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끝
미나토 가나에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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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일 거라는 기대감 한 스푼만 덜어내고 나면 따뜻한 감동과 공감 어린 이야기로 마음이 뭉클해진다!

모든 이야기의 끝은 작가가 정해놓은 엔딩이 아니라 읽는 이’ 즉 를 통해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주인공인 에미는 작은 산간 마을에 살고 있다. ‘베이커리 라벤더라는 이름의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부모님이 종일 바쁜 탓에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에미는 그저 멀거니 산 너머 세상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어느 날메이는 친구 미치요로부터 소설을 써 보라는 권유를 받는다이왕이면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미치요의 말에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한 에미는 재미있게 읽어주는 미치요 덕분에 점차 글을 쓰는 즐거움에 빠져든다하지만 미치요가 전학을 가게 되고중학교 2학년이 되자 빵집 일까지 도와주어야 했던 에미는 점차 이야기의 세계에 몰두하기 어려워진다그러던 와중 빵집에 자주 오는 손님인 햄 씨(햄 샌드위치와 햄 롤을 사 가기 때문에)와 추리소설책을 주고받으면서 가까워지고그의 제안으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산 너머 마을로 다녀오게 된다덕분에 보다 넓은 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문예부에 들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가까운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만다.

 

 

 

  이후 햄 씨는 에미와 교제를 약속한 뒤 훗카이도 대학에 합격해 마을을 떠나고그 사이 에미는 잊고 있었던 새로운 추리소설을 써보기로 한다때마침 전학을 갔던 미치요가 당대의 유명한 추리소설가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에미의 안부를 물어온다에미의 새로운 소설을 읽고 싶었던 미치요는 에미가 보내 준 소설을 읽고 이를 마쓰키 류세이에게 보여준다마쓰키 류세이는 에미의 재능을 인정해 제자로 삼을 테니 도쿄로 오라고 제안한다에미는 꿈에 그리던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뜨지만 이미 햄 씨와 약혼한 신세였고여자관계가 난잡하기로 소문난 마쓰키 류세이에게 보낼 수 없다는 햄 씨의 반대에 좌절한다그렇게 부모님으로부터 빵집을 물려받고 햄 씨의 아내로 살아가는 수순으로 정해지려는 찰나이대로 꿈을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에미는 마침내 역으로 향한다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약혼자 햄 씨가 와 있다…….

 

 

 

내가 만약소설을 완결시킨다면?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이야기의 끝은 정해진 수순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픈 한 산골 소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부모님과 약혼자의 만류를 뒤로한 채 당대 유명 추리 소설가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되기 위해 역으로 향하지만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약혼자가 그녀 앞에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그러면서 작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야기에 다음은 없다결말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고 해야 할까.’ 이 때문에 독자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이게 끝이라고? 48페이지에 이르는 짤막한 이야기는 정말 이렇게 끝이 나는 건가그래서 에미는 어찌되는데부모와 약혼자의 뜻을 꺾지 못하고 고향에 주저앉게 되는 건가혹시나 다음 이야기에서 이 이야기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전혀 다른 시대다른 공간새로운 인물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분명 이런 기분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데이야기의 끝을 읽어나가며 나는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그러면서 책장을 쭉 훑어보던 나는 어느 책을 발견한 순간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란 책 때문이었다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추리 소설가라 평가 받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인 만큼 당연히 냉혹한 살인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구입한 책이었다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책에는 그동안 그가 그려왔던 작품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뭉클한 감동을 동반한 기묘하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반전이 담겨 있었다미스터리 소설의 순한맛이라고 해야 할까미나토 가나에의 이야기의 끝도 분명 그러했다추리 소설을 좋아하지만 이 작가의 작품은 미처 읽어보지 못했기에이번만큼은 그 명성을 제대로 느껴보리라 마음먹었던 나로서는 한 방 먹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 소설마치 조각조각 잘려나간 이야기가 한 데로 모여 들어 어느 새 커다란 이야기로 완성되는 구성이 기대하던 추리 소설은 아니지만 색다른 미스터리를 선사한다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 속에서 고민하는 각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에미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여정은결국 모든 이야기의 끝은 작가가 정해놓은 엔딩이 아니라 읽는 이’ 즉 를 통해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가끔 그렇게 먼 곳을 보는데 뭘 보는 거야?”

