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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와 느린 춤을 - 아주 사적인 알츠하이머의 기록
메릴 코머 지음, 윤진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알츠하이머란 한낱 개인의
문제인가?
절망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끝내
놓지 않는 위대한 여정!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늘 함께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정신이 나와 함께 하지 않고, 나와의 그 어떠한 기억도 공유하지 못하는 채로 살아간다면 그 기분은 어떠할까. 알츠하이머라는 몹쓸 병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가는 그 비통한 순간순간을 마주해야 하는 일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는 것 다음으로 두려운
것이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보호자가 되는 것이라면 기꺼이 환자를 간병하는 일에 자처할 수 있겠는가. 58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남편을 무려 20년간 간병해온 아내의 이야기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은 이 가슴 아픈 질문으로 끊임없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아름다운 실화이다.
이 책은 알츠하이머병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고통과 외로운 싸움, 나아가 병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는 법에 대해
매우 진솔하게 이야기해나간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에서 근무하며 학회에서도 매우 저명한 과학자이자 의사인 하비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은 그 이른 시기만큼이나 매우 무섭고 빠르게 그의 이성을 앗아갔다. 환자들마다 병의 진행 속도가 저마다 다른 데다 알츠하이머병을
가깝게 느껴본 적이 없는 까닭에 사소한 변화와 증상들이 서서히 감지되고 있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기의 이상 증세를 ‘신호’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저 잠깐 잊어버린 것으로 치부할 수도, 유독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라 여길 수도, 높은 스트레스로 인한 병증 중에 하나라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다.
최근의 연구결과가 밝혀냈듯이, 행동 변화는 치매의 초기 신호들 중 하나이다. 누군가가 항상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으로 치매의 신호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평소 하던 행동에 변화가 생기거나 평소에
잘할 수 있었던 능력이 저하된다면 문제가 다르다. 하비의 사무실이 무질서했던 것은 치매의 신호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비가 예전과 달리 사무실에서
뭔가를 찾아내지 못하여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 건 정말로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 41P
가슴 아프게도 나의 외할머니에게도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경로당에 가는 척하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버스를 잡아타고 종점에 가기도 하고, 자신의 숨겨둔 돈을
찾으러 가야한다고, 누군가 훔쳐가려 한다고 나에게 조용히 말하기도 했다. 때로는 자신의 유일한 보호자인 나의 부모님이 자신을 학대한다며 낯선
약국에서 버티는 사람에 경찰이 출동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은 굉장히 멀쩡하게 잘 지냈고, 대답 또한 또렷하게
잘 하시곤 해서 이것이 치매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전문 기관으로부터 테스트도 받았지만 아직 치매가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분명
치매 초기 증상인 것 같은데 치매라는 판단을 할 수 없다니. 우리 가족은 당혹스러웠다.
이 책 속의 하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억을 잊는 사소한 일들부터 시작해 험악한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등 여러 이상 징후들이 점점 눈에 띄게 발견되었지만 그는 무려
2년간이나 뚜렷한 진단명을 받지 못했다. 그저 항우울제와 아리셉트 같은 약을 처방 받았을 뿐이다. 정확한 진단이 없이 애매하게 흘러간 시간동안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정확한 치료 행위를 진행시킬 수가 없다는 건 가족들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빠른 진단과 완화할 수 있는
치료법을 진즉에 손썼다면 병의 진행은 좀 더 느려졌을까. 그렇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함께 고통을 겪는 가족들로서는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문제는 단순한 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츠하이머병을 겪는 이들이 보호자에게 때로는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그들은 어마어마한 완력을
행사한다. 저자 역시 이러한 위험에 자주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병에 잠식되어 무력한 인간이 되어 가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는 가치 있는
사람이며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으로 저자는 남편을 다독여야했다. 그것은 남편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 비극적인 현실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저자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여름철에 갑자기 폭풍우가 닥쳐오듯이 얼굴 표정이 갑자기 험악해지면서, 내 손목을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움켜잡았다. 손을 빼지도 못하고 혹시 내 팔을 부러뜨릴까 겁에 질렸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그에게 더 가까지 다가갔다. 머리와 턱을
아래로 내려서 그가 다른 손으로 내 목을 움켜쥐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붙잡히지 않은 팔로 그를 감싸 안으면서 무서움을 억누른 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훌륭한 의사에요.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돕는 사람이잖아요. 힘들어하는 거 잘
알아요. 나는 당신을 도우려는 거에요.” 되풀이해서 이렇게 말했고, 내 말 중 어떤 대목을 그가 알아들었는지, 혹은 내 목소리가 그를
진정시켰는지 몰라도 하비는 힘을 빼고 내 손목을 놓았다. / 106P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가족들은 저마다 나름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저자인 메릴 먼로 역시 모든 커리어를 내려놓고 고군분투한다. 적당한 보호소도 찾아보고
간병인과 교대로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나름 일지를 써가며 그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려 한다. 하지만 보호소에서도
쫓겨나고, 간병을 하느라 재산도 여의치 않다보니 오로지 집에서 간병을 하기로 결정하는 가운데, 어머니마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는 악재가 겹친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를 하지 않는다. 이미 육체와 정신 모두 바닥인 상태인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돌보면서 겪는 그녀의
고통을 여과 없이 담아낸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감탄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
물론, 우리는 일찍 환자를
포기해버리는 이들에게도 질책보다 위로가 필요하다. 그만큼 이 병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혹하며 보호자를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궁지에
몰아간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나의 엄마가 내게 전화해 무너지듯이 울었던 날, 나도 그저 그 무게와 고통을 가늠만 할 뿐이었다. 이
책을 보면서 엄마를 수시로 떠올렸고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다. 얼마나 외로운 싸움이겠는가. 이 싸움을 얼른 끝내기 위해 병을 앓는 사람이 좀 더
일찍 편안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길 바란다면 그 마음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우리를 버렸다. 하비가 예전의 그가 아니라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나까지 같이 버려져야
하나? 나는 그저 선택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열심히 잘 싸우거나, 치료법을 찾아내어 시간을 벌어서 병을 완치할 기회를 가지거나.
