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김진애의 도시 3부작 1
김진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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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책!

더 나은 도시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꿈꾸게 하는 시도와 성찰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특징을 몇 가지 들어보자면 ‘교육 도시’, ‘계획 도시’, ‘살기 좋은 도시’, ‘취업하지 힘든 도시’, ‘유행에 민감한 도시’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정도 만으로도 알 만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대구’다. 얼마 전에 읽은 기사에 따르면 서울 다음으로 가장 비싼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 대구의 수성구이며, 그곳에서 많은 서울대생을 배출하기로 이름난 고등학교들이 모여 있다는 이유로 대구는 교육의 도시가 되었다. 또 도로환경이 지리적 장애물도 거의 없고, 직선으로 이루어진데다 넓고 격자형으로 잘 뻗어 있어 교통 환경만큼은 그 어느 도시보다도 단연 최고라고 자부할 만하다. 솔직히 대구에서 살다가 서울이나 부산 등을 가면 심각한 교통난과 복잡한 도로에 어리둥절 할 때가 많다. 이렇게 도시 자체가 계획적으로 지어진 덕분에 살기에 좋은 도시라는 점도 긍정할 만하다. 그러나 소비지향적인 도시로 대기업이나 이렇다 할 수입 자산이 없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취업하기 어려운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흔히 대구의 지역주의를 비하하는 말로 ‘고담 대구’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사회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간혹 발생한 것에 비하면 이렇다 할 자연재해도 없는 편이라 조금은 섭섭한 말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떤 곳인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 정도 선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일상에서 느끼는 어느 정도의 좋은 점과 불편한 점 정도로만 도시를 생각할 뿐이지,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했으며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 수준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도시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서 관심을 끌어내느냐?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도시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게 만드느냐?’에서 출발한 이 책의 시도가 제법 특별하고 남다르게 읽힌다. 앞서 그녀의 책 <여자의 독서>를 읽어본 적이 있는 데다, tvN에서 방영된 <알쓸신잡3>에 출현해 그녀의 건축에 대한 놀라운 시각과 냉철한 성찰을 엿보았기에 이번 책은 그냥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되었다.

 

 

 

 

 

 

도시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왜 도시의 스토리에 주목해야 하는가? 도시 건축가인 저자는 도시 속 다양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총동원되었을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스토리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고 말한다. 권력자의 욕망, 시민들의 바람, 기획자의 고충, 설계자의 고민, 공정에 참여한 수많은 작업자들의 땀과 때로는 피까지도 얽히고설킨다. 유명한 공간이라 해서 항상 칭송받기만 한 것도 아니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때로는 비판받고 무시당했으며 때로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새로 발견되거나 그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유명한 공간들 역시 그들이 놓여 있는 상황과 맥락에서는 일상적인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공간들이 이곳저곳 숨어 있는 곳이 도시이기에 도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흥미롭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12가지 ‘도시적’ 콘셉트』는 도시 3부작의 첫 번째 책으로, 도시가 이야기가 되면 될수록 좋은 도시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희망 아래 콘셉트에 따라 도시를 읽는 핵심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이야기란 현상의 영역인지라 수없는 변조와 변용을 통해 다채로워지고 끊임없이 진화하기 마련인데, 콘셉트의 얼개를 통하면 현상 아래에 깔려 있는 핵심 구조를 훨씬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열두 가지 콘셉트를 제시하는데, ‘익명성, 권력, 기억과 기록, 예찬, 대비, 스토리텔링, 코딩과 디코딩, 욕망과 탐욕, 부패에의 유혹, 현상과 구조, 돈과 표, 진화와 돌연변이’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이 콘셉트들을 우리의 도시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녹여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도시 이야기는 풍요로워지고 도시적 삶 역시 풍성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콘셉트 1장에서는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길과 광장’이 과연 익명성이라는 도시의 근본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살펴본다. 이어 콘셉트 2장 ‘권력과 권위’ 편에서는 권력의 존재를 증명하고 과시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용했던 도시와 건축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또 도시를 안전하고, 건강하고, 풍요롭고 강력하게 만드는 권력이 거꾸로 무능하고 부패하여 도시를 망가뜨리기도 하는 속성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의 문제점까지 아울러 살펴본다. 특히 청와대와 국회가 국민들에게 개방됨과 동시에 권력 공간의 구성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바꾸어갈 수 있는지 고민이 필요한 시기임을 지적하며 어떤 공간이 건강한 권력 개념을 만드는 가 다함께 고민해볼 수 있기를 강조한다.

 

 

 

신분 제도가 철폐된 근대 이후 도시에서도 ‘끼리끼리 모여 사는 방식’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조금이라도 더 ‘우리’가 되어 익명성의 위험을 줄이려는 것이다. 도시계획사와 건축 유형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끼리끼리 모여 살기 위해서 갖은 수법이 고안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무리 다른 이유로 포장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더구나 그것이 ‘주류 흐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 34p

 

 

광장의 명과 암은 극과 극을 달린다. 자연발생적 대 계획적, 시민 협치 대 권력 주도, 자유 대 통제 등의 양극단을 오가는 공간이다. 우리가 지금 보는 광장은 주로 관광 공간이 되어 밝고 경쾌한 면들만 보이지만, 기실 무거워 보이는 역사 현장으로서의 광장이 오히려 광장 정신을 근본적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권력의 영광과 영예를 보여주는 장소로 광장을 계획적으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다채롭게 쓰이는 ‘너른 장소’가 광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광장은 언제나 시민의 에너지, 변화의 에너지, 혁명의 에너지가 결집하고 폭발하는 공간이다. / 49p

 

 

‘권력 공간은 권력 그들만의 문제 아닌가?’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력 공간은 권력 공간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다. 권력 내 조직 문화(수직적 vs. 수평적), 일하는 문화(제도적 vs. 현장적, 관습적 vs. 창의적 등), 운영 문화(상명 하달 vs. 자율성), 교류 문화(폐쇄적 vs. 개방적)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회 전체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종의 ‘기조 문화’가 되는 것이다. 그런 문화는 비단 관료들이 일하는 청사에서만 나타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료들이 관리하는 공간들에도 알게 모르게 그 성격이 녹아든다. / 94p