산 너무 세계요가보고 싶지만 안 되니까 상상만 하는 거예요.” / 20p

 

 

사실은 모에가 쓴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몇 줄 읽자마자 아무래도 모에는 아닌 것 같다문체도 시대 설정도 너무 구식이다마쓰키 류세이가 살아 활약하고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사오십 년 전일까그보다 이는 허구일까사실일까어느 쪽이든 내가 모르는 시대의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만에미가 어떻게 되었을지 영 마음이 쓰인다.

에미가 나였다면류이치는 어떻게 했을까. / 73p

 

 

하지만 자네 작품에는 뭔가 딱 한 걸음 정도가 부족해구로키 선생의 그런 지적은 아마 전하지 않았으리라부족한 뭔가는 존경하는 사진작가의 조수를 하면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이제는 어묵 공장을 잇게 되었으니 그럴 기회는 사라졌고 프로가 된다는 꿈도 끝났다고 스스로 다독이고 있다.

도모코 씨가 얼마나 내 사정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른다이 소설을 본인의 해석이나 의견을 더하지 않고 내게 건넨 것은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의미일까.

내가 만약소설을 완결시킨다면……. / 128p

 

 

 



 

 

 

 

꿈을 빼앗긴다는 거어떤 기분이야?”

 

 

  에미가 하늘 저편가 닿지 못할 것 같던 산 너머의 세계를 늘 상상했듯 우리는 저마다 완성하지 못한 꿈을 생각하곤 한다소설 속의 등장인물들 역시 에미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연인처한 상황친구와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방해 받거나 또는 좌절된 꿈들을 떠올린다사진작가가 되기를 꿈꾸지만 가업을 이어야 하는 청년자신을 항상 한심하게 바라보고 재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남자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여자가족을 위해 헌신하느라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슴 저 깊은 곳에 봉인한 채 살아온 남자… 이들은 저마다의 입장에서 완결되지 못한 에미의 뒷이야기를 완성해간다그러는 사이 각자의 삶 안에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꿈은 무엇인지이제 그 꿈을 위해 나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를 고심하게 된다. “당신도 타인의 기대에 따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소설이 물어오는 이러한 질문에 우리 또한 대답해볼 일이다.

 

 

 

에미가 어떤 선택을 해야 행복해질지논리로 생각하지 마.

에미가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지아닌지만 생각해.

만들고 싶어서 역으로 온 것이다그렇다면 그대로 달려가 전차를 타면 그만이다그 탓에 햄 씨와 헤어져야 한다면 어쩔 수 없다하지만 햄 씨는 다케오가 아니다에미를 따라

함께 전차를 탔다가 직장인 학교에서 신는 덧신을 신은 채라는 것을 깨닫고 둘이 함께 웃으면 그만이다도쿄까지의 긴 여행 중둘이서 상의하면 된다그리고 도쿄역에 도착했을 때 햄 씨가 물으면 된다.

계속 갈래돌아갈래. / 172p

 

 

 

억지로 끌고 오면 이 아이는 평생 다른 사람 손에 꿈을 잃었다는 울분을 안고 살 것이다너 정도의 애정으로 미코의 울분을 풀 수 있을 리 없다세월이 흐르면 작아지리라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딱딱하게 굳어질 뿐이다일단 굳어진 것을 없애는 것은 어렵다이렇게 말하기는 그렇지만부모라도 그건 힘들다.

지금 눈앞에 있는 문제는 피하지 않고 직면해야 한다당당하게 맞서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사흘 밤낮이 이어져도 상관없다. / 209p

 

 

 



 

 

 

 

  추리소설일 거라는 기대감 한 스푼만 덜어내고 나면 따뜻한 감동과 공감 어린 이야기로 마음이 뭉클해지는 작품이다결이 다른 미나토 가나에의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면이 책을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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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함 속 세계사 - 129통의 매혹적인 편지로 엿보는 역사의 이면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최안나 옮김 / 시공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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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편지에 이토록 놀랍고도 위대한 자취들이 담길 수 있다니!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고 싶다면 이 책에 주목해보라!

