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업 - 상 - 아름답고 사나운 칼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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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왕의 업을 이룰 것인가!

대륙을 아우르는 장엄한 스케일과 궁중의 치열한 암투를 섬세하게 그린 대작의 서막!

 

 

 

   한때 <측천무후>, <황제의 딸>과 같이 중국 황실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을 비롯해 『삼국지』와 같은 중국의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특유의 호방하고 장엄한 스케일에 궁중 내의 치열한 암투까지 섬세하게 다룬 『제왕업』을 접하는 순간 단 몇 페이지만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권력의 비정함과 안팎으로 끊임없이 생사의 위협에 시달리는 왕현과 패업의 꿈을 이루기 위한 소기의 위험천만한 사랑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서 나는 내내 초조한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달음질치느라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상권과 하권으로 나눈 두꺼운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드라마 한 편을 정주행하는 마음으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읽었던지라 2020년에 개봉될 드라마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것 또한 나뿐만이 아닐 듯하다.

 

 

 

 

 

 

가문의 영예와 책임, 그 풍랑 속의 중심에 선 여인

 

 

   어머니가 황제의 누이요, 고모가 황후이며, 아버지가 조정 최고의 권력자이자 낭야왕씨 가문의 수장인 진국공의 딸로 자라 그야말로 금지옥엽, 구중궁궐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자라난 왕현이 열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다. 최고 권력층이 드나드는 궁에서 살다시피 하며 권력의 비정함과 무심함을 어렴풋이 겪긴 했으나 이제까지는 그저 밝고 귀하게 자라온 그녀였다. 오랫동안 황제가 총애하는 사씨 가문 출신의 사 귀비 소생이자 3황자인 자담을 연모하여 당연히 그와 정인이 되리라 믿었고, 자담 또한 그녀를 그 누구보다도 아끼고 귀하게 여겼으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남방 변경의 오랑캐와 반군의 결탁을 몰아내고 나라의 위대한 공을 세운 예장왕의 혼처로 왕현이 정해지고 만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은 황후인 고모와 아버지인 진국공이 이 혼사에 누구보다 적극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도 무척 사랑한 사람이 있었단다. 한때 그는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자 또 슬픔이었지. 그 기쁨과 슬픔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 그것을 얻든 잃든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단다. 그러나 또 다른 얻음과 잃음은 나 혼자만의 기쁨과 슬픔보다 훨씬 깊고 중하며, 살아 있는 한 거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었지. 그것은 바로 가문의 영예와 책임이었어.”

가문의 영예와 책임. / 57p

 

 

 

 

 

 

 

   가문의 영예와 책임을 등에 업고 예장왕과 혼례를 치른 첫날, 뜻밖의 변고가 일어나 첫날밤은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북방 변경의 상황이 매우 급박하여 새신랑이 첫날밤을 치르기는커녕 신부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떠난 것이다. 왕현은 대국과 가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대가가 이런 치욕이었다니 울분을 참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아직도 얼굴을 내비추지 않는 남편에게 마음에도 없는 감정을 애써 꾸며낼 필요 없이 이렇게 저렇게 한평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체념하려는 찰나에 느닷없이 괴한들이 들이닥쳐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렇게 예장왕 소기의 부대에 의해 일족이 몰살당한 것을 복수하려는 하란잠에 의해 납치를 당했건만, 열흘이 지나도록 자신을 구하러 와줄 이렇다 할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왕현은 이내 실망한다. 심지어 탈출 시도도 번번이 가로막힌다. 나는 이 같은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지금 그는 어디 있단 말인가? 그에 대한 원망이 더더욱 강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한 회색 옷을 입은 사내로부터 소기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하지만 진즉에 자신을 구해낼 수 있었음에도 잠자코 기다린 데다 자신의 안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적의 수중에서 이토록 곤경을 겪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그에게 더욱 몸서리쳐질 뿐이었다.

 

 

 

어디 하란잠뿐이겠는가……. 전쟁으로 고통을 받은 백성들 가운데 부모 형제 없는 이가 어디 있을까! 처량하게 홀로 남아 분노를 터뜨리던 그 소년에게 어머니와 여동생은 아마 유일한 행복이자 근심이었을 것이다.

상처투성이인 그가 가엾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원한을 품은 대상은 내 낭군, 내 나라였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의 복수를 위한 장기짝이 되어 있었다. / 153p

 

 

 

   이윽고 운명의 날이 닥치고, 소기를 노리는 하란잠과 그런 하란잠을 노리는 소기의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며 왕현의 목숨이 위태로운 가운데, 극적으로 소기가 왕현을 구출해낸다. 그렇게 생사의 위험을 건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야 드디어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되고, 그간에 서로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었던 상처와 오해들을 마침내 풀 수 있게 된다. 비록 시작은 어긋났지만,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코 하나로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마음도 서로에게 가 닿기 시작한다.

 

 

 

“당신과 나 사이에 다른 사람은 없소.”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사랑 역시 바람 앞의 등불인 가운데, 왕현은 소기와 자신의 혼인 뒤에 숨겨진 충격적인 비밀과 마주하게 되고, 또 자신이 이들의 운명을 쥐고 흔들 거대한 피바람의 중심에 서게 되었음을 직감한다. 특히 자신의 두 손으로 소기에게 보내기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든 것을 주었던 아버지와 고모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들이 가문과 스스로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왕현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지난날의 보호막이 사라진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덕분에 그녀는 소기의 여인이자, 이 나라를 이끌 제왕의 여인으로 점차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 아름다운 모든 것은 이미 풍진세상에 떨어져 내려 잿더미로 화해버렸다. 그때 나는 기꺼이,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버지가 가리키는 길로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원망도, 후회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버려졌다는 절망감이 마음속에 뿌리내렸을 뿐이다.

숱한 고난을 겪고 생가의 기로에 서보기도 하면서 마침내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깨달았다. 누구의 곁에 서야 비바람을 피하고 맑은 하늘을 가질 수 있을까? 지난날의 보호막이 사라진 지금, 어디에 몸을 의탁해야 할까?

아버지, 내가 충성을 바치는 것은 단 한 번뿐입니다.

3년 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충성을 바쳤으니, 이번에는 내 낭군의 곁에 서렵니다. / 390p

 

 

시든 꽃은 미인처럼 박명했다.