 

 

 

   ‘사실이 역사로 남는 게 아니라 기록되는 것이 역사로 남는다.’ 이는 누구나 인정하는 명제다. 기록된 역사를 꼭 사실로만 보지 말라는 경고이자, 기록된 승자의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이면을 들여다보라는 교훈이고, 기록이 그만큼 중요하므로 충실하게 기록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는 기록이란 ‘권력’의 문제이자 ‘정체성’의 문제이고 또한 ‘자존감’의 문제이자 ‘명예’의 문제라고 말한다. 아무리 세속적인 허영심이라 할지라도 명예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극복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책은 “도시는 명예를 빛나게 한다”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에 의거하여, 과거의 유산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보전하여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 시대의 과제를 3장 ‘기억과 기록’ 편에서 점검해본다. 개인적으로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설계한 이가 우리 현대건축의 거장이자 ‘인문주의자, 휴머니스트, 문화 거인, 건축 거장’으로 알려진 김수근으로, 같은 건축가로서 회의를 느끼는 대목에서 서글픈 아이러니를 느끼기도 했다.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우리 시대는 열심히 역사의 기록을 발굴하고 그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것. 문제도 있고 부작용도 생기지만 열심히 남겨야 한다. 그만큼 없앤 것, 없애고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일부러 지운 것, 감춘 것, 숨긴 것도 너무나 많다. 없어진 현장, 사라진 흔적, 묻혀버린 진실, 지워진 기억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더욱더 뿌리를 찾고 그 흔적을 남겨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만들고 있는 역사를 아끼며 지켜야 상실을 거듭하지 않을 수 있다. / 119p

 

 

 

 

 

 

  이어 콘셉트 4 ‘알므로 예찬’ 편에서는 자신의 도시를 제대로 예찬하는 역량의 중요성을, 다음 ‘대비로 통찰’ 편에서는 다른 문화권 도시의 통찰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우리 도시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모색한다. 이 책의 이름이 ‘도시 이야기’이듯 모든 도시, 모든 공간은 특유의 스토리를 안고 있다는 관점 아래 콘셉트 6 ‘스토리텔링’ 편에서는 공간 스토리텔링의 파워와 배어 나오는 스토리에서부터 만드는 스토리까지 진정한 도시 스토리를 이어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본다. 특히 시에서 운영하는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실제 역사를 왜곡해가며 도시 콘셉트를 저해하는 각종 스토리텔링 사업의 병폐는 나 역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에서 “콘텍스트를 읽으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어느 것도 홀로 서 있지 않다. 다른 무엇과 관계를 맺으면서 성격이 규정된다. 만약 우리가 어떤 도시 공간에서 감이 동하는 것을 느낀다면 그 공간이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녹아든 듯한 자연스러움, 언제나 거기에 그렇게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듯한 영원의 느낌, 놀라움, 생고함, 극한의 대비, 의외성, 이야기를 걸어오는 듯한 친밀함 등 그것은 풍경과 식생과 다른 건물들과 길과 광장과 조형물들과 조화와 변조를 이어간다. / 147p

 

 

‘명품진품’이라는 브랜드 성격의 이름보다는 ‘진본’이라 칭하는 것이 더 좋다. 진본성이라는 뜻을 갖는 오센티시티라는 다소 어려운 영어 단어가 더 적확하게 뜻을 담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딱 그것 하나만 있’기에 나오는 힘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매혹적이어서, 너무 화려해서, 너무 진솔해서, 너무 웅장해서, 너무 소박해서, 너무 우아해서, 너무 뜻이 깊어서’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이것이 공간의 진짜 힘이다. 바로 거기에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나오는 힘이다. 이 세상의 모든 공간은 단 하나씩만 있다. 콘텍스트에 얽힌 인연으로 발생하는 ‘유일성’이다. 그게 진본의 힘이 된다. 사람들은 그 오센티시티를 느끼려고 굳이 먼 길을 떠난다. / 150p

 

 

 

   다음으로 우리는 공간이 품은 함의들을 제대로 디코딩하고 있는지, 혹은 조종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보는 ‘코딩과 디코딩’, 부동산 거품과 사유화, 젠트리피케이션, 뉴타운 등 머니 게임으로 도시의 건강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욕망과 탐욕’ 편에서 살펴본다. 초고층 아파트 즉 바벨탑 공화국이 되어버린 도시 속에 존재하는 ‘부패에의 유혹’을 다룬 다음 편 역시 이와 결을 같이 한다. 끝으로 우리 사회의 현상 밑바닥에 흐르는 구조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어떤 구조적 원인이 작동하는 것인지 살펴보는 ‘이상해하는 능력’과 도시 간 양극화와 도시 속 양극화로 몸살을 앓는 우리 사회의 현 주소를 살펴보는 ‘돈과 표’도 깊은 고민거리를 남긴다.

 

 

 

아파트 단지는 개인주의 성향일까, 집단주의 성향일까? 현대인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아파트를 선호한다는 해석도 있으나, 아파트 단지 선호 현상은 개인주의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더 유효하다. 이웃끼리 알고 지내는 공동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서로 어떤 사람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끼리끼리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작용하는 것이다. 비슷한 평형끼리 모아놓는 것도, 한 동에 대개 같은 평수를 모아놓는 것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 220p

 

 

다만 이후로 여러 번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무산되었던 현상은 실망스럽고 또 의아하다. 개발 산업의 관성, 대규모 소비자의 욕구, 기존 소유자들의 이해가 맞물리며 개발 머신은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굴러갔던 것이다. 고속 성장에 따른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 과열 경기가 초래한 문제가 드러났던 1980년대 후반, 글로벌해지는 자본 유동성에 굴복했던 1990년대 후반, 전 세계적인 금융과 부동산 거품이 속절없이 터져버렸던 2000년대 후반 등 그때마다 근본적인 체질 개선 과제가 제기되었으나, 얼마 지나면 오히려 또 다른 부동산 개발로 위기를 탈출하려 했다. 그러니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권과 행정 당국과 개발 권력과 그와 결탁한 언론 권력을 수레바퀴 속에서,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역시 머니 게임의 공범이 되는 것 아닌가? / 230p

