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천 반의 아이들
솽쉐타오 지음, 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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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회의 내밀한 현실을 개성 있고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로 조직해낸 중단편의 힘!

묵은 기억의 더께 속에서 발견된 불완전한 청춘의 초상과 생의 저변을 관통하는 쌉쌀한 정서의 이미지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물리적인 시간을 거슬러 끊임없이 과거를 향해 내달리는 존재들인 것 같다. 평온했던 내면을 거세게 뒤흔드는 과거의 어느 순간들, 어느 누가 툭 내뱉고 달아나버려 더 이상 진의를 알 수 없게 된 말들, 때때로 비겁했고 모른척하는 게 더 쉬웠던 낯부끄러운 일면들, 그 모든 것들에 기어코 다가가려하는 시도들을 멈추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는 일이 결코 기쁘지도, 그렇다고 바뀌지도 않을 거란 걸 잘 알지만, 우리는 그 시간으로 하여금 오늘이 안녕하고 또 내일이 더욱 안녕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를 비롯하여 지금은 어딘가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모르나 어쩌다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모든 그대들이. 소설은 그리 말한다.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한다’고. 어떤 식으로든.

 

 

 

 

 

 

지나간 시대 속에서 살아냈고, 또 살아나갈 사람들의 이야기

 

 

   『9천 반의 아이들』은 2017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모옌과 함께 ‘왕쩡치 문학상’을 수상하며 중국 문단에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신예 작가의 중·단편 대표작을 실은 소설집이다. 소설집에는 표제작 『9천 반의 아이들』과 백화 문학상 수상작인 『평원의 모세』를 포함해 열 편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중국 근현대사와 오늘까지 이어지는 내밀한 현실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개성 있고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로 완성시킨 작품들이 두드러진다. 이야기의 구성은 대부분의 작품이 이삼십 대의 화자가 과거 십 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부모 세대가 겪었던 문화 혁명 시절의 잔상과 국영 기업의 몰락, 기나긴 경기 침체로 인해 회복하기 어려운 가난, 과열된 입시 경쟁과 욕망, 충동과 분노로 비틀린 청년들의 자화상 등의 주제를 다루어 일종의 성장 소설이자 세태 소설에 가까운 느낌이다. 덕분에 시대적 배경과 중국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낯설지 않은 기시감과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쌉싸름한 뒷맛을 남긴다.

 

 

 

   표제작 「9천 반의 아이들」은 고등학교나 대학교 입학시험과 달리 시험에서 1등을 한다 해도 별도로 9000위안을 내야 입학이 가능했기 때문에 ‘9000반’이라 불리는 학교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당시 9000위안이란 돈이 결코 적지 않은 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이런 학교에 등록을 하고 싶어 했다.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한 아이들은 성적에 따라 갑, 을, 병, 정 네 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주인공인 ‘나’는 정 반에서 소위 문제아라 찍힌 안더례와 함께 교실 맨 뒷자리를 함께하게 된다. 안더례는 천재라 여겨질 정도로 이과 영역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여 종종 아이들의 놀라움을 사지만, 선생님 앞에서 부득부득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전교생이 돌아가며 하는 연설에서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연설로 교장으로부터 공분을 사 학교 입장에서는 골칫거리 같은 아이였다. 하지만 유독 주인공인 ‘나’에게 만큼은 호의를 감추지 않아서, 성적이 떨어지고 있는 ‘나’를 부추겨 다시 한번 공부를 해보자고 한 것도, 정말로 1등을 하자 정작 본인보다 더 좋아해준 것도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1등에게만 주어진다는 해외 연수 특전을 ‘나’가 아니라, 쑨 선생이 쑤이페이페이로 바꿔치기 하기 위해 점수까지 고친 것을 고발하기 위해 안더례가 스스로 교장실 앞에 대자보를 붙였고, 이 일로 안더례와 ‘나’의 부모님까지 총출동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중학교 자격 시험에서는 역사와 정치를 안 봐. 역사와 정치 수업은 들러리야. 반 학기 수업만 듣고 나면 책은 팔아 버려도 돼.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22p

 