팔자를 잘못 타고났고, 길을 잘못 택했고, 사람을 잘못 만났다.

팔자를 잘못 타고나도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일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가장 가엾은 것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품은 뜻은 높지만 타고난 팔자가 더없이 기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걸음마다 가시밭길이 펼쳐져 뚫고 나가지 못하면 그 자리에 갇혀 죽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 238p

 

 

 

 

 

 

   난세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권력 다툼과 궁중 암투, 누가 누구를 믿어야 할지 가족조차 믿을 수 없고 자칫 잘못 내딛으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순간이 계속되는 가운데, 과연 왕현과 소기는 자신들의 사랑을 지켜내며 제왕의 위업까지 달성할 수 있을까. 한겨울 서릿발처럼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덩달아 이리저리 나부끼는 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채로 하권으로 달려가기 위해 여기서 일단락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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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생 새움 세계문학
기 드 모파상 지음, 백선희 옮김 /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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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의 삶에서 우리 모두의 인생을 마주하다!

쓸쓸하고도 고독한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그늘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아름다운 고전!

 

 

 

   프랑스 고전 작가들의 판매 부수를 집계한 《르 피가로 리테리르》지에 따르면 8년이라는 자료 조사 기간 동안 장르에 상관없이 가장 많이 팔린 작가로 모파상을 꼽았다고 한다. 몰리에르, 에밀 졸라, 알베르 카뮈, 빅토르 위고 등을 제치고 말이다. 모파상이라는 이름의 유명세에 비하면 아직 그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한 것이 다소 부끄러워지는 결과다.

 

 

 

   특히 모파상은 10년이라는 짧은 문단 생활에서 단편소설을 무려 300여 편이나 쓰며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는데, 이 가운데 세계인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은 작품이 ‘Une vie’, 즉 ‘어느 인생’ 혹은 ‘일생’을 의미하는 바로 이 작품이라고 한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번역본이『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처음 출간된 판본의 번역이 영어 번역본 제목 ‘A woman's life’를 그대로 옮긴 일본어판을 번역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니, 이 작품을 단순히 여성의 일대기로 단정 짓지 않으려는 역자의 시도가 남달리 다가온다. 사실 단편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한 여성의 불운과 불행으로 점철된 기구한 삶’으로 읽힐 수 있을 법하지만, 그것을 한 개인에게 닥친 어떤 특정된 서사로만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은 일종의 연대 의식과 세대적 공감에 따라 보다 입체적으로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녀’가 아니라, ‘여성’을,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 380p     

 

 

 

   『어느 인생』은 주인공인 잔느의 시점에서 시기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전개로 나눌 수 있다. 수녀원 생활을 마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잔느가 푀플에 있는 자신의 성에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몽상하며 사랑에 대한 달콤한 꿈을 꾸는 시기가 바로 첫 번째다. 딸을 행복하고, 착하고, 바르고 다정한 여자로 만들고 싶었던 남작은 딸을 사크레쾨르 수녀원으로 보냈고, 엄격히 유폐되어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던 잔느는 열일곱 살이 되자 마침내 오로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아름다운 성에서 자유와 무한한 희망에 흠뻑 도취된다. 그녀는 긴긴 밤 동안 자신의 마음이 속삭임으로 가득 차 넓어지고, 욕망이 별안간 마음에 우글거리는 것을 느낀다. 밤의 말랑한 흰 빛 가운데 초인적인 전율이 질주하고, 붙들 수 없는 희망이, 행복의 숨결 같은 무엇이 펄떡이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손을 맞잡고, 몸을 기댄 채, 서로의 심장이 펄떡이는 소리를 듣고, 어깨의 체온을 느끼며, 달콤한 여름밤의 소박함에 둘의 사랑을 섞으며 걸을 테고, 그렇게 오직 사랑의 힘으로 서로의 비밀스러운 생각까지 쉽게 꿰뚫어 볼 정도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랑을 상상하고, 꿈꾼다. 누구나 꿈꾸는 운명 같은 사랑을.

 

 

 

 

 

 

   그러던 어느 날, 사제를 통해 작년에 죽은 장 드 라마르 자작의 자제가 에투방 마을에서 작은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빚을 청산하고 소박한 거처에서 성실히 돈을 모은 데다 사교계에서도 좋은 평판을 쌓아 꽤 괜찮은 조건의 남편감이었다. 마침 미사를 갔던 남작 부인과 잔느는 그곳에서 쥘리앵을 만나고, 그들이 멀게는 친분이 있는 사이임을 알게 되면서 자주 교류를 하기 시작한다. 자작은 잔느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그의 검은 벨벳 같은 눈이 잔느의 파란 눈과 마주치곤 했는데, 그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무엇인지 채 분별하기도 전에, 사랑에 빠지고 싶었던 잔느의 소망과 점차 적극적으로 변하는 쥘리앵의 구애, 사랑하는 딸을 곁에 두면서 데릴사위까지 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남작 부부의 뜻이 모두 더해져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이렇게 소설은 열일곱 살 무렵의 잔느를 통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고 결혼으로 하여금 사랑을 완성하려는 여성의 통속적인 애정관과 사랑관을 섬세한 배경묘사와 심리묘사로 표현함과 동시에 귀족들의 관습과 세태를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암시를 예고하기도 한다.

 

 

 

그들은 검소하게 생활했기에 그 정도 수입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집안에 항상 뚫려 있는 밑 빠진 독인 선량함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 선량함은 태양이 늪의 물을 말리듯이 그들 수중의 돈을 말렸다. 돈은 흐르고, 새고, 사라졌다. 어떻게? 누구도 알지 못했다. / 23p

 

 

가끔은 잔느가 로잘리를 대신해 어머니를 산책시켰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딸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얘기했다. 잔느는 그 오래전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사람의 생각과 욕구가 유사함에 놀라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수많은 감동을 느끼며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먼저 전율했다고 상상하는데, 사실 똑같은 감동이 이미 최초 피조물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으며, 최후의 남녀들의 심장을 뛰게 할 것이다. / 47p

 

 

어느 날 저녁, 스무 살이었던 리즈가 물에 뛰어들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삶에서, 그녀의 태도에서 그 무엇도 그런 광기를 예감하게 하는 건 없었다. 그녀는 반쯤 죽은 상태로 건져졌다. 그녀의 부모는 그 행동의 불가사의한 원인을 찾는 게 아니라 성이 나서 두 팔을 치켜들고 얼마 전에 말 ‘코코’가 구덩이에 빠지면서 발이 부러져 도살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에 대해 말하듯이 그저 “경솔한 짓”이라고만 말했다. / 80p

