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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읽는 내내 소름 끼치고, 또 소름이 끼쳤다!
폭발하는 지성과 광기의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의 시대를 마주한 격변의 순간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솔베이 회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지성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20세기 과학계가 고전물리학과 양자역학이 맞부딪치는 격변을 맞이한 순간이기도 했다. 한 쪽에는 우연성, 불확정성, 확률, 불확실성이 양자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에 드리운 무게를 증오하던 아인슈타인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원자물리학의 창시자인 닐스 보어가 있었다. 그 사이에서 이들을 중재하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인 파울 에렌페스트였다.
파울은 그가 몸담은 소중한 학문이 기이한 방향으로 치달아 어느덧 논리적인 모순과 불확실성으로 가득차 버린 것에 괴로워했다. 당시 유럽은 혁명이라는 이름하에 히틀러 청소년단의 무지성적 구호와, 전쟁을 도발하는 정치인들의 장광설과, 무한 진보를 무턱대고 옹호하는 사람들이 들끓던 때였고, 이것은 물리학의 산업화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실로 사악한 이 힘은, 논리적인 동시에 지독하게 비이성적이었고, 아직은 다 자라지 않아 잠잠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다.’던 『매니악』 속 묘사처럼, 파울이 감지한 이 힘은 마침내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한 사람에 의해 완성되었다. 바로 현대 컴퓨터를 탄생시키고, 양자역학의 수학적 토대를 놓고, 원자폭탄의 내파 방정식을 쓰고, 게임이론과 경제 행동 이론을 창시하고, 디지털 생명과 자기 증식 기계, 인공지능, 기술적 특이점의 도래를 예고한 그는, 존 폰 노이만이었다.


그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
우리와 다른 외계인.
대개 수학자들은 자신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폰 노이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증명한다.
『매니악』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의 저자인 벵하민 라바투트의 신작이다. 이 책은 폭발하는 지성과 광기의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의 시대에 도래하기까지, 과학사와 세계사를 뿌리째 뒤흔든 천재들의 격돌과 고뇌를 추적한 작품이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물리학계의 대심문관으로 양자역학의 위험성을 감지한 파울 에렌페스트, 원자폭탄의 내파 방정식을 완성하고 현대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개념을 앞당긴 폰 노이만, 인공지능의 시대를 연 알파고의 허사비스와 이에 대적한 천재바둑기사 이세돌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20세기와 21세기를 걸쳐 탄생한 위대한 천재들이 ‘인간 사고의 모든 영역을 변혁하고 무한한 계산의 힘을 세상에 풀어 과학의 목덜미를 움켜쥐겠다는 꿈’을 어떻게 실현해 가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천재인가, 광기인가. 유토피아인가, 아포칼립스인가. 벵하민 라바투트는 천재들의 놀라운 지성을 소름끼치도록 매혹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이들의 지성이 동시에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지닐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덕분에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누구라도 압도적인 전율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내가 연구에 매달렸던 수많은 세월이 한순간에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의 증명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우아했다. 나는 스스로 물었다. 이게 다 뭐지? 이 아이는…… 이 아이는 대체 어떤 별종이길래? 아직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내가 폰 노이만을 경외하게 됐다는 것이다. / 89p
그런데 우리는 지금이 1.5미터밖에 되지 않고 6킬로그램의 조그마한 플루토늄 코어가 들어 있는 작은 금속 구체 내부에다 핵분열을 성공시켰다. 우리가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게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나치를(나중에는 러시아였고 중국이었으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적을) 이기려는 광란의 경쟁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 일을 한 건 프로메테우스가 준 선물을 극한으로 작열시킴으로써 인간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 179p
그러니까 그 저주받은 폭탄은 우리네 세상에서 폭발하기 전 컴퓨터의 디지털 회로에서 먼저 생명을 얻은 것이다. 폰 노이만의 발명품이 아니었다면 열핵무기는 사실상 만들어질 수 없었다. 컴퓨터의 운명은 애초부터 열핵무기와 단단히 얽혀 있었다. 폭탄 제조 경쟁은 컴퓨터에 대한 조니의 열망으로 더욱 가속화되었고, 반대로 매니악을 만들려는 노력은 핵무기 경쟁으로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렇게나 소름이 끼친다. 인간 발명품 중 가장 독창적인 물건과 가장 파괴적인 물건이 정확히 동시에 탄생하다니. / 207p



“0.0001.”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의 제4차 대국에서 승패의 운명을 가른 78수는 만분의 일의 확률을 지닌 ‘신의 한 수’였다. 그것은 2차 대국에서 알파고가 획기적인 37수로 바둑계를 술렁이게 했을 때 자신의 수에 부여한 확률과 정확히 똑같았다. 양자역학은 핵무기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위험을 낳았고,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잠재적인 위험을 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돌이 보여준 ‘신의 한 수’ 같은 묘수처럼, 알파고 시대 이후 바둑계가 AI를 활용해 또 다른 돌파구를 열어가고 있는 것처럼, 또 다른 우리 안의 가능성이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줄 것을 믿는다. 이것이 이 책이 놀랍도록 무서우면서도 놀랍도록 희망적인 이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