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오늘의 젊은 작가 24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비하는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자신의 무언가를 소모당하는 자들의 땅, 방콕!

위태하고 불온한 삶 속에서 저마다의 존엄을 사수하기 위한 몸부림이 펼쳐진다!

 

 

 

   동남아시아의 빛나는 메트로폴리탄, 휴양과 향락의 도시 방콕. 뜨거운 태양 아래 화려한 사원이 도시를 웅장하게 밝히는 낮이 지나고 나면, 유흥과 만취에 달뜬 이들이 서로를 유혹하고 희롱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 붓는 밤이 이내 찾아온다. 다시는 낮이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한낮의 번민과 고민은 짙은 유흥의 향취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천국의 도시라 부른다.

 

 

 

   내게도 방콕은 그런 도시였다. 차오프라야강 사이에서 전통수상가옥과 드높게 뻗어 있는 도시의 화려한 빌딩이 이쪽과 저쪽의 삶을 나누고, 공장에서 찍어냈는지 직접 만든 것인지도 모를 공예품을 늘어놓고 한국말로 흥정하는 상인과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관광객들의 고단한 발을 마사지해주느라 정작 자신의 손과 얼굴은 피로에 찌들려 있는 여인들이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곳. 고작 몇 걸음 앞에서 지독한 환락의 안개가 발걸음을 붙들고, 화려한 색채에 이끌렸다 추악한 향취에 이내 어지럼증을 느끼게 하는 곳. 그곳은 그렇게 소비하는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자신의 무언가를 소모당하는 자들의 땅이었다.

 

 

 

 

 

 

머무르는 자를 허락하지 않는 땅, 내몰린 사람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스물네 번째 소설 『방콕』은 천사의 도시라 불리나 천국을 꿈꾸었던 자들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던 태국의 도시 방콕을 배경으로 우연과 오해로 점철된 삶의 불온성을 냉소적으로 묘파한 작품이다. 외국인 노동자 훙, 피아니스트 정연, 정연의 오빠이자 조지타운 대학교의 MBA 과정을 밟고 있는 섬머의 연인 정우, 정연과 정우의 엄마이자 훙이 다니고 있는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윤 사장, 은퇴한 미국인 벤, 환경운동가이자 벤의 딸인 섬머, 벤의 어린 여인 와이 그리고 웨이트리스 린까지 국적과 성별, 신분이나 지위, 어느 하나 같을 것 없던 인물들이 하나의 교집합을 이루며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전개해간다. 사랑, 연민, 치정, 복수, 파국으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유형들은 시종일관 독자들의 마음을 편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끝내 마주하게 되는 결말은 그 어떤 비극보다 치명적이고 진한 잔상을 남긴다.

 

 

 

 

   훙의 회사는 장갑차와 탱크 부품 등을 만들어 원청 업체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이다. 직원 수는 302명이고 그중 31명이 이주 노동자다. 서른한 명 중 다섯 명이 불법 이주 노동자인데 훙이 여기에 속한다. 훙은 어릴 적, 동생인 트린과 함께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호치민의 에이즈 고아원에서 지내다 삼촌과 롱미로 갔고, 4년 전 러시아 어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가 베트남 노동자를 따라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는 다른 노동자들보다 작업량이 많이 주어져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의학 공부를 하는 트린을 뒷바라지하다 언제부턴가 연락이 끊기자, 이제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뜰리에를 가졌으면 하는 게 그나마 소원이라면 소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훙은 손가락 세 개를 다치고, 윤 사장은 얼마의 보상금과 치료비를 지원하기로 하고 그를 해고한다. 평소 윤 사장의 딸이자 피아니스트인 정인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으며 연모하고 있었던 훙은 사고 후, 다시 오갈 데가 없는 신세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여 그녀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한다. 한편, 윤 사장에 의해 악보 밖의 현실 따위는 모른 채 그저 커피 쿠폰에 도장을 찍듯 수많은 콩쿠르에 참가하고 우수한 성적을 받았던 정인은 공연을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 날 밤, 훙에게 불시의 습격을 당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는다. 이 날의 치욕과 상처로 정인은 이전과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되버린다. 거지 같은 머리 스타일을 한 남자가 추근거리지 않았더라면, 훙이 분노의 대상을 정확히 했더라면, 자신이 아니라 엄마였다면, 아니 처음부터 이주 노동자들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여전히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이자 엄마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딸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분노하면서.