 

 

 

 

 

 

   잔느와 쥘리앵,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그들이 함께 시작한 삶은 어떠할까? 결혼이라는, 파기할 수 없는 이 긴 대면에서 서로에게 어떤 기쁨, 어떤 행복, 혹은 어떤 환멸을 마련해 두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서로 진지한 물음과 답변이 없이 돌입한 그들의 결혼은 첫날부터 삐걱거리고 만다. 잔느로서는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고 마치 그녀를 소유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듯 난폭하게 구는 쥘리앵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내라면 마땅히 남편에게 기꺼이 자신의 몸을 맡겨야 한다고 믿는 쥘리앵으로서는 그녀를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신혼여행지인 코르시카에서는 낯선 이국의 매력이 혐오감과 모욕감을 잠시 덜어주었지만, 돌아와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그로인해 그녀는 깊은 우울감에 빠지고 만다. 심지어 쥘리앵이 잔느와 자매나 다름없는 하녀 로잘리와 간통을 했다는 사실이 들통이 나고, 그의 사생아까지 낳은 사건은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뿐만 아니라, 평소 마음을 나누며 가까이 지냈던 백작 부인과 쥘리앵이 내연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걸어 닫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오로지 자신의 아들인 폴을 향한 집착만 커져갈 뿐이었다. 이렇게 불안한 결혼 생활의 서막과 함께 불행으로 점철된 결혼 생활의 연속으로 고통을 겪는 시기가 바로 두 번째에 해당한다.

 

 

 

 “인생의 감미로운 비밀에 씌워진 베일을 걷는 건 그 남자의 몫이란다. 그런데 여자아이들이 어떤 의문도 품어 본 적이 없다면 꿈 뒤에 감춰진, 조금은 난폭한 현실 앞에서 종종 반항하곤 한단다. 영혼에 상처 입고, 몸까지 상처 입고서 법이, 인간의 법과 자연의 법이 절대적 권리로 허용하는 일을 남편에게 거부하곤 하지. 더 이상은 말해 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말거라. 너는 온전히 네 남편의 소유라는 점 말이다.” / 94p

 

 

그녀는 다른 세상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과 헤어져, 다른 땅으로 떠나온 것만 같았다. 자신의 삶과 생각 속 모든 것이 전복된 것 같았다. 심지어 이런 이상한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걸까?’ 문득 남편이 낯선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석 달 전만 해도 그녀는 그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발밑에 팬 구멍 속에 떨어지듯 결혼 속으로 이렇게 빨리 떨어졌을까? / 96p

 

 

하녀가 바로 같은 침대 발치에서 다리 사이로 아이를, 이토록 잔인하게 자신의 내장을 찢고 있는 어린 존재의 형제가 되는 아이를 떨어뜨렸던 날을 떠올리자 다른 통증이, 영혼의 고통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쓰러진 하녀 앞에서 남편이 보인 행동을, 던진 눈길을, 했던 말을 그림자 한 점 없이 생생하게 떠올렸다. 이제 그녀는 마치 그의 생각이 그의 몸짓에 기록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행동에서 하녀에게 보였던 것과 똑같은 권태를, 똑같은 무심함을 읽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성가신 이기적인 남자의 똑같은 무심함이었다. / 200p

 

 

 

 

 

 

   끝으로 소설은 매우 가파르게 잔느의 삶이 내리막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아들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치유했던 잔느가 번번이 폴의 사업 실패와 늘어난 빚을 갚아주느라 급격하게 가계가 기울고 마침내 그녀의 성까지 팔아 작은 오두막집으로 가게 되는 장면은 서글프다 못해 애처롭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낭만적인 연애와 결혼을 꿈꾸었던 그녀의 결말이 이토록 초라한 삶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그렇게 자신을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도 갓난아이를 부탁한다는 폴의 편지에 또 한 번 기꺼이 손을 내미는 그녀의 맹목적이고 무모한 사랑은 읽는 사람의 억장까지 무너지게 만든다. 하지만 여린 생명체의 온기가 전하는 그 무한한 감동에 기뻐하는 로잘리와 잔느를 보며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라는 마지막 대사는 그 어떤 말보다 우리의 가슴을 명징하게 꿰뚫는다.

 

 

 

   『어느 인생』을 읽으며 모파상이 여자였던가, 하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그만큼 섬세한 감정 묘사와 유려한 문체가 유독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인공을 넘어 당대 여성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내고자 한 작가의 통찰력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다양한 관습과 결혼, 종교, 가치관의 문제들까지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은 그렇고, 그런 것. 별 거 없는 듯하지만 또 어찌 보면 별 거 있는 듯한 이 복잡한 인생살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꿈꾸어야 하는지, 다른 분들도 이 책을 통해 해답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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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천 반의 아이들
솽쉐타오 지음, 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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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회의 내밀한 현실을 개성 있고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로 조직해낸 중단편의 힘!

묵은 기억의 더께 속에서 발견된 불완전한 청춘의 초상과 생의 저변을 관통하는 쌉쌀한 정서의 이미지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물리적인 시간을 거슬러 끊임없이 과거를 향해 내달리는 존재들인 것 같다. 평온했던 내면을 거세게 뒤흔드는 과거의 어느 순간들, 어느 누가 툭 내뱉고 달아나버려 더 이상 진의를 알 수 없게 된 말들, 때때로 비겁했고 모른척하는 게 더 쉬웠던 낯부끄러운 일면들, 그 모든 것들에 기어코 다가가려하는 시도들을 멈추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는 일이 결코 기쁘지도, 그렇다고 바뀌지도 않을 거란 걸 잘 알지만, 우리는 그 시간으로 하여금 오늘이 안녕하고 또 내일이 더욱 안녕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를 비롯하여 지금은 어딘가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모르나 어쩌다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모든 그대들이. 소설은 그리 말한다.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한다’고. 어떤 식으로든.

