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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평점 :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오늘도 묵묵하게 자신의 힘을 키워나가고 있는 세상의 불펜들에게!
누군가가 지킨 필사적인 아름다움이 우리 각자의 조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되기를!
그는 야구를 사랑한다고 했었다. 누구보다 긴 시간 동안 꾸준한 활약을 해 왔기에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선수였다. 통산 135승에 빛나는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그는 영구결번이라는 명예와 함께 레전드로 팬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승부조작을 했단다. 현금 5억 원에 부정청탁을 받은 혐의로 그가 법정으로 향하는 장면은 그를 사랑했던 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것도 모자라 숙소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방역수칙을 어긴 선수들이 코로나19에 확진되면서 한국 야구 역사상 리그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거짓 진술 및 은폐 의혹, 특정 팀 봐주기식 리그 중단 사태에 관한 논란은 그동안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킨 선수들과 팬들을 무시한 처사로 야구 팬 전체의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 소설 『불펜의 시간』 속 주인공으로, 10여 년 간 팀의 불펜 투수였던 혁오는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나치게 좁은 프로의 문과 소수의 선수가 연봉을 독식하는 구조,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구단, 프로에 데뷔하지 못한 어린 선수들과 평생을 바친 일에서 물러나야 하는 사람의 좌절을 함께 책임지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는다면 야구장은 머지않아 경마장이 될 거라고. “이미 경마장인가요?” 하고 되묻는 그의 말이 너무나 뼈아픈 요즘이다.
커브, 그 작은 반등과 궤적의 의미
불펜(bullpen). 야구에서 구원 투수가 경기 중에 준비 운동을 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앞서 선발로 출장한 투수를 대신하여 공을 던질 계투조를 이르기도 한다. 야구라는 스포츠를 두고 ‘투수 싸움’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경기 운용에 있어 투수는 절대적이다. 특히 해당 경기의 엔트리에 있어 선발 투수는 경기의 승패를 미리 짐작해볼 수 있는 가늠좌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장 주목받는 선수 중에 하나다. 반면 계투조인 불펜 선수들의 경우 선발 선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는 주목을 덜 받는 게 사실이다. 경기가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 그날의 등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이닝 혹은 단 한 타자를 막기 위해서, 이 경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 오늘도 묵묵히 뒤에서 준비한다. 소설 『불펜의 시간』은 바로 이런 ‘불펜’들에 관한 이야기다.
혁오는 벤치에 앉아 쉬면서 후배 투수가 실점하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 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야구장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여덟 명의 수비수가 마운드에 모여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도 보았고, 과중이 마지막 투수에게 보내는 단단한 박수 소리도 들었다. 환호는 내 몫이 아니니까. 혁오는 마운드로 올라가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후배 투수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 32p
“넌 프로 선발 1순위가 확실하니까.”
“혁오는 우리랑 다르잖아.”
“선배님 같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왜 아무도 나의 노력은 봐주지 않는 걸까? 나의 과정은 왜 못 본 척하는 걸까? / 47p
야구 명문 중학교 출신의 혁오는 완벽한 투구폼으로 타고난 재능을 갖춘 투수다. 그는 이미 프로 선발 1순위가 확실시되는 야구계의 촉망 받는 선수였고, 이를 입증하듯 고교 전국체전 결승전에서 2대0의 완봉승을 거두며 자신의 손으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프로 데뷔 경기에서 단 하나의 스트라이크도 잡지 못한 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고, 두 번째 경기에서도 볼넷을 연발하며 교체된다. 설상가상으로 9회에 등판하기만 하면 아웃 카운트를 잡지 못하는 트라우마까지 생기면서 그는 탄탄대로일 것 같던 자신의 인생이 의도치 않은 커브를 그리기 시작했음을 직감한다.
사실, 혁오에게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하나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열등감을 자기고 있었던 친구 진호가 혁오와의 승부에서 진 다음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게 발단이었다. ‘너의 승리가 다른 사람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던 엄마의 당부가 화근이었을까, 혁오는 교통사고로 포장된 진호의 죽음이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 날 이후 혁오는 꽤 오랫동안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고, 진호의 환영은 항상 중요한 순간에 타석에 드러내 번번이 그를 괴롭혔다. 이를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완벽한 투구폼을 갖춘 그가 왜 9회만 되면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는 공을 던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승부조작에 가담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긴장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먹고 던진 네 번째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걸 지켜보며 혁오는 탄탄대로일 것 같던 자신의 인생이 의도치 않은 커브를 그리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툭투두둑, 툭툭툭. 곳곳에서 사람들의 기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혁오는 두 번째 타자와 세 번째 타자에게도 볼넷을 내주었다. 그다음 타자에겐 안타를 맞았다. 혁오가 단 하나의 스트라이크도 잡지 못하고 다섯 번째 타자에게도 볼넷을 내어주자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코치가 걸을 때마다 투욱, 투우욱, 투우우욱. 떨어진 기대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 35p
객관적인 조건만 보면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이기려는 욕심이 강한 진호는 프로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최고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비교 대상을 다 이긴다고 해서 최고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경쟁 상대를 이기는 선수의 첫 번째 단계에 불과했다. 그다음엔 약점이 있는 자신, 나약한 마음을 가진 자신, 다른 걸 욕망하는 자신, 안주하는 자신, 자만하는 자신,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자신, 자유롭지 못한 자신, 자신을 한계 짓는 자신……. 그 외에도 도망갈 수 있는 자신과의 승부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 41p
