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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함 속 세계사 - 129통의 매혹적인 편지로 엿보는 역사의 이면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최안나 옮김 / 시공사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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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편지에 이토록 놀랍고도 위대한 자취들이 담길 수 있다니!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고 싶다면 이 책에 주목해보라!
괴테는 편지를 가리켜 “한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회고록”이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편지에는 한 사람의 진실과 거짓이, 감정과 추억이, 맹세와 희망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편지는 전쟁이든, 평화든, 예술이든 아니면 문화든 여러 분야에서 인간사를 바꿔놓기도 했고, 한 개인과 개인을 영원으로 묶어두기도 했으며, 역사상 수많은 성취와 파멸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편지란, 한 개인과 세상을 아우르는 역사 그 자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우편함 속 세계사』는 고대 이집트와 유럽, 아프리카, 인도, 중국,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전통, 국가 그리고 인종을 아우르는 총 129통의 편지들을 한 데 모은 책이다. 엘리자베스 1세, 표트르 대제, 로렌초 데 메디치, 오스카 와일드, 안톤 체호프, 에밀 졸라, 스탈린, 체 게바라, 마하트마 간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쓴 편지를 만나볼 수 있다. 한 개인의 내밀한 감정과 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 공공의 목적으로 쓰이거나 정치적 목적의 중대한 사안이 적힌 편지를 통해서는 매우 결정적인 세계사의 한 장면과 숨겨진 이면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꾹꾹 눌러 담아 쓴 편지 한 장에 이토록 위대한 세계사가 담겨 있다니,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고 싶다면 이 책에 주목해보자.
129통의 매혹적인 편지로 엿보는 역사의 이면
여기, 부적절한 사랑에 빠진 이라면 공감할 만한 아주 특별한 편지가 있다. 파리 주재 미국 대사이자 독립선언문 초안을 쓴 인물, 토머스 제퍼슨(43세)이 괴짜 화가의 아내인 마리아 코스웨이(27세)에게 쓴 편지다. 이는 서양사에서 손꼽히는 지성인 중에 한 명이 사랑에 빠져 가슴앓이를 하다못해 ‘머리와 가슴이 나누는 대화’라는 은유로 하여금 사랑에 빠진 이의 고통과 딜레마를 표현한 장면을 볼 수 있다. 가슴은 머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를 꺾을 수 없네. 고통 없이는 즐거움도 없어. 이것이 우리 존재의 법칙일세. 그리고 우리는 이를 순순히 따라야 하네”라고. 이어 1520년부터 46년 동안 오토만제국의 술탄이었던 술래이만 대제가 노예 소녀였던 록셀라나(휘렘 술탄)에게 쓴 편지는 얼어붙은 마음도 단번에 녹아내릴 듯 다정하고 아름다워서 계속 곱씹어 읽게 된다.
나의 외로운 자리 왕좌, 나의 부, 나의 사랑, 나의 달빛
나의 가장 진실한 친구, 나의 동반자, 나의 존재 그 자체, 나의 술탄
아름다운 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자…
나의 봄날, 명랑한 얼굴을 한 나의 사랑, 나의 낮, 나의 연인, 웃음을 터뜨리는 나뭇잎… / 술레이만 대제와 휘렘 술탄이 주고받은 편지 중에서 55p
나는 당신과 전투를 벌이고 싶고, 동시에 당신에게 굴복하고 싶기도 해요. 왜냐하면 여성으로서 나는 당신의 용기를 아끼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을 아끼고, 당신 스스로 짊어진 내면의 분투, 나만이 완전히 깨닫게 된 그것을 아끼고, 당신의 끔찍한 진정성을 아끼기 때문이에요. 나는 당신의 힘을 사랑해요. 당신이 옳아요. 세상은 희화화되어야 해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풍자하는 대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고 있어요. 아,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열정이 있는지! 내가 당신 안에서 느끼는 게 바로 그거예요. 나는 학자나 폭로자나 관찰자를 느끼지 않아요. 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건 바로 피예요. / 아나이스 닌이 헨리 밀러에게 쓴 편지 중에서 61p
자고로 부모는 죽는 날까지 자식 걱정을 한다고 했던가.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과 왕비일지라도 자식 걱정 앞에서는 예외 없이 부모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편지가 있어 눈길을 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통치령의 상속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랑스 왕가로 시집을 간 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꾸짖는 편지다. 외교관이나 장관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무례하게 굴고, 둔하고 나약한 남편 루이 16세를 무시한 채 추파를 던지는 아첨꾼들과 어울린 데에 따른 걱정이 담겨 있다. 아마도 어머니는 딸에게서 재앙을 예견하는 위험한 무언가를 본 게 아니었을까. 마찬가지로 왕과 의회가 종교 갈등으로 대립하다 내전으로 패배한 찰스 1세가 아들인 찰스 2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이 같은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전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울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만약 신께서 네게 성공을 주신다면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복수에는 사용하지 마라. 만약 신께서 어려운 조건하에 네 권리를 회복해주신다면 네가 무엇을 약속했든 꼭 지켜라. 자신도 준수해야 하는 법을 시행한 그 사람들은 자신의 승리가 문제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세상에 반칙과 부정한 방법으로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너는 우리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찰스 1세가 찰스 2세에게 쓴 편지 중에서 108p
