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책!
더 나은 도시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꿈꾸게 하는 시도와 성찰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특징을 몇 가지 들어보자면 ‘교육 도시’, ‘계획 도시’, ‘살기 좋은 도시’, ‘취업하지 힘든 도시’, ‘유행에 민감한 도시’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정도 만으로도 알 만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대구’다. 얼마 전에 읽은 기사에 따르면 서울 다음으로 가장 비싼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 대구의 수성구이며, 그곳에서 많은 서울대생을 배출하기로 이름난 고등학교들이 모여 있다는 이유로 대구는 교육의 도시가 되었다. 또 도로환경이 지리적 장애물도 거의 없고, 직선으로 이루어진데다 넓고 격자형으로 잘 뻗어 있어 교통 환경만큼은 그 어느 도시보다도 단연 최고라고 자부할 만하다. 솔직히 대구에서 살다가 서울이나 부산 등을 가면 심각한 교통난과 복잡한 도로에 어리둥절 할 때가 많다. 이렇게 도시 자체가 계획적으로 지어진 덕분에 살기에 좋은 도시라는 점도 긍정할 만하다. 그러나 소비지향적인 도시로 대기업이나 이렇다 할 수입 자산이 없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취업하기 어려운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흔히 대구의 지역주의를 비하하는 말로 ‘고담 대구’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사회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간혹 발생한 것에 비하면 이렇다 할 자연재해도 없는 편이라 조금은 섭섭한 말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떤 곳인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 정도 선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일상에서 느끼는 어느 정도의 좋은 점과 불편한 점 정도로만 도시를 생각할 뿐이지,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했으며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 수준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도시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서 관심을 끌어내느냐?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도시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게 만드느냐?’에서 출발한 이 책의 시도가 제법 특별하고 남다르게 읽힌다. 앞서 그녀의 책 <여자의 독서>를 읽어본 적이 있는 데다, tvN에서 방영된 <알쓸신잡3>에 출현해 그녀의 건축에 대한 놀라운 시각과 냉철한 성찰을 엿보았기에 이번 책은 그냥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되었다.

도시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왜 도시의 스토리에 주목해야 하는가? 도시 건축가인 저자는 도시 속 다양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총동원되었을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스토리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고 말한다. 권력자의 욕망, 시민들의 바람, 기획자의 고충, 설계자의 고민, 공정에 참여한 수많은 작업자들의 땀과 때로는 피까지도 얽히고설킨다. 유명한 공간이라 해서 항상 칭송받기만 한 것도 아니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때로는 비판받고 무시당했으며 때로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새로 발견되거나 그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유명한 공간들 역시 그들이 놓여 있는 상황과 맥락에서는 일상적인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공간들이 이곳저곳 숨어 있는 곳이 도시이기에 도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흥미롭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12가지 ‘도시적’ 콘셉트』는 도시 3부작의 첫 번째 책으로, 도시가 이야기가 되면 될수록 좋은 도시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희망 아래 콘셉트에 따라 도시를 읽는 핵심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이야기란 현상의 영역인지라 수없는 변조와 변용을 통해 다채로워지고 끊임없이 진화하기 마련인데, 콘셉트의 얼개를 통하면 현상 아래에 깔려 있는 핵심 구조를 훨씬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열두 가지 콘셉트를 제시하는데, ‘익명성, 권력, 기억과 기록, 예찬, 대비, 스토리텔링, 코딩과 디코딩, 욕망과 탐욕, 부패에의 유혹, 현상과 구조, 돈과 표, 진화와 돌연변이’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이 콘셉트들을 우리의 도시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녹여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도시 이야기는 풍요로워지고 도시적 삶 역시 풍성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콘셉트 1장에서는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길과 광장’이 과연 익명성이라는 도시의 근본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살펴본다. 이어 콘셉트 2장 ‘권력과 권위’ 편에서는 권력의 존재를 증명하고 과시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용했던 도시와 건축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또 도시를 안전하고, 건강하고, 풍요롭고 강력하게 만드는 권력이 거꾸로 무능하고 부패하여 도시를 망가뜨리기도 하는 속성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의 문제점까지 아울러 살펴본다. 특히 청와대와 국회가 국민들에게 개방됨과 동시에 권력 공간의 구성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바꾸어갈 수 있는지 고민이 필요한 시기임을 지적하며 어떤 공간이 건강한 권력 개념을 만드는 가 다함께 고민해볼 수 있기를 강조한다.