한편, 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꿈을 접어야 했던 기현은 이제 여성 최초의 스포츠신문 편집장이 되겠다는 목표로 스포츠신문사에 입사한다. 우연히 오빠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돕다가 전·현직 야구인 4명이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속에서 김승일 선수의 승부조작이라는 특종을 얻게 된다. 김승일은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써야 할 위기에 처하자 구단이 어떻게 꼬리 자르기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야구선수가 브로커의 유혹을 받고 있는지, 자신의 조작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작고 하찮은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며 자기가 브로커에게 이름을 들은 선수만 해도 다섯이라고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속에 권혁오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9회에만 오르면 볼넷을 남발하는 권혁오가 승부조작에 가담했을 거라는 의심은 분명 합리적이었고, 특종에 목이 마른 기현은 그렇게 권혁오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작년 김승일 사건에 이어 올해 또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이 야구에 완전히 등을 돌릴 가능성이 있었다. 이건 타이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성적이 좋지 않다고 해서 떠나는 팬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팬들은 져도 계속 응원한다. 아니 질수록 더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진심으로 응원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란 기대가 야구장에선 아직 작동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승부조작은 기만이고 배신이다. 팬을 쫓아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 153p
자기도 초등학교 때 야구를 했었는데 여자를 받아주는 중학교 야구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도나 질서가 있을 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야구를 하는 여자에겐 기울어진 운동장조차 없다고 말했다. “농구나 배구는 여자 리그가 있잖아요. 야구는 여자 리그가 없어요. 남자만 프로가 될 수 있죠. 권혁오 선수가 그런 식으로라도 야구를 계속 할 수 있었던 건 적어도 운동장은 있었기 때문이에요.” / 188p



"이 주임은 누구처럼 살고 싶어?” 박 부장의 말에 준삼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TV 속에 나오는 권혁오를 바라본다. 별로 잘 나가지도 않는 계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말을 진짜로 믿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다. 사실 준삼은 한때 야구선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중학교 동창이었던 혁오의 압도적인 기량과 타고난 재능을 본 뒤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 가능성만 보고 무작정 시간을 쏟아 붓기엔 현실은 불안했다. 이후 학교를 졸업하고 투자증권회사에 입사한 준삼은 예외적으로 살 자신이 없고, 독보적으로 살 자신도 없었기에 그저 묵묵하게 여러 잡무를 도맡아 하며 사회가 제시하는 틀에 자신을 맞춰 산다. 그렇게 역전 한 방을 기대하기는커녕 그저 그런 삶이라도 살아보려는 그이지만, 구조조정을 앞두고 자기 기회만 도모하는 이들 사이에서 점점 구역질을 느낀다. 그나마 동경했던 혁오가 볼넷을 주고도 그저 그렇게 만족하는 이유가 자신의 삶까지 초라하게 만들까 봐 두려워진다.
상사가 해 오라는 건 많고,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은 신입사원들이 ‘여직원’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는다. 결재 시스템이나 문서 작성법부터 회의 준비나 거래처에 전화하는 법까지 모든 업무의 기초를 ‘여직원’에게 배운다. 그러고 나면 신입사원들은 불친절한 지시만 내리는 상사보다 실무에 능숙하고 친절한 ‘여직원’의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 시간이 지나 신입 딱지를 떼고 승진할 때는 ‘여직원’보다 일을 못 하는 자신이 먼저 승진하는 걸 미안해한다. 회사의 진급 시스템이 엉망이라며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분노의 크기는 언제나 작아서 하룻밤 자고 나면 사그라든다. / 79p
준삼은 뻔함이 주는 안정감을 가능한 한 오래 누리고 싶었다. 문제는 악취였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구린내를 맡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썩은 내가 날 줄은 몰랐다. 예측 범위를 넘어서는 냄새였다. 월급이 주는 안정을 누리려면 월급과 세트로 묶인 악취와 모욕도 견뎌야 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악취는 독해질 것이고, 감내해야 하는 모욕의 양도 많아질 것이다. 어느 순간엔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욕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건 또 얼마나 끔찍할까? / 175p
자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인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굴절된 이야기를 받아 적다 보니, 쉽게 갈 수 있는 직선 길을 버리고 구불구불한 길을 손수 만들며 걸어온 사람의 고백을 듣다 보니, 두려워졌다.
나는 내게 주어진 것만 욕망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남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제대로 된 욕망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게 아닐까? / 192p


제26회 한겨례문학상 수상작인 『불펜의 시간』은 이렇듯 야구가 전부였던 세 명의 주인공을 통해 경쟁과 성공, 독식과 성과주의, 조작과 집단 이기주의로 점철된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배제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묘파한 소설이다. 문제는 그 시스템이 어떤 거대한 세계 속에서 나약한 한 인간이 철저히 내팽겨쳐지는 구조가 아니라 바로 내 옆 사람, 내 주변에 도사리고 있던 아주 작은 비열함이 모이고 모여 서로를 야금야금 균열을 내는 구조란 사실이다.
때문에 소설은 시스템을 전복하고 마지막 9회말 2아웃에서 통쾌한 역전 한 방을 일으키는 드라마 같은 결말을 섣불리 앞세우지 않는다. 승리를 향한 과도한 집착과 경쟁 분위기가 어린 선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시스템 앞에서 혁오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보장된 성공을 쫓지 않는 것이었고, 구조조정을 앞두고 동료 평가서를 작성해야 했던 준삼은 자신의 이름을 써내어 추한 꼴을 모면해보는 것이었다. 혹은 기현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스템 밖으로 나와 또 다른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도 있는 법이다.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기 위해 노린 저 야구공의 커브가 그리는 궤적에 희망을 걸어보는 거다. 이것이 지금은 미미해 보일지라도,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지킨 아름다움’이 ‘서로의 조각’을 자극할 수 있으리라는 마지막 문장이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끝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오늘도 묵묵하게 자신의 힘을 키워나가고 있는 세상의 불펜들에게 이 책이 조그마한 희망과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