 

 

 

  괴테는 편지를 가리켜 한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회고록이라 했다그도 그럴 것이 편지에는 한 사람의 진실과 거짓이감정과 추억이맹세와 희망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편지는 전쟁이든평화든예술이든 아니면 문화든 여러 분야에서 인간사를 바꿔놓기도 했고한 개인과 개인을 영원으로 묶어두기도 했으며역사상 수많은 성취와 파멸을 불러오기도 했다그런 의미에서 편지란한 개인과 세상을 아우르는 역사 그 자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우편함 속 세계사는 고대 이집트와 유럽아프리카인도중국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전통국가 그리고 인종을 아우르는 총 129통의 편지들을 한 데 모은 책이다엘리자베스 1표트르 대제로렌초 데 메디치오스카 와일드안톤 체호프에밀 졸라스탈린체 게바라마하트마 간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쓴 편지를 만나볼 수 있다한 개인의 내밀한 감정과 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공공의 목적으로 쓰이거나 정치적 목적의 중대한 사안이 적힌 편지를 통해서는 매우 결정적인 세계사의 한 장면과 숨겨진 이면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다꾹꾹 눌러 담아 쓴 편지 한 장에 이토록 위대한 세계사가 담겨 있다니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고 싶다면 이 책에 주목해보자.

 

 

 

129통의 매혹적인 편지로 엿보는 역사의 이면

 

 

  여기부적절한 사랑에 빠진 이라면 공감할 만한 아주 특별한 편지가 있다파리 주재 미국 대사이자 독립선언문 초안을 쓴 인물토머스 제퍼슨(43)이 괴짜 화가의 아내인 마리아 코스웨이(27)에게 쓴 편지다이는 서양사에서 손꼽히는 지성인 중에 한 명이 사랑에 빠져 가슴앓이를 하다못해 머리와 가슴이 나누는 대화라는 은유로 하여금 사랑에 빠진 이의 고통과 딜레마를 표현한 장면을 볼 수 있다가슴은 머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를 꺾을 수 없네고통 없이는 즐거움도 없어이것이 우리 존재의 법칙일세그리고 우리는 이를 순순히 따라야 하네라고이어 1520년부터 46년 동안 오토만제국의 술탄이었던 술래이만 대제가 노예 소녀였던 록셀라나(휘렘 술탄)에게 쓴 편지는 얼어붙은 마음도 단번에 녹아내릴 듯 다정하고 아름다워서 계속 곱씹어 읽게 된다.

 

 

 

나의 외로운 자리 왕좌나의 부나의 사랑나의 달빛

나의 가장 진실한 친구나의 동반자나의 존재 그 자체나의 술탄

아름다운 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자

나의 봄날명랑한 얼굴을 한 나의 사랑나의 낮나의 연인웃음을 터뜨리는 나뭇잎… 술레이만 대제와 휘렘 술탄이 주고받은 편지 중에서 55p

 

 

나는 당신과 전투를 벌이고 싶고동시에 당신에게 굴복하고 싶기도 해요왜냐하면 여성으로서 나는 당신의 용기를 아끼고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을 아끼고당신 스스로 짊어진 내면의 분투나만이 완전히 깨닫게 된 그것을 아끼고당신의 끔찍한 진정성을 아끼기 때문이에요나는 당신의 힘을 사랑해요당신이 옳아요세상은 희화화되어야 해요하지만 나는 당신이 풍자하는 대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고 있어요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열정이 있는지내가 당신 안에서 느끼는 게 바로 그거예요나는 학자나 폭로자나 관찰자를 느끼지 않아요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건 바로 피예요. / 아나이스 닌이 헨리 밀러에게 쓴 편지 중에서 61p

 

 

 