 

 

 

 

 

 

   저자는 “제일 좋은 도시는 어디인가요?”의 최고의 답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이지요”가 아닐까 싶다고 말한다. ‘여기에 있다가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올 것 같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답은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아무리 모자람이 많이 보이더라도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도시를 제일 좋은 도시로 여기는 마음가짐이 생기는 것. 어쩌면 그것은 도시 이야기를 이해하고 고민해보며 각종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기 위한 개인과 사회적 통찰이 함께 이루어졌을 때에야 가능한 일일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달라진다고 나는 믿는다’ 던 그녀의 말처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이 보다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 도시적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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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똥
유은실 지음, 박세영 그림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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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만큼 멋지고 쓸모 있게 살고 싶었던 어느 송아지똥의 따뜻한 이야기!

반드시 귀하게 쓰이지 않아도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동화!

 

   “으~ 소똥이다~.”

   어릴 적, 할머니의 시골집에는 커다란 소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단 한 번도 그 소가 외양간 밖을 나오는 걸 본 적이 없었기에, 어린 마음에 근처만 가도 소똥 냄새를 풀풀 풍기고 여물만 씹어 대고 있는 소가 참 이상해보였습니다. 덩치만 컸지 크게 쓸모 있는 일은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거든요. 그 시절에는 오빠와 언니를 따라 동네에서 뛰어 놀고 있으려면, 얼마 전에 싸놓고 간 소똥이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기도 했어요. 우리는 소똥 근처에만 가면 서로를 밀어붙이며 히히덕 거리고, 질겁을 하며 달아나곤 했습니다.

 

 

 

   딱 저만 하더라도 친척집이 시골이면 이런 경험을 곧잘 했지만, 이제 우리 아이에게는 돈 주고 사서라도 하기 힘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5살인 아이에게 『송아지똥』이란 책을 내밀자 “또오~옹?” 하고 신기한 듯 두 눈이 동그래집니다. “이제부터 엄마가 한 송아지똥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하니 바로 옆에 와 앉습니다. 송아지똥이 어떻게 생겼는지, 실제로 본 적도 없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똥’ 이야기라면 무척 좋아합니다. 우리에겐 쓸모없고 냄새만 지독한 것이 이렇게 한 편의 동화가 되어 아이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 참 놀랍지 않나요?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 가치가 있어

 

 

   어느 봄날, 산골 빈집 마당 한구석에서 송아지똥이 태어났어요. 질경이와 감나무가 축하노래를 불러줍니다.

   똥또로동또 똥또 똥또로동또 또오!

   똥또로동또 똥또 똥또로동또 또오!

   송아지는 자신을 환영하며 노래를 불러준 질경이와 감나무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질경이는 자신의 이름은 ‘평화를 사랑하는 질경이’라는 뜻에서 ‘평이’, 감나무는 ‘리듬을 좋아하는 감나무’라는 뜻에서 ‘리듬감’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말합니다. 또, 존댓말도 하지 말아달라고 말하죠. 길어야 한 계절을 사는데, 나이를 따지는 건 불공평하다고 말이예요. 덕분에 송아지똥은 자신이 길어야 한 계절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송아지똥은 자신이 태어난 세상을 천천히 둘러보며 내 짧은 똥생을 멋지게 살고 싶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평이로부터 ‘똥또로동’이라는 이름도 얻지요.

 

 

 

 

 

 

   태어나 하루를 보내며 똥또로동은 노을, 밤, 별, 달, 아침, 구름 그리고 좋은 친구까지.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고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이 서서히 굳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앞으로는 하늘을 실컷 올려다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울적해지고 맙니다. 바로 그때, 고맙게도 리듬감이 떨구어준 감잎 덕분에 모자가 생긴 똥또로동은 마음껏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이렇게 누군가를 도와주고 또 도움을 받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도 느끼게 되었지요. 하지만 참새가 똥도로동에게 “송아지가 싸고 간 똥”이라며 약을 올리고 부리로 콕콕 쪼으며 괴롭히자 자신은 그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에 금세 속상해졌습니다. 때마침 평화를 사랑하는 질경이가 벌레들에게 소리쳐 마당법을 어긴 참새를 쫓아내자고 소리친 덕분에 참새는 사라졌지만, 똥도로동은 참새가 했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똥또로동, 송아지는 싸고 갔을지 몰라도 말이야. 너는 귀하게 태어난 거야. 마당법 제1조에도 나와 있는 걸. ‘이 마당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는 귀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이렇게.”

 

 

 

   리듬감은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데 온통 마음을 쏟았던 ‘전설의 강아지똥’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거름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강아지똥은 자디잘게 부서져 흙으로 스며들었고, 고스란히 민들레 몸속으로 녹아들어가 더욱 빛나는 민들레꽃이 되었다는 이야기였어요. 이 이야기를 듣고 똥또로동은 자신 역시 전설의 강아지똥처럼 꽃 거름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자신은 시멘트 위에서 태어났기에 아무리 잘게 부서져도 흙으로 스며들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됩니다.

 

 

 

 

 

 

   보름 후, 하늘이 잿빛 구름으로 덮이더니 비가 내렸습니다. 이제 몸이 많이 굳어버린 똥도로동은 빗소리, 비 냄새, 빗물의 감촉을 느끼며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을 만끽합니다. 비록 쓸모 있는 일은 하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내 비가 그치고 가뭄이 들어 똥도로동의 몸은 바짝 말라붙었고, 똥도로동은 리듬감으로부터 “이야, 네 똥생 참 근사하다.” 라는 말을 들으며 세상과 작별합니다. 그렇게 똥도로동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를 기억하는 평이와 리듬감이 있는 한 의미 있는 삶이었지 않았을까요? 비록 어디에 쓰이지는 못했더라도 태어남의 값진 의미와 세상이 준 선물을 품은 똥도로동의 마음은 하늘나라에서 따스하게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송아지똥』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 『강아지똥』을 오마주한 작품입니다. 자신이 쓸모 있기를 바랐던 강아지똥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의미 있게 다가오지만, 『송아지똥』에서는 비록 쓸모 있는 일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으며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나 가치 있는 존재임을 전하려는 시도가 더욱 엿보입니다. 덕분에 오늘날 의미와 가치 있는 것만을 쫓는 게 세상을 사는 데 중요한 것이 아님을 우리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송아지똥이 속상하겠다” “송아지똥은 그럼 어디로 갔을까?” 하고 아이도 몰입해서 반응해주었는데요, 많은 아이들이 『송아지똥』을 읽고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지,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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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오늘의 젊은 작가 24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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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하는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자신의 무언가를 소모당하는 자들의 땅, 방콕!

