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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경계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1월
평점 :
날카롭고 뼈아픈 우리 사회의 무거운 진실!
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삶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 숙고하게 하는 책!
도쿄의 번화가인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묻지마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스물여섯 살의 오노데라 케이치라는 남성으로, 제일 먼저 길을 건너던 26세 여성을 자신이 들고 있던 도끼로 공격한 다음, 여성을 구하려던 48세 남성을 무참하게 난도질하고, 이어서 도망치던 28세 여성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다가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48세 남성은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숨을 거두었고, 가장 먼저 공격당한 여성은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범인은 “짜증 나서 그랬다. 나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상대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다”고 진술했다 한다.
묻지마 범죄의 이면에 드리워진 현대 사회의 문제점
잡지 기사인 쇼고는 우연히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벌어진 묻지마 살인 사건의 범인인 케이치가 사건 발생 일주일 전까지 근무했다는 회사 사장의 인터뷰를 보게 되고, 케이치라는 남자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족이 없고 열여섯 살까지 시설에서 지냈다는 점, 그의 양팔이 좁쌀만 한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점이 쇼고의 관심을 끈 것이다. 실은 쇼고 역시 시설에서 자란 데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해 팔다리 곳곳에 담뱃불에 지져진 자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케이치에게서 몇 년 전의 자신이 겹쳐 보였던 쇼고는 그 길로 케이치를 찾아가 그의 불행했던 과거를 담은 자서전을 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렇게 쇼고는 케이치의 지난 과거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어쩌다 케이치가 교도소에 가고 싶어서 사람을 죽이고, 출소하면 또 그런 짓을 하겠다고 공언할 정도로 사회를 증오하게 되었는지 끔찍하고도 무거운 비밀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애초에 나한테는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만한 게 없어요. 기억하는 것도 없고 기억해 내고 싶은 것도 없고. 그래서 이쪽에 온 거니까요. 내 인생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네 인생은 교도소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라고?” 쇼고가 물었다.
“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전 이쪽에 있을 거예요. 아직은 죽기 싫으니까 사형이 나오지 않도록 처음부터 딱 한 명만 죽이자고 정해 놓고 시작한 일이었거든요.” / 168p
쇼고는 끝이 뾰족한 물건을 발견하기만 하면 자기 몸에 문신을 새겼다. 문신을 새기는 행위는 시설에서 나온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스무 살쯤 되자 흉터는 대부분 문신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과거에 갇힌 채였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은 무의식중에 계속해서 그 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 234p
한편, 절체절명의 순간에 범인을 막아선 한 중년의 남성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진 아카리는 사건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사랑하던 사람과의 관계도 어긋나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의 품에서 지내면서도 몸과 마음의 상처를 씻어내지 못한다. 그렇게 깊은 절망과 한탄에 빠져 자신을 공격한 범인을, 그리고 세상의 부조리함을 원망만 하며 지내던 아카리는 문득 아카리를 구한 남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린다. “약속은 지켰다고… 전해 줘….” 남자는 대체 누구에게 이 말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아카리는 죽은 남자의 마지막 말을 상대에게 전해주지 않으면 도저히 온전한 마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남자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 속에서 아카리는 상처에 대한 원망과 미련이 아닌, 생에 대한 절박한 마음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깨달아간다.
“의사 선생님한테 말해서 검사를 받았지만 시력에는 이상이 없대. 아마 정신적인 문제일 거라고…. 그것뿐만이 아니야. TV 요리 채널에서 식칼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오거나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 소리 때문에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고, 불을 끄거나 눈을 감으면 범인한테 공격당했을 때의 광경이 선명하게 되살아나서 미쳐버릴 것 같아.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야. 코헤이가 알던 내가 아니라고!” / 113p
“남들이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 속이 뒤집힐 것 같다고!” / 157p
“나는 일면식도 없는 범인한테 공격당해서 크게 다쳤잖아. 아키히로 씨는 목숨을 잃었고. 그런 일이 생기는 걸 보면 세상에 나랑 상관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 않나 싶더라.” / 308p
이처럼 『죄의 경계』는 야쿠마루 가쿠의 사회파 미스터리로, 무차별 묻지마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날카롭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야기는 범인이 묻지마 살인 사건을 벌이게 되기까지의 사연과, 묻지마 살인 사건에 휘말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떠난 한 남자의 사연을 두 가지 시선을 통해 쫓아간다. 그 과정에서 묻지마 살인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의 심리와 아동 학대, 방임, 소외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매우 심도 있게 그려간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처한 불우한 환경이 타인의 삶을 빼앗는 범죄를 정당화 할 수 없음을 전하는 책의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죄의 경계, 그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든 삶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저와 재판부를 비롯해 지금 이 법정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왜 그런 사건을 일으켰는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처럼 부모에게 학대당하고 시설에 맡겨진 아이는 많습니다. 시설에서 나와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도 많고요. 피고인이 사건을 일으킨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모두가 당신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편견을 갖게 될 겁니다.” / 445p
촘촘한 이야기 구성에 내용도 다소 무거운 편인데도 단숨에 페이지가 넘어갈 만큼 흡인력이 높다. 여담이지만 오전에는 내가, 저녁에는 남편이 읽으며 함께 감상을 공유한 게 이 책이 처음이라 더 재미있게 읽었다. 묵직한 사회파 미스터리를 찾으시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