 

 

 

 

트린에게서 소식이 끊긴 후, 훙은 해야 할 일을 머리에서 조금씩 지워 나갔다. 지금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거나, 자신이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만 있었다. 그 욕망만큼, 한 시간 뒤조차 예측할 수 없는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없는 삶에서 벗어난 것이 중요했다. / 39p

 

 

 

 

 

 

   ‘런던에는 300가지 종교와 세 종류의 소스가 있어. 파리에는 세 가지 종교와 300종류의 소스가 있고. 방콕은 어떤지 알아? 300종류의 소스와 300종류의 여자가 있지.’

   방콕에서는 남자들의 수다꺼리 하나쯤으로 여기는 이와 같은 말이 있다고 한다. 와이는 코사무이 해변을 가득 메운 젊은 여자들을 보며 자주 딴생각에 빠지는 벤을 보고 한없이 우울해진다. 벤은 미국인이었고 2년 전 방콕으로 은퇴 이민을 왔다. 그는 인생의 반을 군인으로 살았고 나머지 반은 대형 유통업체 중간관리자로 일했다. 저축한 돈 대부분을 주식으로 날렸지만 매년 4만 달러 정도의 연금이 나왔고 필라델피아에 세를 준 집이 남아 있었다. 태국 북부 출신인 와이는 벤을 ‘탕푼 투어’에서 만났다. 투어 도중 와이는 벤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들뜬 얼굴로 방콕행 기차에 올랐다. 벤은 와이와 함께 천국의 방문객처럼 방콕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함께 살 집을 구했다. 늦은 밤에는 팟퐁을 갔다. 팟퐁은 유명한 환락가였다. 와이는 방콕의 여자들을 만났다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버리는 다른 남자들처럼 벤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수많은 커플들이 그랬다. 그들은 종착역이 아닌 정거장처럼 방콕에 머물렀다. 쾌락을 충전하고 있는 힘껏 소모한 다음 부지불식간에 떠났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우면 느닷없이 다시 찾아왔다. 그래서 이 땅을 살아가는 와이나 린과 같은 부류의 여자들에겐 금세 사라지는 건 무의미하다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을 자신에게 줄 사람이 절실하다.

 

 

 

 

방콕은 그러려고 오는 거야. 나도 세 번째 방문인데 여전히 방콕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한다고. 배려, 헌신, 신뢰 같은 감정들이 개입될 틈이 없지. 여기 여자들도 대부분 그걸 알고 있어.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서로 동의만 하면 문제될 게 없잖아?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섹스는 애들이나 하는 거야. 존중과 사랑은 언제 해?

존중과 사랑은 미래를 위해 남겨 두는 거지. 현재는 그냥 즐기는 거고. 떠날 시간이 오면 과거는 방콕에 던져두고 훌훌 날아가는 거야. / 72p

 

 

누구도 싸움에 간섭하지 않았다. 간섭하면 칼부림이 날 때도 있었다. 더 치열하고 비열하게 싸우는 건 간섭으로 인한 다툼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사유와 사투 중에서 사유를 빼면 그게 바로 삶이며, 가끔 둘 사이에서 찌부러지는 게 삶이기도 하다고. / 115p

 

 

 

 