위태하고 불온한 삶 속에서 저마다의 존엄을 사수하기 위한 몸부림이 펼쳐진다!

 

 

 

   동남아시아의 빛나는 메트로폴리탄, 휴양과 향락의 도시 방콕. 뜨거운 태양 아래 화려한 사원이 도시를 웅장하게 밝히는 낮이 지나고 나면, 유흥과 만취에 달뜬 이들이 서로를 유혹하고 희롱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 붓는 밤이 이내 찾아온다. 다시는 낮이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한낮의 번민과 고민은 짙은 유흥의 향취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천국의 도시라 부른다.

 

 

 

   내게도 방콕은 그런 도시였다. 차오프라야강 사이에서 전통수상가옥과 드높게 뻗어 있는 도시의 화려한 빌딩이 이쪽과 저쪽의 삶을 나누고, 공장에서 찍어냈는지 직접 만든 것인지도 모를 공예품을 늘어놓고 한국말로 흥정하는 상인과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관광객들의 고단한 발을 마사지해주느라 정작 자신의 손과 얼굴은 피로에 찌들려 있는 여인들이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곳. 고작 몇 걸음 앞에서 지독한 환락의 안개가 발걸음을 붙들고, 화려한 색채에 이끌렸다 추악한 향취에 이내 어지럼증을 느끼게 하는 곳. 그곳은 그렇게 소비하는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자신의 무언가를 소모당하는 자들의 땅이었다.

 

 

 

 

 

 

머무르는 자를 허락하지 않는 땅, 내몰린 사람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스물네 번째 소설 『방콕』은 천사의 도시라 불리나 천국을 꿈꾸었던 자들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던 태국의 도시 방콕을 배경으로 우연과 오해로 점철된 삶의 불온성을 냉소적으로 묘파한 작품이다. 외국인 노동자 훙, 피아니스트 정연, 정연의 오빠이자 조지타운 대학교의 MBA 과정을 밟고 있는 섬머의 연인 정우, 정연과 정우의 엄마이자 훙이 다니고 있는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윤 사장, 은퇴한 미국인 벤, 환경운동가이자 벤의 딸인 섬머, 벤의 어린 여인 와이 그리고 웨이트리스 린까지 국적과 성별, 신분이나 지위, 어느 하나 같을 것 없던 인물들이 하나의 교집합을 이루며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전개해간다. 사랑, 연민, 치정, 복수, 파국으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유형들은 시종일관 독자들의 마음을 편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끝내 마주하게 되는 결말은 그 어떤 비극보다 치명적이고 진한 잔상을 남긴다.

 

 

 

 

   훙의 회사는 장갑차와 탱크 부품 등을 만들어 원청 업체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이다. 직원 수는 302명이고 그중 31명이 이주 노동자다. 서른한 명 중 다섯 명이 불법 이주 노동자인데 훙이 여기에 속한다. 훙은 어릴 적, 동생인 트린과 함께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호치민의 에이즈 고아원에서 지내다 삼촌과 롱미로 갔고, 4년 전 러시아 어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가 베트남 노동자를 따라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는 다른 노동자들보다 작업량이 많이 주어져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의학 공부를 하는 트린을 뒷바라지하다 언제부턴가 연락이 끊기자, 이제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뜰리에를 가졌으면 하는 게 그나마 소원이라면 소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훙은 손가락 세 개를 다치고, 윤 사장은 얼마의 보상금과 치료비를 지원하기로 하고 그를 해고한다. 평소 윤 사장의 딸이자 피아니스트인 정인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으며 연모하고 있었던 훙은 사고 후, 다시 오갈 데가 없는 신세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여 그녀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한다. 한편, 윤 사장에 의해 악보 밖의 현실 따위는 모른 채 그저 커피 쿠폰에 도장을 찍듯 수많은 콩쿠르에 참가하고 우수한 성적을 받았던 정인은 공연을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 날 밤, 훙에게 불시의 습격을 당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는다. 이 날의 치욕과 상처로 정인은 이전과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되버린다. 거지 같은 머리 스타일을 한 남자가 추근거리지 않았더라면, 훙이 분노의 대상을 정확히 했더라면, 자신이 아니라 엄마였다면, 아니 처음부터 이주 노동자들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여전히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이자 엄마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딸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분노하면서.

 

 

 

 

트린에게서 소식이 끊긴 후, 훙은 해야 할 일을 머리에서 조금씩 지워 나갔다. 지금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거나, 자신이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만 있었다. 그 욕망만큼, 한 시간 뒤조차 예측할 수 없는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없는 삶에서 벗어난 것이 중요했다. / 39p

 

 

 

 

 

 

   ‘런던에는 300가지 종교와 세 종류의 소스가 있어. 파리에는 세 가지 종교와 300종류의 소스가 있고. 방콕은 어떤지 알아? 300종류의 소스와 300종류의 여자가 있지.’