  자고로 부모는 죽는 날까지 자식 걱정을 한다고 했던가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과 왕비일지라도 자식 걱정 앞에서는 예외 없이 부모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편지가 있어 눈길을 끈다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통치령의 상속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랑스 왕가로 시집을 간 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꾸짖는 편지다외교관이나 장관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무례하게 굴고둔하고 나약한 남편 루이 16세를 무시한 채 추파를 던지는 아첨꾼들과 어울린 데에 따른 걱정이 담겨 있다아마도 어머니는 딸에게서 재앙을 예견하는 위험한 무언가를 본 게 아니었을까마찬가지로 왕과 의회가 종교 갈등으로 대립하다 내전으로 패배한 찰스 1세가 아들인 찰스 2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이 같은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면서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전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울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만약 신께서 네게 성공을 주신다면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복수에는 사용하지 마라만약 신께서 어려운 조건하에 네 권리를 회복해주신다면 네가 무엇을 약속했든 꼭 지켜라자신도 준수해야 하는 법을 시행한 그 사람들은 자신의 승리가 문제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세상에 반칙과 부정한 방법으로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마라너는 우리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찰스 1세가 찰스 2세에게 쓴 편지 중에서 108p

 

 

나는 네가 너무 쉽게 손에 넣은 성공과 너를 둘러싼 아첨꾼들에 대한 생각으로 그 긴 겨울을 떨며 보냈는데너는 쾌락과 터무니없는 과시의 삶에 스스로를 내던졌구나왕이 심성이 착해 자신은 즐겁지 않음에도 네게 맞춰주거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빼놓고 쾌락에서 다시 쾌락을 좇는 네 행동 때문에 전에도 마음속 두려움을 담아 편지를 썼는데이제 로젠베르크에게 보낸 네 편지를 보고 그런 내 두려움에 다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겠구나. / 마리아 테레지아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쓴 편지 중에서 282p

 

 

 



 

 

 

 

  이토록 정신없고 과도하게 지저분한 편지가 있다니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사촌 마리아네와 성적 공모 그리고 기이한 유머를 즐기며 나눈 편지가 그러하다편지를 읽다보면 특히 똥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지금 나는 거의 22년 동안 똑같은 오래된 구멍으로 똥을 싸왔고하지만 그게 아직 조금도 찢어지지 않았어비록 나는 그걸 똥 싸는 데 너무 자주 사용했지만 말이야그러고 나서 야금야금 똥을 뜯어먹지.’ 어쩌면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또라이가 아니었을지읽으면 읽을수록 훗날 이 말을 한 것에 대해 땅을 치고 후회했을 편지도 눈에 띤다페이버앤드페이버의 출판인인 T. S. 엘리엇이 조지 오웰에게 그의 최근작 출간을 거절하는 편지다소비에트연방이 어떻게 치명적 테러 국가가 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농장에 비유한 바로 그 작품동물농장이다엘리엇의 깔보는 듯한 출간 거절 편지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게 된다. ‘님아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리고 긍정적 관점에서 저는 트로츠키파를 선택하는데이 작품은 설득력이 없습니다제가 생각하기에 오웰 씨는 양쪽 어느 편에서도 강력한 공감을 얻지 못하고 표를 분산시키는 것 같습니다예를 들어 순수한 공산주의 관점에서 러시아의 동향을 비판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작은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 말입니다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돼지들은 다른 동물보다 훨씬 지성을 갖추었으니 농장 운영자로는 최적입니다사실 그들이 없었다면 동물농장은 태어날 수조차 없었겠지요따라서 필요한 것은(누군가는 반대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더 많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더 공공심 있는 돼지들입니다. / T. S. 엘리엇이 조지 오웰에게 쓴 편지 중에서 138p

 

 

 

  이 외에도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죽음을 앞둔 여인이 남편에게 담담하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는 먼 훗날 지금의 세대에게까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고스란히 전달한다안톤 체호프가 죄수들의 인구 실태 조사를 위해 러시아 극동 지역 사할린의 죄수 유배지에서 관찰한 것들을 기록한 편지에서는 날것 그대로의 역사 속 한 장면을 마주하는 기묘한 감각을 선사하기도 한다아울러 프랑스 군대의 불의와 반유대주의를 폭로하기 위해 에밀 졸라가 프랑스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쓴 편지는 한 편의 문학처럼 고귀하다드레퓌스의 누명과 반유대주의 공공 캠페인은폐 공작 뒤에 있는 사람들을 폭로한 그녀의 목소리 덕분에 드레퓌스는 혐의를 벗고 사면되었으며 대위로 복직해 1935년 중령으로서 사망했다그녀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미약해보일지라도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그녀의 글은 커다란 울림을 준다.

