자에겐 기울어진 운동장조차 없다고 말했다. “농구나 배구는 여자 리그가 있잖아요. 야구는 여자 리그가 없어요. 남자만 프로가 될 수 있죠. 권혁오 선수가 그런 식으로라도 야구를 계속 할 수 있었던 건 적어도 운동장은 있었기 때문이에요.” / 188p

 

 

 




 

 

 

 

  "이 주임은 누구처럼 살고 싶어?” 박 부장의 말에 준삼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TV 속에 나오는 권혁오를 바라본다. 별로 잘 나가지도 않는 계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말을 진짜로 믿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다. 사실 준삼은 한때 야구선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중학교 동창이었던 혁오의 압도적인 기량과 타고난 재능을 본 뒤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 가능성만 보고 무작정 시간을 쏟아 붓기엔 현실은 불안했다. 이후 학교를 졸업하고 투자증권회사에 입사한 준삼은 예외적으로 살 자신이 없고, 독보적으로 살 자신도 없었기에 그저 묵묵하게 여러 잡무를 도맡아 하며 사회가 제시하는 틀에 자신을 맞춰 산다. 그렇게 역전 한 방을 기대하기는커녕 그저 그런 삶이라도 살아보려는 그이지만, 구조조정을 앞두고 자기 기회만 도모하는 이들 사이에서 점점 구역질을 느낀다. 그나마 동경했던 혁오가 볼넷을 주고도 그저 그렇게 만족하는 이유가 자신의 삶까지 초라하게 만들까 봐 두려워진다.

 

 

 

상사가 해 오라는 건 많고,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은 신입사원들이 여직원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는다. 결재 시스템이나 문서 작성법부터 회의 준비나 거래처에 전화하는 법까지 모든 업무의 기초를 여직원에게 배운다. 그러고 나면 신입사원들은 불친절한 지시만 내리는 상사보다 실무에 능숙하고 친절한 여직원의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 시간이 지나 신입 딱지를 떼고 승진할 때는 여직원보다 일을 못 하는 자신이 먼저 승진하는 걸 미안해한다. 회사의 진급 시스템이 엉망이라며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분노의 크기는 언제나 작아서 하룻밤 자고 나면 사그라든다. / 79p

 

 

준삼은 뻔함이 주는 안정감을 가능한 한 오래 누리고 싶었다. 문제는 악취였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구린내를 맡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썩은 내가 날 줄은 몰랐다. 예측 범위를 넘어서는 냄새였다. 월급이 주는 안정을 누리려면 월급과 세트로 묶인 악취와 모욕도 견뎌야 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악취는 독해질 것이고, 감내해야 하는 모욕의 양도 많아질 것이다. 어느 순간엔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욕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건 또 얼마나 끔찍할까? / 175p

 

 

자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인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굴절된 이야기를 받아 적다 보니, 쉽게 갈 수 있는 직선 길을 버리고 구불구불한 길을 손수 만들며 걸어온 사람의 고백을 듣다 보니, 두려워졌다.

나는 내게 주어진 것만 욕망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남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제대로 된 욕망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게 아닐까? / 192p

 

 

 



 

 

 

 

  제26회 한겨례문학상 수상작인 불펜의 시간은 이렇듯 야구가 전부였던 세 명의 주인공을 통해 경쟁과 성공, 독식과 성과주의, 조작과 집단 이기주의로 점철된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배제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묘파한 소설이다. 문제는 그 시스템이 어떤 거대한 세계 속에서 나약한 한 인간이 철저히 내팽겨쳐지는 구조가 아니라 바로 내 옆 사람, 내 주변에 도사리고 있던 아주 작은 비열함이 모이고 모여 서로를 야금야금 균열을 내는 구조란 사실이다.

 

 

 

  때문에 소설은 시스템을 전복하고 마지막 9회말 2아웃에서 통쾌한 역전 한 방을 일으키는 드라마 같은 결말을 섣불리 앞세우지 않는다. 승리를 향한 과도한 집착과 경쟁 분위기가 어린 선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시스템 앞에서 혁오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보장된 성공을 쫓지 않는 것이었고, 구조조정을 앞두고 동료 평가서를 작성해야 했던 준삼은 자신의 이름을 써내어 추한 꼴을 모면해보는 것이었다. 혹은 기현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스템 밖으로 나와 또 다른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도 있는 법이다.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기 위해 노린 저 야구공의 커브가 그리는 궤적에 희망을 걸어보는 거다. 이것이 지금은 미미해 보일지라도,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지킨 아름다움서로의 조각을 자극할 수 있으리라는 마지막 문장이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끝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오늘도 묵묵하게 자신의 힘을 키워나가고 있는 세상의 불펜들에게 이 책이 조그마한 희망과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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