신분 제도가 철폐된 근대 이후 도시에서도 ‘끼리끼리 모여 사는 방식’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조금이라도 더 ‘우리’가 되어 익명성의 위험을 줄이려는 것이다. 도시계획사와 건축 유형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끼리끼리 모여 살기 위해서 갖은 수법이 고안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무리 다른 이유로 포장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더구나 그것이 ‘주류 흐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 34p
광장의 명과 암은 극과 극을 달린다. 자연발생적 대 계획적, 시민 협치 대 권력 주도, 자유 대 통제 등의 양극단을 오가는 공간이다. 우리가 지금 보는 광장은 주로 관광 공간이 되어 밝고 경쾌한 면들만 보이지만, 기실 무거워 보이는 역사 현장으로서의 광장이 오히려 광장 정신을 근본적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권력의 영광과 영예를 보여주는 장소로 광장을 계획적으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다채롭게 쓰이는 ‘너른 장소’가 광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광장은 언제나 시민의 에너지, 변화의 에너지, 혁명의 에너지가 결집하고 폭발하는 공간이다. / 49p
‘권력 공간은 권력 그들만의 문제 아닌가?’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력 공간은 권력 공간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다. 권력 내 조직 문화(수직적 vs. 수평적), 일하는 문화(제도적 vs. 현장적, 관습적 vs. 창의적 등), 운영 문화(상명 하달 vs. 자율성), 교류 문화(폐쇄적 vs. 개방적)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회 전체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종의 ‘기조 문화’가 되는 것이다. 그런 문화는 비단 관료들이 일하는 청사에서만 나타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료들이 관리하는 공간들에도 알게 모르게 그 성격이 녹아든다. / 94p
‘사실이 역사로 남는 게 아니라 기록되는 것이 역사로 남는다.’ 이는 누구나 인정하는 명제다. 기록된 역사를 꼭 사실로만 보지 말라는 경고이자, 기록된 승자의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이면을 들여다보라는 교훈이고, 기록이 그만큼 중요하므로 충실하게 기록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는 기록이란 ‘권력’의 문제이자 ‘정체성’의 문제이고 또한 ‘자존감’의 문제이자 ‘명예’의 문제라고 말한다. 아무리 세속적인 허영심이라 할지라도 명예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극복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책은 “도시는 명예를 빛나게 한다”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에 의거하여, 과거의 유산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보전하여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 시대의 과제를 3장 ‘기억과 기록’ 편에서 점검해본다. 개인적으로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설계한 이가 우리 현대건축의 거장이자 ‘인문주의자, 휴머니스트, 문화 거인, 건축 거장’으로 알려진 김수근으로, 같은 건축가로서 회의를 느끼는 대목에서 서글픈 아이러니를 느끼기도 했다.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우리 시대는 열심히 역사의 기록을 발굴하고 그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것. 문제도 있고 부작용도 생기지만 열심히 남겨야 한다. 그만큼 없앤 것, 없애고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일부러 지운 것, 감춘 것, 숨긴 것도 너무나 많다. 없어진 현장, 사라진 흔적, 묻혀버린 진실, 지워진 기억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더욱더 뿌리를 찾고 그 흔적을 남겨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만들고 있는 역사를 아끼며 지켜야 상실을 거듭하지 않을 수 있다. / 119p



이어 콘셉트 4 ‘알므로 예찬’ 편에서는 자신의 도시를 제대로 예찬하는 역량의 중요성을, 다음 ‘대비로 통찰’ 편에서는 다른 문화권 도시의 통찰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우리 도시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모색한다. 이 책의 이름이 ‘도시 이야기’이듯 모든 도시, 모든 공간은 특유의 스토리를 안고 있다는 관점 아래 콘셉트 6 ‘스토리텔링’ 편에서는 공간 스토리텔링의 파워와 배어 나오는 스토리에서부터 만드는 스토리까지 진정한 도시 스토리를 이어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본다. 특히 시에서 운영하는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실제 역사를 왜곡해가며 도시 콘셉트를 저해하는 각종 스토리텔링 사업의 병폐는 나 역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에서 “콘텍스트를 읽으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어느 것도 홀로 서 있지 않다. 다른 무엇과 관계를 맺으면서 성격이 규정된다. 만약 우리가 어떤 도시 공간에서 감이 동하는 것을 느낀다면 그 공간이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녹아든 듯한 자연스러움, 언제나 거기에 그렇게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듯한 영원의 느낌, 놀라움, 생고함, 극한의 대비, 의외성, 이야기를 걸어오는 듯한 친밀함 등 그것은 풍경과 식생과 다른 건물들과 길과 광장과 조형물들과 조화와 변조를 이어간다. / 147p