 

 

 

 

 

 

지나간 시대 속에서 살아냈고, 또 살아나갈 사람들의 이야기

 

 

   『9천 반의 아이들』은 2017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모옌과 함께 ‘왕쩡치 문학상’을 수상하며 중국 문단에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신예 작가의 중·단편 대표작을 실은 소설집이다. 소설집에는 표제작 『9천 반의 아이들』과 백화 문학상 수상작인 『평원의 모세』를 포함해 열 편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중국 근현대사와 오늘까지 이어지는 내밀한 현실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개성 있고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로 완성시킨 작품들이 두드러진다. 이야기의 구성은 대부분의 작품이 이삼십 대의 화자가 과거 십 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부모 세대가 겪었던 문화 혁명 시절의 잔상과 국영 기업의 몰락, 기나긴 경기 침체로 인해 회복하기 어려운 가난, 과열된 입시 경쟁과 욕망, 충동과 분노로 비틀린 청년들의 자화상 등의 주제를 다루어 일종의 성장 소설이자 세태 소설에 가까운 느낌이다. 덕분에 시대적 배경과 중국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낯설지 않은 기시감과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쌉싸름한 뒷맛을 남긴다.

 

 

 

   표제작 「9천 반의 아이들」은 고등학교나 대학교 입학시험과 달리 시험에서 1등을 한다 해도 별도로 9000위안을 내야 입학이 가능했기 때문에 ‘9000반’이라 불리는 학교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당시 9000위안이란 돈이 결코 적지 않은 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이런 학교에 등록을 하고 싶어 했다.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한 아이들은 성적에 따라 갑, 을, 병, 정 네 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주인공인 ‘나’는 정 반에서 소위 문제아라 찍힌 안더례와 함께 교실 맨 뒷자리를 함께하게 된다. 안더례는 천재라 여겨질 정도로 이과 영역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여 종종 아이들의 놀라움을 사지만, 선생님 앞에서 부득부득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전교생이 돌아가며 하는 연설에서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연설로 교장으로부터 공분을 사 학교 입장에서는 골칫거리 같은 아이였다. 하지만 유독 주인공인 ‘나’에게 만큼은 호의를 감추지 않아서, 성적이 떨어지고 있는 ‘나’를 부추겨 다시 한번 공부를 해보자고 한 것도, 정말로 1등을 하자 정작 본인보다 더 좋아해준 것도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1등에게만 주어진다는 해외 연수 특전을 ‘나’가 아니라, 쑨 선생이 쑤이페이페이로 바꿔치기 하기 위해 점수까지 고친 것을 고발하기 위해 안더례가 스스로 교장실 앞에 대자보를 붙였고, 이 일로 안더례와 ‘나’의 부모님까지 총출동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중학교 자격 시험에서는 역사와 정치를 안 봐. 역사와 정치 수업은 들러리야. 반 학기 수업만 듣고 나면 책은 팔아 버려도 돼.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22p

 

우리 학년은 갑, 을, 병, 정 네 반으로 학생 수가 모두 합쳐 25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빼어나게 예쁜 여학생은 중학교 1학년 때 모두 돌아가며 게양대에 올랐고, 그중 몇 명은 이미 여러 차례 행사에 동원됐다. 교장은 예쁜 애들은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는지 2학년이 되자 자신이 직접 국기를 게양했다. 매주 월요일 우리는 그가 특별 제작한 흰색 제복을 입고 흰 장갑을 끼고 국기를 게양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그가 수고한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으며 건강하기를 희망한다는 표시로 박수를 쳤다.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36p

 

 

 

   분명 안더례는 여러 면에서 괴짜 같은 구석이 많지만, 시작부터 불공정한 경쟁의 시작을 부추기는 어른들과 사회의 관행을 꼬집으며 ‘진실의 목소리’를 대변할 줄 아는 유일한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경쟁과 부정으로 얼룩진 현실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눈과 목소리로 이야기할 줄 아는 이 특별한 아이는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불순분자였고, 섞일 수 없으니 마땅히 배척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안더례가 교실 끝으로 내몰리고, 학교로부터 외면당함으로써 결국 사회 속에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이유가 되었다. 「9천 반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공정한 경쟁이 아닌 이름 없이 자행되는 반칙에 기습을 날리는 단편 「기습」도 이와 유사한 결을 지닌 작품으로 등장한다. 온라인 게임에서 반칙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유저를 실제로 찾아가 응징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불공정한 경쟁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타협이 없는 충동적이고 비틀린 청년들의 자화상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몇 년 동안 계속 집에서 낮에는 자고, 부모님이 잠이 든 후에 일어나 책을 읽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기하와 전자석을 연구, 분석하고 또 몇 년은 우주 속 ‘반물질’이란 존재를 증명하면서 이러한 연구와 발견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하는 일을 알리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더더욱 사회에 나가 밥은 먹고살 수 있도록 야간 학교에 들어가거나 기술을 익힐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자기 부모가 돼지고기, 돼지갈비, 돼지 선지를 판매해 번 돈으로 먹고살았다.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56p

 

 

지식인을 박해하고 무산만근 같은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 다만 더 이상 적나라하게 떠벌리지 않고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내 생활도 변변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에 동의할 순 없었다. 나는 그가 말한 내용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시대의 것으로, 여전히 사람들은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우리 아버지 세대가 겪은 그런 종류의 고난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너무 작은 존재잖아. 시대의 흐름에 맞설 순 없어. 우리는 기대와 같은 방향을 봐야 해.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부터 반듯하게 서야 한다는 거지.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58p

 

 

“반칙?”

“난 그 앨 볼 수 없었고, 그 앤 날 볼 수 있었어. 가림막 두 겹 사이로 걔는 날 볼 수 있었다고. 걔가 먼저 내 다리를 때리고 나도 내 머리를 때렸어. 처음에는 내가 운이 안 좋은 줄 알았어. 걔가 날 맞혔고, 게임에서도 난 운이 안 좋구나, 싶었어. 그러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런 소프트웨어가 있더라고. 몇 위안이면 살 수 있었어. 그래서 나도 샀어. 다른 사람 IP를 찾을 수 있는 프로그램. 그가 몇 호에 있는지 찾아냈어. 2039호였어.” / 「기습」 중에서 280p

 

 

 

 

 

 

   시대적으로 타고난 불운한 가족의 역사와 절뚝발이처럼 기울어진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들도 다수 등장한다. 이 중 「평원의 모세」는 택시 기사 다섯 명이 잇따라 죽은 사건을 파헤치던 경찰관이 의문의 사고를 당하게 된 경위를 쫓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관련이 없어 보였던 여러 인물의 삶이 퍼즐처럼 흩어졌다가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지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마오 주석상의 주석 동상을 철거한 뒤 태양조가 설치되고, 또 그것이 철거되어 마오 주석 동상이 다시 세워지기까지 중국 인민의 삶은 어떻게 흘러갔고, 또 과거의 과오들이 어떤 식으로 현재의 삶으로 대체되는지를 매우 입체적으로 보여주어 소설집 중 단연 최고의 작품이라 손꼽을 만하다.