 

 

 

신께서 내리시는 벌은 이성을 앗아가실 때 가혹합니다종말의 시작이지요당신께서는 국민의 아버지 차르이니 광인들이 승리하고 그들 자신과 국민을 파멸로 이끌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그렇습니다그들은 독일을 점령하겠지만러시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나중에 누군가는 러시아처럼 사람들이 고통받고 자신의 피에 잠겨 죽은 나라는 결코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위대한 것들이 파괴되고슬픔이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 라스푸틴이 니콜라이 2세에게 쓴 편지 중에서 199p

 

 

당신도 칼럼에 썼듯사람들은 진주만 폭격이 우리가 일본과 평화로웠고 그들과 조약을 협상하려 최선을 다하던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당신이 해야 할 일은 나가서 진주만에 있는 전함들의 용골에 서서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한 어떤 기회도 얻지 못한 3,000명의 젊은이와 함께하는 것뿐입니다진주만에 가라앉은 두세 척의 다른 전함에 대한 얘기도 진실입니다모두 모아 3,000명에서 6,000명의 젊은이가 어떠한 전쟁 선언도 없이 그때 죽음을 맞았습니다그저 살인에 불과했지요. / 해리 트루먼이 어브 컵치넷에게 쓴 편지 중에서 220p

 

 

진정 끔찍한 자연철학의 파편이네우리는 모든 가능한 세상 중 최고의 곳에서 벌어지는 이런 무서운 재앙에서 운동의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기란 어렵다고 느낄 것이네이곳에서는 10만 마리의 개미즉 우리 이웃이 개미 언덕 위에서 한순간에 뭉개지고결코 탈출할 수 없는 잔해 아래에서 확실히 반쯤 죽어가는 상태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네유럽 전역에서 가족들이 거지로 전락하고상인 백 명즉 자네와 같은 스위스인들의 재산이 리스본의 폐허에 삼켜졌지인간의 삶이란 그야말로 운에 좌우되는 게임이 아닌가! / 볼테르가 트롱신에게 쓴 편지 중에서 232p

 

 

 



 

 

 

 

  이처럼 책 속에 수록된 편지들을 우리는 세계사 속의 주요 한 장면 속으로 가 닿게 한다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역사 속 인물들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고그들의 내밀한 감정을 훔쳐보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기도 한다어떤 편지들은 문학 작품보다 더 강렬하고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하니한 장의 편지에 이토록 놀랍고도 위대한 자취들이 담길 수 있다는 것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편지쓰기에 인색해진 오늘날이 책으로 하여금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 한 장이 주는 귀중함을 되새겨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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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 선택적 함구증을 가졌던 쌍둥이 자매의 작은 기록들
윤여진.윤여주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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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불안과 상처로 가득했던 시간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들!

말문이 닫힌 아이들의 마음속에 갇혀 있는 말들이제는 먼저 귀를 기울여주세요!

 

 

 

  “학급 회의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친구들은 복도로 나가서 무릎 꿇고 있어라.”

  엄하기로 유명했던 나의 담임선생님은 학급 회의 때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은 아이들을 모두 복도로 불러내셨다그날 아무런 안건을 내지 않은 나를 비롯해 많은 아이들이 우르르 복도로 나가 무릎을 꿇어야했다학급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바랐던 특단의 조치였겠지만말을 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 되어버리는 순간은 학년 내내 나를 괴롭혔다. “더 크게큰 목소리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아이들 앞에서 나의 목소리가 주목 받는 게 부끄러웠던 나에게 선생님의 다그침은 격려가 아니라 그저 고통이었다오죽하면 반에서 4인이 출전한 합창 대회에서 1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등한 기념으로 독창을 해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는 당황해서 아예 입을 떼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평소에는 말을 잘 하지만 유독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혼자 목소리를 내는 게 두려웠던 나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소극적이었는지또 언제 사람들 앞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유년시절을 떠올리면 늘 아무 말도 하지 못해 얼굴만 붉히고 있는 내 모습만 선연히 떠오른다.