   방콕에서는 남자들의 수다꺼리 하나쯤으로 여기는 이와 같은 말이 있다고 한다. 와이는 코사무이 해변을 가득 메운 젊은 여자들을 보며 자주 딴생각에 빠지는 벤을 보고 한없이 우울해진다. 벤은 미국인이었고 2년 전 방콕으로 은퇴 이민을 왔다. 그는 인생의 반을 군인으로 살았고 나머지 반은 대형 유통업체 중간관리자로 일했다. 저축한 돈 대부분을 주식으로 날렸지만 매년 4만 달러 정도의 연금이 나왔고 필라델피아에 세를 준 집이 남아 있었다. 태국 북부 출신인 와이는 벤을 ‘탕푼 투어’에서 만났다. 투어 도중 와이는 벤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들뜬 얼굴로 방콕행 기차에 올랐다. 벤은 와이와 함께 천국의 방문객처럼 방콕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함께 살 집을 구했다. 늦은 밤에는 팟퐁을 갔다. 팟퐁은 유명한 환락가였다. 와이는 방콕의 여자들을 만났다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버리는 다른 남자들처럼 벤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수많은 커플들이 그랬다. 그들은 종착역이 아닌 정거장처럼 방콕에 머물렀다. 쾌락을 충전하고 있는 힘껏 소모한 다음 부지불식간에 떠났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우면 느닷없이 다시 찾아왔다. 그래서 이 땅을 살아가는 와이나 린과 같은 부류의 여자들에겐 금세 사라지는 건 무의미하다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을 자신에게 줄 사람이 절실하다.

 

 

 

 

방콕은 그러려고 오는 거야. 나도 세 번째 방문인데 여전히 방콕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한다고. 배려, 헌신, 신뢰 같은 감정들이 개입될 틈이 없지. 여기 여자들도 대부분 그걸 알고 있어.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서로 동의만 하면 문제될 게 없잖아?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섹스는 애들이나 하는 거야. 존중과 사랑은 언제 해?

존중과 사랑은 미래를 위해 남겨 두는 거지. 현재는 그냥 즐기는 거고. 떠날 시간이 오면 과거는 방콕에 던져두고 훌훌 날아가는 거야. / 72p

 

 

누구도 싸움에 간섭하지 않았다. 간섭하면 칼부림이 날 때도 있었다. 더 치열하고 비열하게 싸우는 건 간섭으로 인한 다툼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사유와 사투 중에서 사유를 빼면 그게 바로 삶이며, 가끔 둘 사이에서 찌부러지는 게 삶이기도 하다고. / 115p

 

 

 

 

   이처럼 저마다 자신의 욕망을 좇아 원하든 원치 않든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소설 속에서 환경운동가인 섬머 만은 유독 특별한 인물처럼 여겨진다. AAI 아시아 지부 캠페인 매니저를 맡고 있는 섬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적어도 자신만큼은 모른 척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유별난 그녀의 정의로움은 외부로부터 수시로 공격을 받는다. 산악고릴라 밀렵 근절 운동을 벌인 동물학자 다이앤 포시가 자신의 텐트에서 손도끼로 얼굴이 난자당한 채 발견되고, 동물 구조단원은 복면의 괴한에게 납치되어 목이 잘린 시체로 돌아온 사건을 그녀라고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신변을 위협하는 자들이 주변에서 그녀를 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끝내 코끼리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탄다. 너무나 무모하고, 어쩌면 이 결말이 행복하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지만 그녀는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섬머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정의가 짓밟히고 동물의 존엄이 위협받는 현실을, 그것을 수호하는 일조차 공격받는 부당한 현실을 담고자 한 작가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만, 한편으로는 그녀 역시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에 몰두하느라 정작 내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편협한 인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난 선한 사람이 아니야.

나쁘기만 한 사람도 아냐. 많은 사람이 그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일이라고 생각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사람이 더 많아. 그래서 끝없이 고통이 반복되는 거야.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눈을 감지 않는 게 중요해.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어. / 53p

 

 

많이 벌려면 많이 잃어야 해.

뭘 잃어?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뭔데?

존엄. / 182p

 

 

정우는 한숨을 쉬었다. 정우는 타인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마다 않는 사람들을 보며 종종 생각했다. 위대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동시에 치료도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그들의 행동은 마음속 어딘가가 크게 구멍이 난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정우는 눈앞에 있는 섬머가 바로 그런 사람처럼 느껴졌다. / 234p

 

 

 

 

 

 

   이렇게 제각기 다른 인물들이 서서히 방콕이라는 무대로 모여든다. 윤 사장은 갑자기 돌변한 딸 정인과 자신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훙을 찾아야만 한다고, 그를 찾으면 나머지 손도 부숴버릴 거라며 혈안이 된 상태로 사람을 붙여 그를 추적하고, 이를 알 리가 없던 훙은 린을 만나며 이제 방콕이야말로 자신이 자리를 잡고 살아갈 곳이라고 믿었다가 문득, 정인의 오빠인 정우와 섬머와 마주치며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와이는 벤이 미국에 있는 집을 처분하고 돌아온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깊은 불면증에 시달린다. 정우는 한사코 만류해보지만 코끼리 병원으로 가겠다는 섬머를 더 이상 막을 길이 없다. 가만 보면 이야기는 마치 잘 짜놓은 함정에 걸려든 주인공들이 러시안룰렛이라는 게임에 운명처럼 합석하게 된 모양새처럼 보인다. 한 시간 이후의 삶조차 예상할 수 없는,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반드시 누군가는 희생되어야만 끝나는 게임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방콕은 누구나 한 번쯤 방문하고 싶은 도시였다. 누구든 머물고자 한다면 머물 수 있고, 숨고자 한다면 숨을 수 있는 도시였다. 훙은 죽은 자신의 아버지를 이곳에서 만났다고 해도 받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우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훙은 잠시 희망을 품기도 했다. 저 해맑은 웃음을 간직한 남자는 기적처럼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할까? 정말 우연일 뿐일까? / 247p

 

 

 

  소설 속의 『방콕』은 동물이든 사람이든 하나의 생명체에게 지옥인 곳이 다른 생명체에게 천국일 수는 없다고, 누군가의 고통은 부메랑처럼 결국 다른 이들에게 돌아온다는 어떤 지독한 순리를 방콕이라는 도시가 지닌 이미지를 이용해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또 간결한 문체, 냉소에 가까운 유머, 지독한 고독과 실존의 문제를 다층적인 캐릭터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거리낌이 없다. 특히 폭주하는 라스트 스퍼트와 인간의 희비극을 유연하게 다루는 능력은 비상하기까지 하다. 이것이 김기창이라는 이름의 작가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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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 미트 - 인간과 동물 모두를 구할 대담한 식량 혁명
폴 샤피로 지음, 이진구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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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식 사육을 종식시키고 고기 없는 고기의 미래를 열어갈 대담한 식량 혁명!