 

 

 

   특히 푸둥신이 이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리페이에게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진심을 담아 열심히 생각하면 높은 산, 넓은 바다도 널 위해 길을 내줄 거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어”라며 책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씀으로써 소녀에게 생각하는 방식대로 읽고 쓰기를 독려하는 장면은 비록 현실은 비루하나 낙오하지 않고 스스로 골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드넓은 세상이 길을 내 줄 거라는 희망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인상에 남는다. 소설 속에서 푸둥신은 일머리나 일손이 없어 책을 좋아하고 끝내 가정이 아니라 세상 밖에서 살기를 선택한 현실감 없는 인물처럼 그려지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이 고단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던 그녀에게서 우리는 더 큰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였다. 해방 전에는 우리 시에 있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나는 철학에 문외한이다. 그녀의 아버지와 주변 인물들은 ‘반우파 투쟁’ 당시 유심론자로 몰려 타도 대상이 되었다. 학생들이 그녀 아버지의 책들을 모두 집으로 가져다 아궁이에 태워버리거나 창문을 바르는 데 썼다고 한다. 게다가 문화 혁명 때는 신체적으로 가학 행위를 당해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혁명이 끝나도 복권 되었지만 더 이상 강단에 설 수 없었다. / 「평원의 모세」 중에서 65p

 

 

“옛일을 회상하는 거겠죠.” 그가 말했다. “아뇨, 현실이 자기들 생각 같지 않아서일 겁니다.” “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 일을 핑계로 개인적인 분풀이를 하고 있을 수도요.” 그가 말했다. “네?” 그가 말했다.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바닷물이 오염되니 돌고래가 해안으로 떠밀려 와 자살을 한다고 합디다. 뻣뻣하게 그렇게 널브러져 죽어 버렸다고.”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나약한 사람들도 모두 그래요. 사실 돌고래도 이가 있잖아요. 나이가 일흔이 넘었지만 칼 한 자루 들 힘은 있어요.” / 「평원의 모세」 중에서 102p

 

 

 

 

 

 

   이 외에도 거리를 걸어가다 운이 없으면 유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던 시절, 헤어 나올 수 없는 궁핍한 삶 속에서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장기판에서 삶의 희로애락을 찾았던 아버지와 시절의 그림자를 동시에 어루만지는 「대사」, 말끝마다 “흥미롭지 않아?” “재미있지 않아?” 하며 기우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어떤 의미를 찾고 싶어하는 듯한 사내가 등장하는 「절뚝발이」, 이사를 갈 때마다 엄마가 지고 다닌 나무 상자 속에 실은 한 푼 값어치도 없는 흙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며 머물 데 없이 떠도는 불안정한 가족의 기구한 삶을 들여다본 「건달」이라는 작품도 인상에 남는다.

 

 

 

나는 내가 태어난 도시로 돌아와 생계를 위해 수없이 많은 일을 했다. 생계를 위한 일은 결코 고달프지 않다. 어떤 식의 사고를 습관화하고 그 습관에 따라 생활해 가는 것, 그것뿐이다. 힘든 건 이런 생활 속에 형성되는 좌표다. 위든 아래든, 좌측이든 우축이든,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생활이 모두 똑같다. 그래서 조금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계속 이렇게 생활하다가 어느 날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면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긴 잠」 중에서 217p

 

 

탄가루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진흙 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고 아직 건장한 뼈가 아니라 힘껏 구르지 않는 한 그 위를 걸어갈 수 있었다. 석탄 산 하나를 넘자 탄을 캐는 지게차가 서 있었다. 발자국이 그중 하나를 타고 이어져 있었다. 라오라는 분명히 이 위에 잠시 앉아 있었을 거야. 나도 그 위로 올라갔다. 모든 것이 녹슬어 있었다. 바퀴는 이미 찌그러지고 지게차 안에는 빗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곳은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잊힌 세계였다. / 「그라드를 나오다」 중에서 318p

 

 

 

   대체로 중·단편 소설집의 경우 표제작에 무게감이 실리다보니 여타 수록작에서는 힘이 쭉 유지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9천 반의 아이들』은 끝까지 집중력 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많아서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특히 중국 소설에 가지게 되는 일련의 기우들을 과감히 잊을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 작가인 만큼 앞으로 중국의 목소리를 담은 밀도 높은 소설을 계속해서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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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 셀프 트래블 - 호이안.후에, 2020-2021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33
이은영 지음 / 상상출판 / 201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는 명실상부한 해외여행지의 탑이라 손꼽히는 다낭 여행의 모든 것!

한눈에 보기 쉽고 필요한 정보만 쏙쏙 골라 담은 알짜배기 다낭 맞춤 가이드북!

 

   벌써 『다낭 셀프트래블』의 2020년 최신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가족과 떠나고 싶은 해외여행지 1순위로 손꼽고 있는 여행지라 계속 관심을 두고 꾸준히 다낭 가이드북을 살펴보던 나로서는 그 사이 해외여행지로 다낭의 위상이 꽤 많이 높아졌음을 실감하고 있다. 다낭 지역 가이드북이 10개가 넘어가고, 한국에서 다낭까지 가는 직항편도 상당히 늘어났으며, 심지어 한국인 관광객이 너무 많아져 다낭 공항까지 새로 짓게 되리란 사실을 이 책의 저자 역시 예상치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다낭으로 떠나는 해외여행객의 증가에 맞춰 다낭 현지 역시 새로운 변화를 계속해서 꾀하고 있는 만큼 이를 담아내려는 가이드북의 변화도 눈에 띈다. 보다 더 정교해지고 한 눈에 보기 쉽게 구성된 셀프트래블을 만나보자.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로운 유적은 물론 신나는 테마파크, 시원한 마사지까지! 복잡한 도시를 떠나 여유로운 다낭과 호이안, 후에의 매력을 제대로 누려보고 싶다면 책에서 소개하는 하이라이트 정보들을 먼저 만나보시길 추천 드린다. 우선 다낭 여행만의 매력과 언제 여행을 하면 좋은지, 여행 시 필요한 준비물과 자유여행과 패키지여행의 차이점과 같이 여행 전에 궁금한 것들은 ‘다낭 여행 전 꼭 알고 싶은 9가지’로 채워볼 수 있다. ‘베트남, 어디까지 알고 있니?’를 통해 베트남 문화와 분위기를 미리 배워보고, 동행인(아이, 친구, 부모님)과 여행 일정에 따른 맞춤 코스 정보를 담은 ‘Try Da Nang’으로 일정을 짤 때 도움도 얻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아이와 함께하는 3박 4일은 참고하기 좋아서 그대로 따라가 볼 예정이다.

