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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우리돌의 들녘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러시아, 네덜란드 편 ㅣ 뭉우리돌 2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월
평점 :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그것이 우리가 이 역사를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 책을 한창 읽고 있을 즈음, 일본 군마현에 세워진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 추모비’가 강제 철거된다는 기사를 접했다. 이 추모비의 뒷면에는 ‘조선인에 대해 크나큰 손해와 고통을 입힌 역사 사실을 깊이 새기고 진심으로 반성하며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를 내다보며 새로운 상호 이해와 우호를 바란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우익 단체들은 이 추모비가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 끊임없이 주장했고, 일본 대법원은 이들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추모비는 산산조각이 났고, 일본의 한 우익 성향 정치가는 다른 추모비도 철거해야 한다는 망언을 쏟아내고 있건만, 우리 외교부의 입장 표명이란 것은 그저 방관에 가까울 따름이다. 『뭉우리돌의 들녘』에서 저자 김동우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은 희미해진 과거를 물질로 받쳐주는 현장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어떤 사건이 있던 곳에 세워진 기념비, 추모비, 비석 등은 망각에 갇혀 보이지 않던 역사를 무대 위로 안내하는 장치다.” 우리가 기념비와 추모비 그리고 비석을 세우는 이유는, 그것이 공간을 강력한 회상의 장소로 탈바꿈시키고, 그리하여 사람들을 역사 앞으로 불러 모으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혹한 역사를 딛고 쌓아올린 기억의 연대가 이토록 허무하게 바스라졌는데, 우리는 어째서 여전히 입을 다물고만 있는 것인가. 애통하고 또 애통한 일이다.
기억은 한번 끊어지면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다. 무리하게 복구를 시도하면 미화 내지는 왜곡 또는 변질돼 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기억의 단절은 그걸로 진실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 사라짐은 결과적으로 동감을 가로막는다. 이것이 망각의 무서움이다. / 13p
다시 요동칠 기억의 연대를 꿈꾸며
『뭉우리돌의 들녘』은 러시아와 네덜란드에 남겨진 우리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굴하여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 책이다. 앞서 출간된 『뭉우리돌의 바다』가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에서 활동한 국외운동가들과 사적지를 추적했다면, 이번에는 러시아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그 흔적을 쫓는다. 우리에겐 연해주와 헤이그라는 이름으로 더욱 기억되고 있는 그곳, 안중근 의사와 이준 열사가 활동했던 장소라 더 특별했던 바로 그곳으로.
“우리는 전후에 일을 이룬 것이 전혀 없었으니 다른 사람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만약 특별한 단체가 없다면 어떤 일을 막론하고 목적을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하여 자취를 표시하여 기록한 뒤에,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고 목적을 이루기를 기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리가 모두 승낙하고 말을 따랐다. / 83p
여정은 우리 조상들이 ‘연추’라 이름 지은 크라스키노로 가는 길에서 시작된다. 1908년 봄.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 등이 독립운동 단체 동의회를 조직하고, 그해 여름 안중근이 동의회 의병으로 국내 진공작전에 나선 곳이다. 그리고 1909년, 태극 모양이 그려진 천 사방에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쓴 뒤 열 두 명의 동지가 단지로 혈맹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안중근 단지동맹 기념비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나 있었을까. 우뚝 솟은 검푸른 단지동맹비와 안중근이 법정에서 열거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을 의미하는 열다섯 개의 돌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크라스키노 전망대를 보자자마 눈물이 울컥 치민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데, 손가락을 끊어내는 회맹을 통해 나라의 존립을 우선했던 이들의 고귀한 희생 앞에서 한낱 나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진다.
연해주 최초 한인 마을 지신허는 작은 강을 따라 남북 12킬로미터, 동서 2킬로미터 규모였다. 위치는 크라스키노에서 서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자리다. 현재 이곳에는 한인이주기념비가 서 있다. 이 비는 가수 서태지가 지난 2004년 블라디보스토크 공연 뒤 자비로 세운 것인데, 그의 외증조부는 3·1혁명으로 옥고를 치르고 상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성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05p
당시 러시아 언론 보도에 따르면 거리에 시체가 쌓이고, 온전한 집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사망자는 러시아인 포함 5,000명 이상이었다. 이 야만적 행위는 연해주 한인 사회 기반을 뿌리째 뽑아 근본적으로 독립운동의 싹을 잘라 버리려는 의도였다. 4월 참변은 같은 해 가을 서북간도를 짓밟은 간도 참변과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로 이어진다. 이들 사건은 일본이 국외에서 저지른 ‘3대 한인 학살’로 불린다. / 131p
책을 읽으며 네덜란드 덴 하그(헤이그)에서 이준열사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기항·송창주 부부의 이야기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은 손수 자비로 드 용 호텔 건물을 사들여 1995년부터 이준열사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사재 20만 달러를 털어 건물을 구매하긴 했지만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고, 박물관을 만들려면 관련 자료도 수집해야했다 했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일본 등에서 발품을 팔며 하나씩 자료를 모았다던 그들. 독립이라는 거룩한 역사를 자신들의 미약한 힘으로나마 지키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과거 없는 지금이 없듯, 기록 없는 역사도 없다. 역사는 무엇인가를 남겨놓고자 한 투쟁의 결과”라던 저자의 글귀가 가슴 깊이 와 박힌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 이준 / 199p
『몽우리돌의 들녘』 속엔 황량한 듯 차가운 느낌의 사진들이 많다. 내 집, 내 땅, 내 나라가 없어 떠돌아다녀야 했던, 울타리가 없어 사무치는 울분을 내내 참아야했던 조상들의 엄혹한 현실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하필 저 ‘들녘’은 왜 아직도 저토록 거칠고 메마른 땅인가. 땅에 묻혀버린, 이름을 남기지 못한 서사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 책이 없었다면 나는 그 흔적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국외 독립운동가와 재외동포자들의 역사를 전하는 기억의 매개자로서, 계속해서 진정성이 담긴 사진과 묻혀진 기록들을 전하고자 하는 김동우 작가에게 멀리서나마 응원의 마음을 보태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