최악의 경우가 되면 하비가 치료를 중단하고 평화를 되찾아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게 하거나. 내가 그를 진실하게 대했다는 점에 대하여
하비가 고마워 했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그 사람이 병에 걸려 나을 희망이 없다는 이유로 인생에서 잊혀서는 안된다. / 190P
내가 느끼는 좌절감과 분노는 어머니에 대해서가 아니라 병에 대한 것이었어야 했다. 나는 다른
환자보호자들은 어떻게 이런 상황을 견디는지 궁금증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도 자식의 기대와 부모가 필요로 하는 것 사이 어딘가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극도의 피로감이 죄의식보다 더 커지는 순간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조언은, 각자가 처한
생활환경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보호자들은 도대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이제 더 이상은 못 하겠어.”라고 포기하게 되는 걸까? / 238P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알츠하이머병을
정면으로 응시한 메릴 먼로는 일반 대중의 눈에 이 병이 잘못 그려지고 있는 것을 애통해한다. TV에서는 알츠하이머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동떨어진 광고들이 만연할 뿐, 실상 그 민낯을 드러내는 일에는 주저한다. 노인 인구가 증가하고 잠재적 환자들이 늘어가는 시대에 여전히
환자, 환자보호자들에 대한 처우나 제도 개선의 변화 역시 미비하다. 결국, 그녀는 하비를 간병하면서 겪는 일들을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한다.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어떤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비의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도 있고, 주위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며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으나 그녀는 알츠하이머병의 실상과 이를 곁에서 겪는 가족들의 아픔을 모두가 알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또한 이 사회에 경각심을 고취하고 제도 변화 및 의료 발전에의 촉구를 유발하고자 한다. 공개하지 않고 숨어서 생활한다고 해서 환자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게 아니라고 믿은 것이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은 나아가 알츠하이머병의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임상 연구에 참가하기에 이른다.
매년 테스트에 참여하여 인지능력을 검사하고 자신의 데이터가 과학 연구 발전에 기여토록 한 것이다.
그녀는 이제 알츠하이머를 생각하지
않는 일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디에서든 그것의 미세한 신호를 감지하기도 한다. 가족들과 휴가 간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는 부인,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매번 결과를 다르게 말하는 일행들, 자신이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그
증후들을 발견하곤 한다. 그들도 언젠가는 이 병으로 고통 받을지 모르는 일이다. 특히 가족 중에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한다. 그녀 역시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이 ‘나는 이 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였다. 내가 가족의 짐이 되면 어쩌나, 병이 나를 갉아먹는 것보다 더 큰 공포는 내가 그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기에.
하비와 나는 여러 해 동안 어떤 낯선 이와 느린 춤을 추었다. 알츠하이머는 하비와 나 둘 다를
사로잡았다. 그 병은 훌륭한 정신 하나를 파괴했고, 더불어 우리의 인생을 파괴했다. 나는 병마가 내 목을 조를 때에는 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 병은 내가 다른 방식으로 탈출하는 건 막지 않았다. 내가 다음 춤 상대가 되는 건 단지 시간 문제인걸까?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의 나는 지쳐 있고, 20년의 세월을 잃어버리고 서 있다. 처음 하비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찾고 있었던 것을 지금도 나는 찾고 있다. 우리 모두가 치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
323P
현재 저자는 우연히 좋은 기회를
만나 헤프리 빈 알츠하이머병재단의 CEO가 되었고, 알츠하이머병의 조기 발견과 예방을 위한 활동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이 사회가 알츠하이머병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병을 앓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함께 하는 일상도 변함이 없다. 그녀는 말기 호스피스
치료를 집에서 하기로 하고 그의 마지막 날에 낯선 이의 손길이 닿지 않게 한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비, 자신이 사랑하는 이 남자와
마지막으로 느끼는 촉감이 자신이길 바라는 단 하나의 소망으로 그녀는 언제나처럼 마지막인 듯 하비에게 키스를 건네며 지내고 있을 것이다. 이 땅의
많은 알츠하이머병 환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영원히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엄마에게도 위로와 사랑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