 

 

 

   이어 ‘다낭 여행자의 버킷리스트 Best 10’에서 휴양과 관광이 동시에 가능할 만큼 풍부한 다낭의 매력을 미리 만나보고, 미식의 천국이라 불리는 베트남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맛을 소개한 ‘미식가가 추천하는 다낭 최고의 맛집’으로 후회하지 않을 맛집만 쏙쏙 찾아가보자. 개인적으로 다낭하면 역시 멋진 리조트가 인상적인데, 동남아 리조트계에서 샛별처럼 떠오른 다낭의 해변을 마음껏 누리면서 나에게 맞는 리조트를 찾는데 도움을 주는 ‘리조트 천국 다낭 완벽하게 즐기기’를 꼭 참고해보시길 추천 드린다. 이 중에서 아이들이 놀기에 좋은 풀장에 키즈클럽을 갖춘 다낭의 프리미어 빌리지 리조트나 올드타운을 가져다 놓은 듯 호이안의 고풍스러운 매력을 한껏 누릴 수 있는 빅토리아 호이안 비치 리조트, 후에에서는 동남아에서 가장 긴 풀장이 있어 온종일 수영장에서 보내고 싶은 앙사나 랑꼬 리조트가 마음을 끈다.

 

 

 

 

 

 

다낭 기본 정보_

★ 여행 미리보기: 짧은 휴가기간을 활용해야 하는 직장인에게 한국에서 5시간가량의 짧은 비행으로, 해변에서 10분 거리의 공항에 도착할 수 있는 다낭은 무척 매력적인 곳이다. 느즈막이 일어나 해수욕을 즐기다가 지겨워진다면 베트남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도시인 호이안으로 떠나 색색이 등불이 수놓인 거리를 거닐며 하루를 마무리하자. 더운 날씨에 지칠 때는 베트남의 겨울이 느껴진다는 바나힐 위에 자리한 테마파크에서 신나는 하루를 보내도 좋다.

넓고 넓은, 한적한 해변이 매력적인 다낭은 아름다운 자연을 중심으로 여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다낭 시대는 매력이 덜한 편이라 리조트가 아니라도 되도록 해변 가까이에 있는 숙소를 구하자. 넓지 않은 도시지만 자전거를 타기에는 환경이 좋지 않으므로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렌트하거나 택시 또는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최근 새롭게 정비된 다낭 시내버스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노선을 쉽게 알 수 있어 편리하다. / 83p

 

 

 

   책에서는 다낭에 가면 꼭 드넓은 미케 해변에서 해수욕 해보기, 베트남 최고의 미식 도시 다낭의 로컬음식 즐기기,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느낄 수 있는 바나힐 방문을 추천한다. 서울의 한강과 이름이 똑같은 다낭의 한강에서 화려한 야경을 감상하면 시원한 칵테일 한 잔을 즐기는 것도 매력일 듯! 야밤에 웬 놀이공원? 싶겠지만 곳곳에 아기자기한 등불이 장식된 선 월드를 아이와 함께 뛰어다니며 대관람차 선휠을 타고 한강의 야경을 내려다보는 것도 기대된다. 그 무엇보다도 육아의 고단함을 풀기 위해 스파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다양한 스파를 하루에 하나씩 경험해보는 것도 최고일 듯하다.

 

 

 

다낭 숙소 위치 선택 팁_

넓고 한적한 해변과 가격 대비 저렴한 리조트는 다낭을 여행하는 주된 이유다. 다낭에 묵는다면 해변을 낀 리조트를 우선적으로 고려해보자. 저렴한 가격에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즐기고 싶다면 식당이나 마사지 숍, 펍 등이 모여 있고 공용해변 역시 가까운 홀리데이비치호텔 인근에 숙소를 잡자. 해수욕이 아닌 서핑을 목적으로 여행을 계획했다면, 초보자를 위한 서핑 포인트인 미케 해변의 템플 다낭 리조트 인근의 저렴한 숙소도 고려해보자. / 143p

 

 

호이안_

다낭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호이안은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다. 19세기 다낭에 무역항의 명성을 뺏긴 이후 큰 변화를 겪지 않은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올드타운 거리는 중부 베트남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손꼽히며, 1999년 미썬 유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호이안을 감싸고 흐르는 투본강변에 펼쳐진 넓은 들판에서는 목동이 소를 몰고,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가 신선한 채소밭에 물을 뿌린다. 중부 지방 특유의 둥근 바구니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마을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 157p  

 

 

 

 

 

 

 

   호이안은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로 손꼽히는 까닭에 다낭을 거치지 않고 곧장 호이안으로 향하는 배낭여행자가 많다고 한다. 덕분에 중저가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를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여행사들에서도 다양한 여행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으니 참고하자. 책에서는 모든 투어는 오전 8시~9시에 시작하여 한나절 정도 소요되므로 더위가 한창인 점심에는 호텔 수영장이나 안방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고, 저녁에는 올드타운과 야시장을 둘러보는 코스로 일정을 짜보길 추천한다. 한적한 아침에 동양의 베니스라 부를 만한 고즈넉한 거리를 걷고, 저녁에는 색색이 화려한 등불과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밤거리를 즐겨도 좋겠다. 또 다낭에서 마음껏 바다를 즐겼다면, 이곳에서는 전형적인 베트남 시골 풍경이 살아 있는 들과 바다를 누비며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체험해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듯하다. 책은 호이안 올드타운 인근 지역과 호이안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체험해보는 에코 투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숨겨진 고대 왕국 미썬 유적지에 관한 스페셜 정보까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으니 일정을 짤 때 참고해보길 바란다.