인류에게 닥친 중대한 문제이자 고기의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가장 영향력 있는 리포트!

 

 

   제레미 리프킨은 자신의 저서 「육식의 종말」을 통해 현대 문명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식생활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고기를 먹으면서 파생되기 시작한 문제는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일례로 12억 8천 마리의 소들이 전 세계 토지의 24%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 곡물의 70%를 소나 가축들이 먹어치우는데 이는 인간의 수요를 뛰어넘을 정도다. 이에 대해 유발 하라리는 ‘가축이 받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동물의 공장식 사육은 단언컨대 역사상 손꼽히는 범죄행위’라고까지 지적한다.

 

 

 

 

 

 

 

   이렇듯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데서 초래되는 기후변화, 식품 안보, 지구의 자원, 건강 등의 문제가 사회 전반에 알려지면서, 이를 의식한 듯 소신껏 채식주의를 선언하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채식이라는 것인지, 고기를 먹지 않고 얼마나 지낼 수 있냐는 듯 채식주의자들에게 보란 듯이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지구에 사는 척추동물의 상당수가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호모사피엔스라는 한 동물에게 지배받고, 공장식 축사에서 고기나 우유, 달걀을 생산하는 기계 취급을 받는 현실과 아울러 그들을 극한의 환경에까지 몰아감으로써 유발되는 각종 문제들을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나 역시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지금 인류에게 당면한 중대한 문제 앞에서 반드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겠다고 선언할 수는 없지만, 더 나은 지구를 위해서 천단과학의 최전선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 고기를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연구 중인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클린 미트」는 공장식 사육에 따른 축산업의 해악을 종식시키고 고기 없는 고기의 미래를 열어갈 대담한 식량 혁명의 보고이자, 미래 식량 생산 시스템의 비전을 다양한 각도에서 제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리포트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오늘 내 밥상 위에 올라와 있는 고기 한 덩이가 이전과는 많이 다르게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고기가 웰빙의 척도가 되어버린 시대, 사육과 도살이 사라질 미래를 위해

 

 

 

 

   「클린 미트」의 저자 폴 샤피로는 2050년에는 90~100억 명의 인구가 지구상에 발을 딛고 살게 될 것이라 예측한다. 그중 대다수가 서양인, 특히 미국인처럼 호사스럽게 먹을 여유가 생긴다면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막대한 양의 땅과 다른 자원이 필요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미국만 하더라도 매년 90억 마리 이상의 동물을 키우고 도축을 한다고 한다. 마리가 아닌 무게로 계산하는 생선 같은 수생동물은 포함되지도 않은 수치다. 달리 말하면 미국에서 식용으로 쓰이는 동물의 숫자가 지구상의 인구보다 많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동물들이 거의 평생 동안 농장이 아닌 수용소나 다름없는 공장 안에 갇혀 산다는 점이다.

 

 

 

   공장식 동물 사육이 야기하는 위험 요소들은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으로 인간은 항생제의 내성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많은 의학·공중보건 전문가들이 축산업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미국 전체 항생제의 80퍼센트 가량이 농장 동물에게 질병 치료의 목적이 아닌 체중 증가와 밀집 사육 시에 일어날 수도 있는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투여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학협회는 생명 구조와 직결되는 항생제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에 우려하며, 항생제가 농장 동물의 성장 촉진용으로 사용되는 것을 금지하라고 연방정부에 요청하고 있지만, 농업계와 약품 업계의 로비로 연방정부는 이 요구에 귀를 막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니 우리라고 예외는 아닐 듯하다.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 처칠은 “새로운 먹거리는 자연에서 만들어진 것과 사실상 구분되지 않으며, 이러한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점진적일 것이다.”라 하여 인간이 수천 년 동안 단백질을 획득했던 방법에 큰 혼란이 찾아올 것임을 내다보았다. 자동차가 마차 여행을 역사책에나 나올 이야기로 밀어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기술의 진보가 인간과 여타 동물의 관계를 송두리째 뒤바꾸리라 예상한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자와 기업가들은 수많은 병폐의 중심에 있는 농·축산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방법으로 고기와 다른 동물 생산물을 닭이나 칠면조, 돼지, 물고기, 소를 죽여서 얻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감정을 가진 동물들을 완전히 배제한 배양 공정을 통해 비전을 실현하려한 것이다. 즉, 동물을 키우지 않고도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을 먹을 수 있도록 완벽하게 안전한 새로운 고기를 만들어 내는 것, 바로 ‘청정고기’다.

 

 

 

   이들은 이런 스타트업이 성공한다면 환경 파괴나 동물학대는 물론 식중독과 심장병 등 우리에게 수많은 문제들을 안겨준 허점투성이 식품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갈아엎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젊은 스타트업들은 환경이나 동물복지, 공중보건상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고기와 다른 동물 생산물을 풍족하게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공상과학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마크 포스트가 소 줄기 세포를 배양해 햄버거용 패티를 만들어 상용화 가능성을 증명하고, 안드라스 포르각스는 새로운 형태의 스테이크 칩을 선보인 것은 물론, 우마 발레티 박사는 고기를 세포 배양하여 기존 고기와는 다른 더 건강한 고기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멤피스미트는 세계 최초의 배양 미트볼을 완성해냈다.