   이처럼 저마다 자신의 욕망을 좇아 원하든 원치 않든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소설 속에서 환경운동가인 섬머 만은 유독 특별한 인물처럼 여겨진다. AAI 아시아 지부 캠페인 매니저를 맡고 있는 섬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적어도 자신만큼은 모른 척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유별난 그녀의 정의로움은 외부로부터 수시로 공격을 받는다. 산악고릴라 밀렵 근절 운동을 벌인 동물학자 다이앤 포시가 자신의 텐트에서 손도끼로 얼굴이 난자당한 채 발견되고, 동물 구조단원은 복면의 괴한에게 납치되어 목이 잘린 시체로 돌아온 사건을 그녀라고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신변을 위협하는 자들이 주변에서 그녀를 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끝내 코끼리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탄다. 너무나 무모하고, 어쩌면 이 결말이 행복하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지만 그녀는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섬머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정의가 짓밟히고 동물의 존엄이 위협받는 현실을, 그것을 수호하는 일조차 공격받는 부당한 현실을 담고자 한 작가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만, 한편으로는 그녀 역시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에 몰두하느라 정작 내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편협한 인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난 선한 사람이 아니야.

나쁘기만 한 사람도 아냐. 많은 사람이 그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일이라고 생각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사람이 더 많아. 그래서 끝없이 고통이 반복되는 거야.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눈을 감지 않는 게 중요해.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어. / 53p

 

 

많이 벌려면 많이 잃어야 해.

뭘 잃어?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뭔데?

존엄. / 182p

 

 

정우는 한숨을 쉬었다. 정우는 타인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마다 않는 사람들을 보며 종종 생각했다. 위대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동시에 치료도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그들의 행동은 마음속 어딘가가 크게 구멍이 난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정우는 눈앞에 있는 섬머가 바로 그런 사람처럼 느껴졌다. / 234p

 

 

 

 

 

 

   이렇게 제각기 다른 인물들이 서서히 방콕이라는 무대로 모여든다. 윤 사장은 갑자기 돌변한 딸 정인과 자신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훙을 찾아야만 한다고, 그를 찾으면 나머지 손도 부숴버릴 거라며 혈안이 된 상태로 사람을 붙여 그를 추적하고, 이를 알 리가 없던 훙은 린을 만나며 이제 방콕이야말로 자신이 자리를 잡고 살아갈 곳이라고 믿었다가 문득, 정인의 오빠인 정우와 섬머와 마주치며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와이는 벤이 미국에 있는 집을 처분하고 돌아온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깊은 불면증에 시달린다. 정우는 한사코 만류해보지만 코끼리 병원으로 가겠다는 섬머를 더 이상 막을 길이 없다. 가만 보면 이야기는 마치 잘 짜놓은 함정에 걸려든 주인공들이 러시안룰렛이라는 게임에 운명처럼 합석하게 된 모양새처럼 보인다. 한 시간 이후의 삶조차 예상할 수 없는,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반드시 누군가는 희생되어야만 끝나는 게임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방콕은 누구나 한 번쯤 방문하고 싶은 도시였다. 누구든 머물고자 한다면 머물 수 있고, 숨고자 한다면 숨을 수 있는 도시였다. 훙은 죽은 자신의 아버지를 이곳에서 만났다고 해도 받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우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훙은 잠시 희망을 품기도 했다. 저 해맑은 웃음을 간직한 남자는 기적처럼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할까? 정말 우연일 뿐일까? / 247p

 

 

 

  소설 속의 『방콕』은 동물이든 사람이든 하나의 생명체에게 지옥인 곳이 다른 생명체에게 천국일 수는 없다고, 누군가의 고통은 부메랑처럼 결국 다른 이들에게 돌아온다는 어떤 지독한 순리를 방콕이라는 도시가 지닌 이미지를 이용해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또 간결한 문체, 냉소에 가까운 유머, 지독한 고독과 실존의 문제를 다층적인 캐릭터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거리낌이 없다. 특히 폭주하는 라스트 스퍼트와 인간의 희비극을 유연하게 다루는 능력은 비상하기까지 하다. 이것이 김기창이라는 이름의 작가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