나는 네가 너무 쉽게 손에 넣은 성공과 너를 둘러싼 아첨꾼들에 대한 생각으로 그 긴 겨울을 떨며 보냈는데, 너는 쾌락과 터무니없는 과시의 삶에 스스로를 내던졌구나. 왕이 심성이 착해 자신은 즐겁지 않음에도 네게 맞춰주거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빼놓고 쾌락에서 다시 쾌락을 좇는 네 행동 때문에 전에도 마음속 두려움을 담아 편지를 썼는데, 이제 로젠베르크에게 보낸 네 편지를 보고 그런 내 두려움에 다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겠구나…. / 마리아 테레지아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쓴 편지 중에서 2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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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정신없고 과도하게 지저분한 편지가 있다니.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사촌 마리아네와 성적 공모 그리고 기이한 유머를 즐기며 나눈 편지가 그러하다. 편지를 읽다보면 특히 똥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지금 나는 거의 22년 동안 똑같은 오래된 구멍으로 똥을 싸왔고, 하지만 그게 아직 조금도 찢어지지 않았어! 비록 나는 그걸 똥 싸는 데 너무 자주 사용했지만 말이야. 그러고 나서 야금야금 똥을 뜯어먹지.’ 어쩌면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또라이가 아니었을지. 읽으면 읽을수록 훗날 이 말을 한 것에 대해 땅을 치고 후회했을 편지도 눈에 띤다. 페이버앤드페이버의 출판인인 T. S. 엘리엇이 조지 오웰에게 그의 최근작 출간을 거절하는 편지다. 소비에트연방이 어떻게 치명적 테러 국가가 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농장에 비유한 바로 그 작품, 『동물농장』이다. 엘리엇의 깔보는 듯한 출간 거절 편지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게 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리고 긍정적 관점에서 저는 트로츠키파를 선택하는데, 이 작품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오웰 씨는 양쪽 어느 편에서도 강력한 공감을 얻지 못하고 표를 분산시키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순수한 공산주의 관점에서 러시아의 동향을 비판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작은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돼지들은 다른 동물보다 훨씬 지성을 갖추었으니 농장 운영자로는 최적입니다. 사실 그들이 없었다면 동물농장은 태어날 수조차 없었겠지요. 따라서 필요한 것은(누군가는 반대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더 많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더 공공심 있는 돼지들입니다. / T. S. 엘리엇이 조지 오웰에게 쓴 편지 중에서 138p
이 외에도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죽음을 앞둔 여인이 남편에게 담담하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는 먼 훗날 지금의 세대에게까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안톤 체호프가 죄수들의 인구 실태 조사를 위해 러시아 극동 지역 사할린의 죄수 유배지에서 관찰한 것들을 기록한 편지에서는 날것 그대로의 역사 속 한 장면을 마주하는 기묘한 감각을 선사하기도 한다. 아울러 프랑스 군대의 불의와 반유대주의를 폭로하기 위해 에밀 졸라가 프랑스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쓴 편지는 한 편의 문학처럼 고귀하다. 드레퓌스의 누명과 반유대주의 공공 캠페인, 은폐 공작 뒤에 있는 사람들을 폭로한 그녀의 목소리 덕분에 드레퓌스는 혐의를 벗고 사면되었으며 대위로 복직해 1935년 중령으로서 사망했다. 그녀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미약해보일지라도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그녀의 글은 커다란 울림을 준다.
신께서 내리시는 벌은 이성을 앗아가실 때 가혹합니다. 종말의 시작이지요. 당신께서는 국민의 아버지 차르이니 광인들이 승리하고 그들 자신과 국민을 파멸로 이끌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들은 독일을 점령하겠지만, 러시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중에 누군가는 러시아처럼 사람들이 고통받고 자신의 피에 잠겨 죽은 나라는 결코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위대한 것들이 파괴되고, 슬픔이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 라스푸틴이 니콜라이 2세에게 쓴 편지 중에서 199p
당신도 칼럼에 썼듯, 사람들은 진주만 폭격이 우리가 일본과 평화로웠고 그들과 조약을 협상하려 최선을 다하던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나가서 진주만에 있는 전함들의 용골에 서서,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한 어떤 기회도 얻지 못한 3,000명의 젊은이와 함께하는 것뿐입니다. 진주만에 가라앉은 두세 척의 다른 전함에 대한 얘기도 진실입니다. 모두 모아 3,000명에서 6,000명의 젊은이가 어떠한 전쟁 선언도 없이 그때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저 살인에 불과했지요. / 해리 트루먼이 어브 컵치넷에게 쓴 편지 중에서 220p
진정 끔찍한 자연철학의 파편이네! 우리는 모든 가능한 세상 중 최고의 곳에서 벌어지는 이런 무서운 재앙에서 운동의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기란 어렵다고 느낄 것이네. 이곳에서는 10만 마리의 개미, 즉 우리 이웃이 개미 언덕 위에서 한순간에 뭉개지고, 결코 탈출할 수 없는 잔해 아래에서 확실히 반쯤 죽어가는 상태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네. 유럽 전역에서 가족들이 거지로 전락하고, 상인 백 명, 즉 자네와 같은 스위스인들의 재산이 리스본의 폐허에 삼켜졌지. 인간의 삶이란 그야말로 운에 좌우되는 게임이 아닌가! / 볼테르가 트롱신에게 쓴 편지 중에서 2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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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책 속에 수록된 편지들을 우리는 세계사 속의 주요 한 장면 속으로 가 닿게 한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역사 속 인물들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고, 그들의 내밀한 감정을 훔쳐보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기도 한다. 어떤 편지들은 문학 작품보다 더 강렬하고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하니, 한 장의 편지에 이토록 놀랍고도 위대한 자취들이 담길 수 있다는 것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편지쓰기에 인색해진 오늘날, 이 책으로 하여금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 한 장이 주는 귀중함을 되새겨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