 

 

 

 

이 기술이 실제로 축산업을 대체(교체가 무리라면)하기 시작한다면 농업경제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란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미 수십 년 동안 미국 농업인의 숫자는 감소 추세이고 점점 더 많은 농업인과 축산인들이 다른 직업군으로 재편될 것이다. ‘미래의 미국 농업인은 목장 주인이 아니라 미생물학자’라는 제이슨 매시니의 예측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 116p

 

 

 

 

진정한 의문점은 우리 식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등 수많은 동물 생산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면 기존에 고기를 먹던 사람들이 과연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모던미도의 실험관 가죽을 입고 실험실에서 키운 동물 생산물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받아들이기나 할까? 그리고 우리가 그런 음식과 의복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모던미도 등의 업체들이 더 늦기 전에 제품을 시장에 출시하여 축산업의 해악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평범하지만 비싼 이 스테이크 칩이 미래 식량의 예고편이 될 수 있을까? / 20p

 

 

 

 

 

 

 

 

 

 

 

 

 

   저자는 청정 고기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우려되는 몇 가지 중요한 난관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우선 비용을 아주 많이 낮춰야 한다는 점이다. 생산 가격을 낮춰 기존 육류 업체와 경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규모와 비용 면에서 경쟁력을 갖추더라도 정부 규제와 기타 행정 문제가 난관으로 작용하여 시장 출시가 늦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의문은 아무리 품질이 좋고 가격이 싸더라도 소비자들이 이런 식품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가공이 최소화된 식품, 더 나아가 ‘자연산’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과거 GMO식품이 프랑켄-푸드라고 불린 것처럼 배양된 동물 생산물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 변화는 매우 중요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비용 대비 효과가 높고 동물에서 유래하지 않은 배양액이 없다면 청정고기가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점은 확실합니다.”는 피셔의 말처럼, 세포를 키울 저렴하고 풍부한 영양원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청정고기로 동물과 지구에 더 나은 미래를 안겨주려는 꿈은 한낱 몽상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값비싼 사치품으로 전락해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청정고기 영역에 대한 투자는 더욱 절실해 보인다. 무엇보다 “비효율적이기 그지없고 심각한 오염을 일으키는 식량 생산 시스템에 전 세계가 계속 의존한다면 식량 부족과 기후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제도의 변화가 훨씬 중요하다.”며 좋은 식품 연구소의 브루스 프리드리히가 2016년 《와이어드》에 기고한 글처럼 이를 뒷받침해줄 제도적 장치 마련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 네덜란드에서는 열성적인 환경주의자들이 공직에 종사하며 힘을 실어준 덕분에 최근 몇 년간 동물이 아닌 식물을 원료로 하는 대체 단백질이 연구되고 있다고 하니, 우리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음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강력 범죄나 테러를 두려워하지만 진정한 위협은 식탁 위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인의 사망원인 1위인 심장질환은 육류 중심의 식사와 관련 있다는 증거가 셀 수 없이 많다. 과도한 육식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심장병의 주범임에는 틀림없다. 같은 이유로 미국심장협회는 ‘식물성 음식이 포함된 건강한 식단’을 홍보하고 ‘월요일은 고기 없는 날’ 같은 운동에 사람들의 동참을 유도한다. / 152p

 

 

 

 

우리가 고기 등의 동물 생산물에 집착하여 생긴 모든 문제들은 반세기 전에 볼로그가 이야기한 녹색혁명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그 혁명을 달성할, 잠재적으로 가장 유망한 해결책은 축산업을 키우지 않고 세포농업으로 규모를 줄이는 것이다. 혁명은 농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동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존중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부차적인 효과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세포농업이 가축에 대한 의존성을 줄인다는 사실이야말로 여러 환경주의자와 공중 보건 전문가 그리고 동물복지 지지자가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다. / 299p

 

 

 

 

 

 

 

 

 

 

 

 

 

   오늘도 나는 밥상에 꼭 고기 반찬을 떨어뜨리지 않고, 여전히 아이에게 고기를 잘 먹어야 속이 든든하고 튼튼해진다는 생각을 주입시키고 있다. 또, 청정고기가 출시되어 마트에 진열되는 날이 가까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100% 신뢰할 수 있을지 역시 미지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식탁에 오르내리기 위해 희생되는 동물의 생사에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며 보다 지구를 위한 선택에 습관을 들이자는 다짐을 해본다. 나와 내 가족 모두의 진짜 건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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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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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허물에 덮이는 피부병을 앓는 도시 속 사람들!

공포가 어떻게 조작되고 이용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강렬한 소설!

 

 

 

   D구역. 이 도시의 풍토병으로, 뱀의 허물 같은 각질이 온몸을 뒤덮는 피부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격리된 채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전문가들은 각질세포 형성에 관여하는 구조단백질이 돌연변이를 유발하는 티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이 유독 티셀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고 증세가 심한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때문에 다른 구역 사람들에게 D구역 사람들의 피부는 깨끗하다 해도 깨끗한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숙주와 다르지 않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레 초래하는 귀결은 D구역은 다른 구역과 격리돼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가 허물로 뒤덮이자 정부는 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다국적 제약 회사의 기업도시로 지정한다. 세계적인 피부과 질환 권위자이자 신단백질 전문가인 공 박사가 책임자로 와 방역 센터와 방역대를 만들어 T-프로틴을 공급하고 방역 지침을 발표한다.

 

 

 

   주인공인 ‘그녀’가 무릎을 힘주어 문지르자 갈라진 허물 사이로 진물이 진득하게 묻어나온다. 몸 안의 불순물이 배출되지 못해 곪은 냄새가 나고 씻어내야 잠시나마 가라앉힐 수 있지만, 물을 끼얹다가도 손톱에 허물이 걸리고 피고름이 주르륵 흐른다. 이제 통증은 대수롭지도 않다. 그녀는 허물을 벗기 위해 방역 센터에 입소한다. 방역 센터는 허물을 벗겨내는 도시 내의 유일한 기관이다. 방역 센터로 간 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방역버스에 올라탄다. 방역 센터에서 허물을 벗고 퇴소하면 다시 허물을 입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지만 이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치료 병동에서 머무는 기간은 평균 8주에 이르고, 감염률에 따라 다섯 그룹으로 나뉘는데 그녀는 위험 단계로 분류되어 그곳에서 김과 후리, 뾰족 수염, 임상시험으로 끌려가던 척을 만나게 된다. 파충류 사육사인 그녀, 센터 내의 정보를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고 어딘지 묘한 구석이 있는 아이 후리, 재생타이어 가게를 운영하고 늘 센터 내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불안해 보이는 김,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내고 욕을 하는 뾰족 수염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다 D구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던 전설 속의 거대한 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난 엄마 얼굴도 기억 안 나는데 공 박사는 우리 엄마에게 대해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냐. 엄마뿐이야? 이 세상에서 방역 센터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존재는 없을 걸. 모니터에 작대기들과 사진들이 떠 있었다고.”

