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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연대기 - 조선을 뒤흔든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건 80
유정호 지음 / 블랙피쉬 / 2024년 1월
평점 :
조선을 이해하는 아주 쉽고 재미있는 교양역사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고, 또 경계해야 할 것인가!
- 궁문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여좌를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여러 신하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 《태조실록》 1권 / 18p
- (…)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와 시의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 《순종실록부록》 1권 / 510p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오랜 시간이 흘러 1910년 8월 29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일본국 황제에게 통치권을 양도함으로써, 조선은 500년의 세월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오롯이 기록으로 보전한 선조들 덕분에 우리는 그로부터 한참이나 세월이 흘러서도 조선을 가까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외세의 침략과 일제 강점기라는 부침의 세월을 고려했을 때 《조선왕조실록》이 원본 그대로 보존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여기에 전산화 작업을 통해 누구나 실록을 쉽게 열람하고 접할 수 있도록 한 점은 거듭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다만 담고 있는 내용의 양과 범위가 방대하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용어와 개념이 등장하여, 배경지식이 없다면 당시 사건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
따라서 『조선 왕 연대기』는 어떻게 하면 실록과 함께 조선 역사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전할 수 있을까 고심 끝에 완성된 교양역사서다. 마치 드라마를 보듯 조선 왕 27인의 연대기를 중심으로 80가지 주요 사건을 추려내, 방대한 조선의 역사를 유려한 흐름으로 담아낸 점이 인상적이다. 조선 초기와 중기, 후기를 나누어 연표로 정리하고, 실록 속 실제 문장을 수록해 실록을 읽는 재미까지 느낄 수 있다. 청소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재미있게 읽히는 역사서를 찾으시는 분들이라면, 《조선왕조실록》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 책에 주목해보시길 바란다.
순조 때 기록된 《두문동실기》에 따르면 조선 건국을 인정할 수 없었던 조의생, 맹호성 등 72명의 고려 관료들이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에 있던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했다고 해요. 조선에 많은 인재가 필요했던 이성계는 이들에게 조정으로 나와 백성을 위해 일하라고 여러 번 권유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들은 조선 왕조를 받들 수 없다며 계속 거부했어요. 이성계는 자신을 따르지 않고, 고려만을 그리워하는 이들로 인해 민심이 흔들릴까 두려웠어요. 어떡하든 두문동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렀는데, 이들은 고려의 충신으로 불타 죽는 것을 선택해요. (…) 이후 사람들은 집 밖에 나가지 않는 행동을 ‘두문불출’이라 불렀습니다. / 26p
임산부가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출산 한 달 전부터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는 조치를 한 거예요.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산모의 남편도 한 달 동안 복무를 면제하여, 아내와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볼 수 있도록 했어요. 아마도 이것은 남편에게 출산 휴가를 준 세계 최초의 출산 장려 정책이 아닐까 생각돼요. 그렇다면 세종의 출산 정책은 비단 인구 증가만이 목적이 아닌 천민도 백성으로 여기며 아껴 주려는 애민 정신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 85p
개인적으로는 성종 시절에 쓰인 기록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 중 하나가 “가난해서 시집가지 못한 자를 뽑아 관에서 치장하는 밑천을 주어 그들을 시집보내도록 하며, 그 나머지도 혼인시키도록 독촉하고 아울러 가장을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는 기록이다. 성종은 혼기가 찬 여인들이 형편이 어려워 혼인하지 못하는 것을 크게 우려하며 재위 기간 내내 국가가 나서서 도와주게 했다 한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을 돌보려 노력한 점이 인상적인데, 그 와중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남성과 잠자리를 가져 문란한 생활을 한 어우동에게는 최고의 형벌인 사형을 선고했다 하니, 성리학적 질서를 조선에 뿌리내리고 싶었던 군주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보게 한다.
한편, 부국강병을 꿈꿨던 성종은 후추가 국제 사회에서 매우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후추 씨를 구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이를 악용하는 바람에 오히려 국가 경제에 부담이 되었는데, 오랜 세월 아무 성과가 없는 만큼 포기하라는 신하들의 조언을 듣고 성종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포기했다 한다. 책은 이에 대해 성종이 부국강병을 이루어 백성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면서도 실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 농업만 강조하던 사회 분위기를 뛰어 넘어 후추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점 등을 높이 평가한다. 덕분에 오늘날 왜 성종이 세종 못지않은 성군으로 평가받는지 이 책을 통해 실감하게 된다.
유네스코에서도 1990년부터 세계의 문맹 퇴치에 공헌을 한 사람에게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을 주고 있어요. 이것은 한글이 문맹을 낮추는 데 최고의 문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1998년부터 2002년까지 2,900여 종의 문자에서 한글이 가장 우수하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일까요? 영국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은 “한글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높이 평가했어요. 독일 언어학자 하스펠마트는 10월 9일을 세계 언어의 날로 기념하자고 제안했고요. 어떠세요? 우리 한글이 자랑스럽지 않은가요? 아직도 우리 한글로는 올바른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생각하시나요? / 104p
- 비변사 낭청이 아뢰었다. “대마도주가 보낸 서계 안에 ‘금년 봄에 다수의 적도들이 배를 손질하는데 어떤 나라를 침범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귀국을 침범하고자 한다면 즉시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서계에 ‘침범하려 한다’라고 한 말이 노부나가의 말과 같으니, 믿기 어려운 거짓말이라고 하여 미리 조치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신들이 회의하여 각도의 방어사와 조방장에게 마련하도록 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9권
지금의 관점에서야 이미 예견된 일처럼 보이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7년 전에 이미 일본이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기록이 있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 사이 끊임없이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정보가 흘러들어왔음에도 당시 조정은 종계변무(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조상이 엉뚱하게도 정적이던 이인임으로 되어 있는 명나라 법전 《대명회전》의 내용을 바로잡고자 했던 과정)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만약 조선이 좀 더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더라면 임진왜란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지 않았을지, 혹은 일본이 침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포기할 수도 있지 않았을지 그저 아쉬움만 가득하다.
문제는 조선 후기 여성들이 가체를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필수 용품으로 여겼다는 데 있어요. 많은 여성이 가체를 사는 데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그로 인한 사회적 물의가 연달아 일어났어요. 도대체 가체가 얼마나 비쌌길래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요? (…) 좋은 가체의 경우 여러 채의 집값과 맞먹을 정도로 고가였어요. 지금의 우리는 그렇게 큰 비용을 지불해서 가체를 사지 않겠지만,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신이 엄청난 부자라는 사실을 과시하고자 어떡하든지 가체를 사고 싶어 했어요.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 보니 가체의 가격은 점점 더 높아지기만 했습니다. / 410p
이 책을 읽다보면 《조선왕조실록》이 역사적 사료의 가치를 넘어서서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큰 기록물인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특히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조차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라는 이름으로 기록을 남겼다는 점, 편찬된 실록은 후손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지켰다는 점, ‘수정실록’이 존재하나 기존의 실록은 폐기하지 않고 그대로 보전했다는 점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 무엇을 경계해야 하고 또 배워야 하는지를 엄중히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조선왕조실록》의 가치가 더 크게 다가올 듯하다. 언젠가 이 책을 우리 아이에게도 꼭 권하고 싶다. 아울러 많은 청소년들이 꼭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적극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