우리 학년은 갑, 을, 병, 정 네 반으로 학생 수가 모두 합쳐 25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빼어나게 예쁜 여학생은 중학교 1학년 때 모두 돌아가며 게양대에 올랐고, 그중 몇 명은 이미 여러 차례 행사에 동원됐다. 교장은 예쁜 애들은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는지 2학년이 되자 자신이 직접 국기를 게양했다. 매주 월요일 우리는 그가 특별 제작한 흰색 제복을 입고 흰 장갑을 끼고 국기를 게양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그가 수고한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으며 건강하기를 희망한다는 표시로 박수를 쳤다.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36p

 

 

 

   분명 안더례는 여러 면에서 괴짜 같은 구석이 많지만, 시작부터 불공정한 경쟁의 시작을 부추기는 어른들과 사회의 관행을 꼬집으며 ‘진실의 목소리’를 대변할 줄 아는 유일한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경쟁과 부정으로 얼룩진 현실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눈과 목소리로 이야기할 줄 아는 이 특별한 아이는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불순분자였고, 섞일 수 없으니 마땅히 배척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안더례가 교실 끝으로 내몰리고, 학교로부터 외면당함으로써 결국 사회 속에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이유가 되었다. 「9천 반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공정한 경쟁이 아닌 이름 없이 자행되는 반칙에 기습을 날리는 단편 「기습」도 이와 유사한 결을 지닌 작품으로 등장한다. 온라인 게임에서 반칙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유저를 실제로 찾아가 응징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불공정한 경쟁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타협이 없는 충동적이고 비틀린 청년들의 자화상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몇 년 동안 계속 집에서 낮에는 자고, 부모님이 잠이 든 후에 일어나 책을 읽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기하와 전자석을 연구, 분석하고 또 몇 년은 우주 속 ‘반물질’이란 존재를 증명하면서 이러한 연구와 발견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하는 일을 알리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더더욱 사회에 나가 밥은 먹고살 수 있도록 야간 학교에 들어가거나 기술을 익힐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자기 부모가 돼지고기, 돼지갈비, 돼지 선지를 판매해 번 돈으로 먹고살았다.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56p

 

 

지식인을 박해하고 무산만근 같은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 다만 더 이상 적나라하게 떠벌리지 않고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내 생활도 변변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에 동의할 순 없었다. 나는 그가 말한 내용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시대의 것으로, 여전히 사람들은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우리 아버지 세대가 겪은 그런 종류의 고난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너무 작은 존재잖아. 시대의 흐름에 맞설 순 없어. 우리는 기대와 같은 방향을 봐야 해.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부터 반듯하게 서야 한다는 거지.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58p

 

 

“반칙?”

“난 그 앨 볼 수 없었고, 그 앤 날 볼 수 있었어. 가림막 두 겹 사이로 걔는 날 볼 수 있었다고. 걔가 먼저 내 다리를 때리고 나도 내 머리를 때렸어. 처음에는 내가 운이 안 좋은 줄 알았어. 걔가 날 맞혔고, 게임에서도 난 운이 안 좋구나, 싶었어. 그러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런 소프트웨어가 있더라고. 몇 위안이면 살 수 있었어. 그래서 나도 샀어. 다른 사람 IP를 찾을 수 있는 프로그램. 그가 몇 호에 있는지 찾아냈어. 2039호였어.” / 「기습」 중에서 280p

 

 

 

 

 

 

   시대적으로 타고난 불운한 가족의 역사와 절뚝발이처럼 기울어진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들도 다수 등장한다. 이 중 「평원의 모세」는 택시 기사 다섯 명이 잇따라 죽은 사건을 파헤치던 경찰관이 의문의 사고를 당하게 된 경위를 쫓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관련이 없어 보였던 여러 인물의 삶이 퍼즐처럼 흩어졌다가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지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마오 주석상의 주석 동상을 철거한 뒤 태양조가 설치되고, 또 그것이 철거되어 마오 주석 동상이 다시 세워지기까지 중국 인민의 삶은 어떻게 흘러갔고, 또 과거의 과오들이 어떤 식으로 현재의 삶으로 대체되는지를 매우 입체적으로 보여주어 소설집 중 단연 최고의 작품이라 손꼽을 만하다.

