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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이야기 - 역사를 바꾼 은밀한 무역 ㅣ 예문아카이브 역사 사리즈
사이먼 하비 지음, 김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세계사의 흐름 속에는 반드시 ‘밀수’가
있었다!
밀수에 관한 모든 것, 그 은밀한 무역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볼 때 개인이든 국가든 간에 밀수 행위를 자제했던 ‘순수의 시대’는 없었다고 한다. 단순히 역사 속의 한
요소가 아니라 그 흐름을 주도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밀수의 역사가 곧 세계사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가장 어두운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밀수를 통해 세계사를 논한다는 것이 어쩐지 의외이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밀수가 단순히
불법적인 데에 그치지 않고 사상과 문화를 전파하고 혁명을 일으키기도 하며, 각종 패권의 흐름을 이끈 주역이라면 우리는 이 흥미로운 접근법에
관심을 가져볼 의미가 있을 듯하다.
이렇듯 <밀수 이야기>는 15세기 대항해시대부터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문화 등에
있어 밀수에 얽힌 다양한 관점들을 총망라한다. 요약하자면 제1부에서는 지정학적인 맥락에 근거하여 식민지 개척을 통한 탐험과 밀수의 유기성과
향신료, 실크, 은과 같은 주요 밀수품을 중점으로 한 밀수의 전개 과정 및 대항해시대에서의 주요국 패권다툼 등을 다룬다. 제2부에서는 금,
아편, 차, 고무를 중심으로 제국주의 시대에서 보이는 밀수의 양상과 다양한 밀수꾼들의 이야기까지 폭넓게 다룬다. 제3부에서는 밀수가 나라의
흥망성쇠에 어떻게 이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어떠한 형태로 변화되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본다. ‘밀수’라는 키워드를 통해 복잡다단한 세계사를 관통하는
일이란 그만큼 방대하고 해박한 지식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책은 사료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길 만큼 굉장히 사실적인 역사에 근거하고 그 무게감이
묵직하다. 반면 밀수꾼들에 관한 다양한 에피소드 및 각종 비사들도 함께 다루고 있어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 또한 놓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밀수를 떠올리면 가장 가깝게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다면 바로 해적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봤던 해적의
이미지 때문일까, 광활한 카리브 해를 멋지게 누비는 해적선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항해 노선을 따라 카리스마있게 항해사와 선원을 이끄는 선장에
몰입한 나머지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어버릴 때가 있다. 마치 그들은 타고난 바다사냥꾼의 유전자를 지녔을 것이라 응당 생각해왔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영달을 넘어 거대한 논리가 존재했다. 이 시대의 밀수란, 국가적인 사업이자 식민지를 개척하여 경제의 패권을 차지하는 일과
다름없었다. 흔히 밀수꾼을 두고 야만적이거나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이라 규정짓고 있지만 알고 보면 국가의 비공식적인 대리인이자, 정치적
권력 투쟁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고, 때로 애국자였던 점에서 인식을 달리하게 되는 부분이다. 이때 해적이자 밀수꾼이었던 이들은 국가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고 보면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지만 잭 스페로우 선장의 항해 지식을 이용하여
이권을 챙기려는 영국군의 모습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이렇듯 척결해야 하는 대상인 것과 동시에 국가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도 한 이들은
꽤 역설적이다. 결국 밀수 자체가 태생적으로 역설을 안고 있는 셈이다.
카리브 해에서 밀수의 파도가 높아진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필요’ 때문이었으며,
‘야생의 해안’에서 벌어진 담배 밀수나 네덜란드인들의 소금 밀수가 이에 해당했다. 소금의 경우 네덜란드의 상인들에게 필요했을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시급한 문제였으며, 밀수가 국가의 정책과도 연결돼 있다는 증거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비록 불법적인 수단이더라도 일단
재화를 확보한다는 것은 권력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밀수는 필연적으로 큰 사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은 밀수는 더욱 스케일 큰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앞서 살폈듯이 ‘세계 경제’를 만들어냈다. / 109p
밀수를 통해 기계를 들여와 미국은 산업발전을 일으켰고,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왔듯 이로운 식물을 옮겨와 심는 데도
기여한 것이 밀수였다. 밀수는 분명 긍정적인 기능을 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밀수가 옹호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노예를
실어다 옮겼고, 중국을 아편 소굴로 만들었으며, 나치 전범들을 이동시키는 활로를 만들기도 했다. 최근 아프리카로부터의 상아와 다이아몬드를
밀수하는 사례로 보면 반드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과시와 사치에 근거한 밀수가 자행되고 있는 일은 개탄스럽다. 특히 세계의 문화유산을
도굴하고 약탈하는 행위는 분명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획득된 유물들이 유럽과 미국의 장엄한 문화 공간에 전시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그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마치 발달된 새 문명의 일부로서 그 자리에 항상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유도한다고 해도
그 행위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소유권(유물의 원래 위치가 아니라 현재 위치에 대한)에는 무시하지 못할 권력이 숨어 있다.
/ 309p
오늘날에도 여전히 밀수는 존재한다. 알고 보면 도처에 밀수가 존재한다. 불법다운로드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영화나 음악
파일들도 밀수로 거래되는 것들이고, 진품과 유사한 모조품이 유통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국이 명품 핸드백과 같은 최고급 사치품의 ‘슈퍼
모조품’ 생산국으로 유명하다는 저자의 언급은 참으로 부끄럽다. 이밖에 코카인과 헤로인에서부터 무기 거래 또한 암암리에 계속되고 있고, 암시장의
거래도 활발하다. 오히려 공급선 또한 과거보다 훨씬 정교해졌다고 한다. 값싼 제품을 공급받으려는 수요자가 있는 한 여전히 거래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여전히 밀수는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전달하고 시사하는 바들은 어느 특정 집단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번쯤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누구라도 무조건 ‘흑’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존재한다. 무기, 마약, 인신매매
등은 보편적으로 비정상적인 활동으로 간주된다. 반면 모두가 똑같은 관심을 갖고 있는 일상은 우리가 그런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때로는 그곳으로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에 중간의 회색 지대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지대에서는 일상적인 거래와 범죄 행위를 구분하기
어렵고,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을 구분하기도 어렵다. 축제가 펼쳐지는 바로 옆에 비열함이 있고, 비참한 환경 바로 곁에서 풍요로운 삶을
영유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 383p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정학적인 설명에 근거하는 설명이 많다보니 다소 지리적 명칭이나 저자가 설명하는 내용들이
명확하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또한 원문이 그러한 것인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것인지 간혹 비문이나 오문이 있었다는 점도 아쉽다. 하지만 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밀수’라는 독특한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읽어내는 시도가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