 

 

 

 

 

 

   끝으로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다른 동남아 지역과는 사뭇 다르게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후에에서는 후에 왕궁과 묘를 둘러보고, 흐엉강 크루즈를 타보며 저녁 시간에는 북적이는 여행자 거리를 산책해보길 추천한다. 여기에서는 역시 궁과 왕묘가 관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각 무덤들이 흐엉강 유역 곳곳에 흩어져 있어 개인적으로 차량을 대절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여행사에서 진행하는 일일 투어를 이용한다고 하니 미리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지은 태화전이나 번쩍이는 천장과 화려한 벽의 장식이 눈길을 끄는 카이딘 왕릉이 인상적일 듯하다.

 

 

 

 

 

 

   이처럼 『다낭 셀프트래블』은 다낭을 비롯하여 호이안과 후에까지 꼭 즐겨봐야 할 여행지들의 필수 정보들을 소개함과 동시에 각종 여행팁과 주의해야 할 점 등까지 참고할 수 있어 유용한 가이드북이다. 최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다낭의 최신정보를 추가로 보강한 만큼 가방 속에 쏙 넣어가지고 가서 책에서 추천하는 대로만 따라 해도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다. 얼마 전 지인 중에 다낭으로 자유 여행을 간다는 분이 있어 이 책을 추천해드렸는데, 무척 만족하셨다는 후기가 있으니, 나도 다낭으로 여행을 갈 때 잊지 말고 꼭 챙겨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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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의 문화사 - 매너라는 형식 뒤에 숨겨진 짧고 유쾌한 역사
아리 투루넨.마르쿠스 파르타넨 지음, 이지윤 옮김 / 지식너머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변화해온 매너의 역사를 탐구한 흥미로운 책!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었던 매너의 통념을 철저히 깨부수는 놀라운 반전 같은 이야기!

 

 

   영화 <킹스맨>으로 널리 알려진 이 대사, 바로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문명화된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다움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행동이야 말로 ‘매너’임을 역설한다. 매너가 있다는 것은 곧 적절하게 처신한다는 뜻이며 상황에 맞는 몸짓으로 정해진 때에 정해진 말을 한다는 의미와 같은데, 이는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요소로도 작용된다. 실제 한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 공통의 언어와 공동의 민족적 상징, 표기 방식, 민담, 민족성 그리고 공통의 행동 경향과 행동습관, 공통의 매너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유럽인들은 다문화성으로 인해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가 훼손될까 염려한 나머지 그들 고유의 풍습과 다른 풍습을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들의 기준으로 ‘적절하게’ 행동하고 공동체가 수용할 수 있는 예절 규칙, 즉 매너를 따르게 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일상에서 매너라고 생각하는 행동 중 상당 부분이 중세 유럽의 궁정 귀족과 교육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귀족 계급이 자신들을 일반 민중과 구별하기 위한 도구이자 사회 계급의 경계를 확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매너에 능숙하다는 것은 양날의 검과 같다는 이 책의 제기가 상당히 흥미롭게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매너의 문화사』는 그간 유럽인의 미덕이라 여겨져 온 매너의 다른 관점을 살펴봄으로써 매너가 무조건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는 점을 제시하는 매우 지적이고 유쾌한 탐구서다. 매너의 시작에서부터 몸가짐과 식사예절, 성생활과 지금의 SNS 문화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매너가 어떻게 변화하여 정착하였는지 유럽의 역사와 함께 차근차근 훑어보는 이 여정은 우리를 놀라운 지적 유희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매너라는 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진실의 역사

 

 

엘리아스의 문명화 이론은 인간이, 특히 유럽의 인간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엄격한 행위 규범을 발달시켜온 과정을 다룬다.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은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데에 있어서 위험을 일으키는 요소로 판명됐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의 본능을 통제하기 위해 자연적 욕구와 신체 기능을 지배하는 행동 규범을 만들었다. 그렇게 인간의 폭력성과 성욕, 식사 방법은 물론이고 눈물을 비롯한 각종 신체 분비물까지 끊임없는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 24p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문화가 다른 집단의 문화보다 낫다는 생각의 뿌리는 매우 깊다. 인간은 자신들의 행동이 야생동물과 다를 게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매너는 인간들이 자신과 동물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인지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민족 국가가 발생하고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기 수백 년 전부터 이미 유럽의 사람들은 행동을 규제하면서 그들의 공격성과 두려움을 통제해왔다. 예를 들어,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몸으로 하는 인사법들은 모두 상대에게 적대적인 의도가 없거나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생겨났다. 다시 말해, 예의범절과 인사법은 위험 사회에서 폭력성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책이었다. 이러한 규칙들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기 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서 비롯됐다. 모두가 친구 아니면 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는지를 행동과 몸짓을 통해 정확하게 나타내야만 했다.

 

 

 

   사실 태도 혹은 행동거지라는 개념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등장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전투에 출전하는 군인들의 고압적인 이미지를 본보기삼아 힘찬 발걸음을 미덕으로 여겼다. 기준점이 완전히 뒤바뀐 것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였다. 느리고 조용한 발걸음이 이상형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아테네의 민주화로 군인 계급이 선도적 위치를 잃은 데서 비롯되었다. 또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맨바닥에 앉으면 거지 취급을 받았다. 손바닥을 보이거나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은 유약함의 증거로 여겨졌다. 이는 신에게 무기가 없음을 알리는 제스처로 남성성의 상실과 직결되었고, 스파르타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손을 옷으로 가리고 다니기까지 했다. 심지어 남자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녀야했고, 눈을 자주 깜박이면 간사한 음모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두리번거리는 것은 동성애자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책에서는 예의범절 즉 매너가 시대에 따라 얼마나 가변적인지를 잘 드러내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시대마다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제스처나 자세의 형태가 얼마나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영국에서는 17세기까지 포옹이나 키스가 ‘촌뜨기의 풍습’으로 여겨졌다. 프랑스에서도 인사로 포옹이나 볼 키스를 하는 것은 농부들의 풍속으로 유지되다가, 시간이 지나 농촌의 인력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도시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도시화 과정에서 볼 키스에도 변화가 생겼다. 농촌에서는 볼 키스를 할 때 나는 ‘쪽’ 소리가 얼마나 큰지에 따라 인사하는 사람들 간의 정서적 거리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소리를 내며 키스했다가는 놀림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대신 도시에서는 키스를 몇 번 하는가에서 정서적 관계가 드러났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볼 키스 풍습이 도시 인근에 이식되는 과정에서 ‘문명화’된 것이다. / 55p