 

 

 

   특히 푸둥신이 이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리페이에게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진심을 담아 열심히 생각하면 높은 산, 넓은 바다도 널 위해 길을 내줄 거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어”라며 책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씀으로써 소녀에게 생각하는 방식대로 읽고 쓰기를 독려하는 장면은 비록 현실은 비루하나 낙오하지 않고 스스로 골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드넓은 세상이 길을 내 줄 거라는 희망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인상에 남는다. 소설 속에서 푸둥신은 일머리나 일손이 없어 책을 좋아하고 끝내 가정이 아니라 세상 밖에서 살기를 선택한 현실감 없는 인물처럼 그려지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이 고단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던 그녀에게서 우리는 더 큰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였다. 해방 전에는 우리 시에 있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나는 철학에 문외한이다. 그녀의 아버지와 주변 인물들은 ‘반우파 투쟁’ 당시 유심론자로 몰려 타도 대상이 되었다. 학생들이 그녀 아버지의 책들을 모두 집으로 가져다 아궁이에 태워버리거나 창문을 바르는 데 썼다고 한다. 게다가 문화 혁명 때는 신체적으로 가학 행위를 당해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혁명이 끝나도 복권 되었지만 더 이상 강단에 설 수 없었다. / 「평원의 모세」 중에서 65p

 

 

“옛일을 회상하는 거겠죠.” 그가 말했다. “아뇨, 현실이 자기들 생각 같지 않아서일 겁니다.” “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 일을 핑계로 개인적인 분풀이를 하고 있을 수도요.” 그가 말했다. “네?” 그가 말했다.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바닷물이 오염되니 돌고래가 해안으로 떠밀려 와 자살을 한다고 합디다. 뻣뻣하게 그렇게 널브러져 죽어 버렸다고.”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나약한 사람들도 모두 그래요. 사실 돌고래도 이가 있잖아요. 나이가 일흔이 넘었지만 칼 한 자루 들 힘은 있어요.” / 「평원의 모세」 중에서 102p

 

 

 

 

 

 

   이 외에도 거리를 걸어가다 운이 없으면 유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던 시절, 헤어 나올 수 없는 궁핍한 삶 속에서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장기판에서 삶의 희로애락을 찾았던 아버지와 시절의 그림자를 동시에 어루만지는 「대사」, 말끝마다 “흥미롭지 않아?” “재미있지 않아?” 하며 기우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어떤 의미를 찾고 싶어하는 듯한 사내가 등장하는 「절뚝발이」, 이사를 갈 때마다 엄마가 지고 다닌 나무 상자 속에 실은 한 푼 값어치도 없는 흙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며 머물 데 없이 떠도는 불안정한 가족의 기구한 삶을 들여다본 「건달」이라는 작품도 인상에 남는다.

 

 

 

나는 내가 태어난 도시로 돌아와 생계를 위해 수없이 많은 일을 했다. 생계를 위한 일은 결코 고달프지 않다. 어떤 식의 사고를 습관화하고 그 습관에 따라 생활해 가는 것, 그것뿐이다. 힘든 건 이런 생활 속에 형성되는 좌표다. 위든 아래든, 좌측이든 우축이든,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생활이 모두 똑같다. 그래서 조금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계속 이렇게 생활하다가 어느 날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면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긴 잠」 중에서 217p

 

 

탄가루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진흙 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고 아직 건장한 뼈가 아니라 힘껏 구르지 않는 한 그 위를 걸어갈 수 있었다. 석탄 산 하나를 넘자 탄을 캐는 지게차가 서 있었다. 발자국이 그중 하나를 타고 이어져 있었다. 라오라는 분명히 이 위에 잠시 앉아 있었을 거야. 나도 그 위로 올라갔다. 모든 것이 녹슬어 있었다. 바퀴는 이미 찌그러지고 지게차 안에는 빗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곳은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잊힌 세계였다. / 「그라드를 나오다」 중에서 318p

 

 

 

   대체로 중·단편 소설집의 경우 표제작에 무게감이 실리다보니 여타 수록작에서는 힘이 쭉 유지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9천 반의 아이들』은 끝까지 집중력 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많아서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특히 중국 소설에 가지게 되는 일련의 기우들을 과감히 잊을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 작가인 만큼 앞으로 중국의 목소리를 담은 밀도 높은 소설을 계속해서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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