“작대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그게 로마숫자더라고. 자기 표식 같은 건지도 모르지. 공 방사는 내 뼛속까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난 죽었다 깨도 그게 뭔지 모르겠더라고. 그 숫자들이 얽히고설켜서 내 몸이 이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숫자의 주인은 공 박사니까, 어떤 의미에선 공 박사가 내 몸의 주인이란 말이 영 틀린 것도 아니야. 안 그래? 흐흐.” / 50p

 

 

롱롱을 찾으면 정말 허물을 벗을 수 있을까. 영원히 허물을 벗으면 한 번도 허물 입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한 번도 버림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 72p

 

 

 

 

 

 

   전설 속 거대 뱀 ‘롱롱’이 허물을 벗으면 세상의 허물이 죄다 벗겨진다는 속설. 한때 B구역 산기슭에 있는 사설 동물원에서 일하다 산사태가 발생해 사라진 비단뱀 하나가 있었는데, D구역에 나타났다는 뱀이 이 비단뱀인지 정말로 롱롱인지 알 길이 없는 그녀는 방역센터를 퇴소하면 이들과 함께 롱롱을 찾아 나서자고 약속한다. 마침내 퇴소를 하고 모여든 이들은 100여 년 전에 불타 쇠락한 궁에서 수십 개의 땅굴을 파고 서식 중인 뱀과 마주한다. 구렁이도 아니고, 비단뱀도 아니며 아나콘다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크고 단단한 용골돌기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이 뱀이 정말 롱롱일까?

 

 

 

방역 센터는 ‘T-프로틴’을 하루에 두 번 이상 복용할 것을 권장했다. 처음 방역 센터에서 프로틴을 공급했을 때만 해도 80% 할인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도시 기능을 신속하게 정상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정부 지원금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보조금 혜택이 사라진 지금, 캔 한 개의 가격은 한 끼 밥값에 육박했다. / 73p

 

 

“신화와 전설이란 그런 겁니다. 인간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최소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막연한 희망이 허물을 벗겨줄 거라고 정말 믿는 겁니까?” / 102p

 

 

그녀는 뱀을 위한 신당을 차리고 싶지는 않았다. 뱀의 탈피를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어둡고 좁은 공간, 적절한 먹이 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도 따윈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저들의 기도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였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어디에 버려질 것인가, 두렵기까지 했다. / 124p

 

 

 

  이들 일행이 사로잡은 뱀으로 인해 전설의 뱀 롱롱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도시 전체가 흥분에 휩싸이게 한다. 뱀을 사로잡으려는 방역대장과 대치하고, 신에게 바칠 제물이라며 자신들이 마셔야 할 프로틴을 대신 뱀에게 바치면서 그렇게 공포와 탄성이 어수선하게 교차된 채로 사람들은 뱀이 허물을 벗는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몰려든다. 이런 가운데 오로지 척 만이 “공포는 방역 센터가 시민을 통제하는 도구입니다. 허물을 퇴치하기 위해 세금을 걷고 수십 종의 프로틴을 출시해 점점 가격을 올리고 방역대를 도심에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 허물을 입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허물에 대한 공포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을 지배합니다. 전설 따위에 기대 당신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겁니다.”라고 냉정하게 판단한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척이며, 지금 뱀에게 가장 현실적인 위협은 공 박사라고 내뱉는 그녀를 통해, 우리는 근거 없는 모순과 판타지에 기대서라도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는 군중의 심리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방역 센터 안에서 임상시험은 사실상 강제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임상시험 동의서에 사인하는 사람은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허물 쓴 사람들 중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임상시험 동의서엔 연구 내용에 관해 피상적인 내용만 기술돼 있습니다. 부작용에 대한 보상도 허술합니다. 일반적으로, 임상시험에 모두 통과해 시판이 허가되는 신약은 10%밖에 안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시험 중인 신약의 90%는 인체에 해롭다는 겁니다.” / 150p

 

 

“프로틴은 허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이 도시에서 거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그리고 롱롱의 전설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타이어 가게에 있는 뱀은 그 전설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롱롱프로틴은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뱀은 다시 숭배의 대상이 될 겁니다.” / 157p

 

 

 

 

 

  이제 그녀는 갖가지 방역 업체가 성업을 이루고 피부과와 피부 관리실, 피부보호제와 약, 향초, 피부 보호 기능을 첨가한 갖가지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허물에서 파생되는 경제 부양의 효과가 없었다면 시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거라는 아이러니와 마주한다. 즉, 시가 허물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구호는 부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진실이 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롱롱에게 병에서 낫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롱롱을 마케팅의 대상으로 이용한 프로틴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하며, 이제는 제 손으로 롱롱에게 프로틴을 바치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다. 이 기이한 현상과 허물에 대한 불안을 수치로 증명하고, 만일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고 고객을 설득한 어느 보험왕의 고백 같은 것들이 합쳐져 더 이상 실체는 보이지 않고 부풀린 환상만 남아 조작된 진실이 진짜 진실이라 믿게 되는 현실은 너무나 낯익어서 더 끔찍하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유명 프로그램이 순위를 조작해 대중을 기만하고, 다양한 곳에서 진실을 은폐하고 진영의 논리에 따라 의식을 조장하는 현상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야말로 조작된 도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조장된 공포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대중이 우스꽝스럽게 놀아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을 읽다보면 자주 간담이 서늘해진다. 누군가는 진실에 눈을 떠 허물을 벗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강제로 덧씌워진 허물을 자신도 모르게 덧입고 사는 불온한 현실을 은유적이면서 한국적 색채의 판타지로 승화한 독특한 작품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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