‘명품진품’이라는 브랜드 성격의 이름보다는 ‘진본’이라 칭하는 것이 더 좋다. 진본성이라는 뜻을 갖는 오센티시티라는 다소 어려운 영어 단어가 더 적확하게 뜻을 담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딱 그것 하나만 있’기에 나오는 힘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매혹적이어서, 너무 화려해서, 너무 진솔해서, 너무 웅장해서, 너무 소박해서, 너무 우아해서, 너무 뜻이 깊어서’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이것이 공간의 진짜 힘이다. 바로 거기에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나오는 힘이다. 이 세상의 모든 공간은 단 하나씩만 있다. 콘텍스트에 얽힌 인연으로 발생하는 ‘유일성’이다. 그게 진본의 힘이 된다. 사람들은 그 오센티시티를 느끼려고 굳이 먼 길을 떠난다. / 150p
다음으로 우리는 공간이 품은 함의들을 제대로 디코딩하고 있는지, 혹은 조종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보는 ‘코딩과 디코딩’, 부동산 거품과 사유화, 젠트리피케이션, 뉴타운 등 머니 게임으로 도시의 건강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욕망과 탐욕’ 편에서 살펴본다. 초고층 아파트 즉 바벨탑 공화국이 되어버린 도시 속에 존재하는 ‘부패에의 유혹’을 다룬 다음 편 역시 이와 결을 같이 한다. 끝으로 우리 사회의 현상 밑바닥에 흐르는 구조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어떤 구조적 원인이 작동하는 것인지 살펴보는 ‘이상해하는 능력’과 도시 간 양극화와 도시 속 양극화로 몸살을 앓는 우리 사회의 현 주소를 살펴보는 ‘돈과 표’도 깊은 고민거리를 남긴다.
아파트 단지는 개인주의 성향일까, 집단주의 성향일까? 현대인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아파트를 선호한다는 해석도 있으나, 아파트 단지 선호 현상은 개인주의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더 유효하다. 이웃끼리 알고 지내는 공동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서로 어떤 사람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끼리끼리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작용하는 것이다. 비슷한 평형끼리 모아놓는 것도, 한 동에 대개 같은 평수를 모아놓는 것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 220p
다만 이후로 여러 번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무산되었던 현상은 실망스럽고 또 의아하다. 개발 산업의 관성, 대규모 소비자의 욕구, 기존 소유자들의 이해가 맞물리며 개발 머신은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굴러갔던 것이다. 고속 성장에 따른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 과열 경기가 초래한 문제가 드러났던 1980년대 후반, 글로벌해지는 자본 유동성에 굴복했던 1990년대 후반, 전 세계적인 금융과 부동산 거품이 속절없이 터져버렸던 2000년대 후반 등 그때마다 근본적인 체질 개선 과제가 제기되었으나, 얼마 지나면 오히려 또 다른 부동산 개발로 위기를 탈출하려 했다. 그러니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권과 행정 당국과 개발 권력과 그와 결탁한 언론 권력을 수레바퀴 속에서,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역시 머니 게임의 공범이 되는 것 아닌가? / 230p



저자는 “제일 좋은 도시는 어디인가요?”의 최고의 답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이지요”가 아닐까 싶다고 말한다. ‘여기에 있다가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올 것 같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답은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아무리 모자람이 많이 보이더라도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도시를 제일 좋은 도시로 여기는 마음가짐이 생기는 것. 어쩌면 그것은 도시 이야기를 이해하고 고민해보며 각종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기 위한 개인과 사회적 통찰이 함께 이루어졌을 때에야 가능한 일일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달라진다고 나는 믿는다’ 던 그녀의 말처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이 보다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 도시적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길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