 

 

 

 

 

  겉으로 보기에 문명인의 예절처럼 보이는 행위에는 문명이라고 말하기 힘든 역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첫째로 술자리에서 자주 나누는 건배 문화가 그 중 하나다. 원래 건배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즉 술자리에서 사람들을 잔뜩 취하도록 만드는 것뿐이었다고 한다. 건배를 하고 나면 술잔이 경쟁적으로 비워지기 때문이었다. 잔을 부딪치는 것은 중세 음주문화와 사회적 행동의 한 부분이었는데, 건강을 위해 건배하고 나면 그 술잔을 비우고 우애를 위한 건배로 화답하는 것이 의무였다. 이렇게 번갈아 가며 술 마시기 경쟁을 벌이는 것이 당시에는 관례였으며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다고 한다. 또 18세기 에든버러의 행인들은 반드시 모자를 써야했다고 한다. 어느 집이나 하루에 한 번은 창문을 열고 길에다 요강을 비웠기 때문이다. 요강을 비우기 전 행인들을 향해 피하라고 외치는 소리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배설물은 밤새도록 길에 떨어져 있었다. 시의 청소원들은 이튿날 아침에서야 길을 치웠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걸 새삼 다행이라고 여기게 되는 대목이다.

 

 

 

식기 사용에 대한 규정, 그중에서도 칼에 대한 규정은 일종의 무장 해제를 의미했다. 국가는 치안 유지 능력이 없었고, 삶이 충동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중세에는 각자가 무기로 쓰던 칼을 식탁에서도 사용했다. 그런데 17세기 프랑스 왕이 귀족들을 모두 베르사유에 소집한 후, 종잡을 수 없던 기사도를 단 한순간에 해체시켜버렸다. 그러자 귀족들은 다른 방식으로 다툼을 벌였다. 무기를 휘두르며 다투는 대신, 박식함이나 훌륭한 매너를 경쟁적으로 갖추는 것으로 교양 전쟁을 벌였다. / 83p

 

 

아이와 어른을 사회적으로 정의된 경계로 구분하는 것은 문명화의 주된 방식이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방귀를 비롯한 다른 신체의 자연적 기능을 두려움과 수치심에 연결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고리는 점점 강해진다. 이는 사회로부터 주입된 것이다. 자연적 욕구와 연결된 행복감은 지극히 비밀스럽고 사적인 공간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역겨움이나 부끄러움처럼 부정적 인식이 포함된 감정들이 자연적 욕구에 적합한 감정으로 적용된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아이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던가, ‘병이 있다’는 판정을 받진 않는다. / 112p

 

 

 

 

 

  이외에도 과거에 포크가 ‘악마의 삼지창’으로 불리어 서유럽 교회가 오랫동안 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했다는 사실, 다른 사람 앞에서 울 수 있는 연민과 품위의 증거였으며 눈물이야말로 엘리트 계층이 ‘감정적일 수 있는 특권’을 눈에 보이게 드러낼 수 있는 도구였다는 점, 특정 신체 부위는 가리고 있어야 하며 절대 노출해선 안 되지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람’ 앞에서는 예외였으며 신분이 높은 신사는 하인들이나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친구 앞에서 특정 신체 부위를 드러낼 수 있었는데, 이는 무례라기보다는 특별한 애정과 우정의 증표였다는 것 역시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다소 놀라울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17세기 이후부터 웃음이 ‘도덕적으로’ 통제되고, 중세의 예의범절이 여자들의 튀는 행동을 강압적으로 금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점에 비해 남자들의 충동적인 행동에 대한 통제는 미미했으며, 심지어 기사들에게 여자는 상류층 여자를 제외하고 육체적 욕망을 해소하는 수단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까지 관습처럼 굳어진 매너의 당위성에 대해 의심해볼 계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또한 의미가 깊다.

 

 

 

15세기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 지역 도시 몽스의 주민들은 돈을 모아 강도 한 명을 보석으로 꺼냈다. 그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동시대인의 증언에 따르면, 민중들은 이 사건을 너무 즐거워한 나머지 “마치 죽은 예수가 다시 깨어난 것보다 더 기뻐했다”고 한다. 벨기에 도시 브뤼헤의 주민들은 한 고위관기가 반역 혐의로 고문을 당하는 것을 흥미롭게 구경하기도 했다. 관중들은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최대한 늦추고자 했는데, 이는 고통받는 모습을 계속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141p

 

 

군중의 공격적인 성향은 집단으로 사냥을 해서 먹고 살던 시대의 유산이다. 법원의 판결에 따라 공동체 일원들이 모두 돌을 던져 죄인을 죽였던 투석형의 관습이 그 뒤를 이었다. 근본적으로는 모든 사형 집행이 공동체에 의해 자행된 살인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는 사형이 실행되도록 뜻을 모은 군중 모두가 사형 집행인인 셈이다. / 174p

 

 

 

 

 

 

  끝으로 책은 인터넷의 발달에 의해 가상세계 안에서 새로운 ‘디지털 중세기’가 열린 것에 우려를 표하며 마무리한다. 우리는 새로운 공격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 비록 말에 지나지 않는 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손에 쥔 칼로 대화 상대를 내리치고 있진 않는가? 우리는 이제 맞대응과 비아냥거림, 공격과 연민의 상실이 일상화되어 버린 디지털 중세기의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해야나가야 할지 그 과제 앞에 놓여 있다. 앞서 매너의 역사와 그늘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어쩌면 매너란 ‘적절한’ 어떤 특정 행동이나 자세를 떠나 진정으로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아닐까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개인 스스로 고민하고 실천해보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인터넷 문화 혹은 사회적인 매너를 완성시키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매너의 문화사』는 매너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내 안의 매너와 우리 사회의 매너 문화를 점검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책이었다. 가볍게 시작해서 묵직하게 끝을 내는 만큼 유쾌하게 읽으면서 여러 사회적인 고민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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