 

 

 

어린 시절나는 말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선택적 함구증특정 상황에서 말하기를 거부하는 증상으로불안장애의 범주에 속하며 아동기에 주로 나타난다고 한다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향태아기부터 유아기까지의 직간접적 경험들부모와 교사의 양육과정가족 환경영유아기의 분리불안 등으로 인해 불안도가 매우 높은 채 사회에 나선 아이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고 한다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선택적 함구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그저 아이의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 원인이라 여겼었다내가 그러했던 것처럼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인 쌍둥이 자매는 비슷한 시기에 함께 선택적 함구증을 앓았다고 한다.

 

 

 

  “뭐가 불안해왜 말이 안 나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런 거 아니야뭐가 불안한 거야이유가 뭔 것 같아?”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그러게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일종의 불안 장애였는데말을 하고 싶은데 못한 게 아니고아예 말을 하고 싶은 욕구도 없었어말만 그런 게 아니고 표정도 안 지어졌어웃는 것도우는 것도 못했어움직이는 것도 부자연스러웠어그렇게 편하지 않은 장소에서는 늘 무표정한 마네킹 같았어.” 쌍둥이는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늘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그들도 뭐라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 시절무엇이 그렇게 무서웠는지왜 불안했는지그 이유가 무엇인지그저 쳐다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싫었고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겁이 났다고 한다예상치 못한 일들이 펼쳐지는 것이 두려웠고그래서 약속이나 한 듯 집 밖에만 나서면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그렇게 그들은 얼음쌍둥이가 되어간 것이다.

 

 

 

  비록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착실하고 어른들의 말을 잘 들었기 때문에 집 안팎으로 큰 문제는 없었고그로인해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년에는 조금씩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으로 방치되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그러는 사이 이들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민과 갈등의 소란스러움을 혼자 겪어내야 했고그런 순간들이 쌓일수록 삶은 늘 벅차고 아팠다고 고백한다뿐만 아니라 선택적 함구증을 앓았던 유년시절의 기억은 성인이 되어서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낯선 환경을 싫어하는 아이를 보며 자신의 유년시절과 겹쳐보게 되고혹여 내 아이도 선택적 함구증을 앓게 되는 게 아닐지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체육 시간마다 오늘은 부디 교실 수업이길하고 기도하던 어린 소녀신발 갈아 신는 일조차 어려웠던 나는 나 스스로를 초라하고 한심하게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닌 일에 나는 왜 그토록 당당하지 못했을까왜 늘 죄인처럼 숨고 싶었을까사춘기가 다가올수록 나는 자존감이 더욱 낮아졌다. / 97p

 

 

 




 

 

 

 

  이처럼 이제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에는 7년간 입을 꼭 다물었던 선택적 함구증’ 쌍둥이 자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어째서 그들은 이 기나긴 시간동안 말을 하지 않았는지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왔는지이후 어떻게 침묵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는지를 조곤조곤 풀어내고 있다덕분에 이 책을 읽는 동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혼자 목소리를 내는 게 두려웠던 내 유년 시절의 모습이 여러 번 겹쳐져서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사람이 많은 곳보다 혼자서 노는 게 더 편했던 아이눈물이 헤프다고 또 놀림을 당할까봐 꾹꾹 삼켰던 아이혼자서는 얼마든지 잘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하거나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게 두려웠던 아이미움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피해를 받는 게 더 나았던 아이그 모든 게 한 데로 겹쳐져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가 위로가 되고내가 로 있을 수 있었던 시간과 가족에게 사랑받고 사랑하던 빛나는 순간이 있었기에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던 그들의 말에 어찌된 일인지 나까지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다그때의 나는 한심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고그저 단지 조금 달랐을 뿐이라고남들 앞에서 뭐 하나 자연스럽게 잘해낼 수는 없었지만 끈기와 인내심은 뒤지지 않았고 누구보다 성실했다고 나를 칭찬해주는 일은 퍽 위로가 되었다조각난 유리파편을 모으듯 그렇게 내 마음도 하나씩 주섬주섬 챙겨보면서 지난날의 나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우리만의 비밀 놀이터집은 생활의 공간이자 유일한 놀이공간이었다학교를 오가는 발걸음은 단 한 번도 가벼웠던 적이 없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진정한 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가족과 할머니그리고 비밀 놀이터 덕분이다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던 시간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작고 소중한 놀이의 기억들가족에게 사랑받고 사랑하던 빛나는 순간들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살아가는 일이 마냥 쉽지는 않지만 때론 이 기억들이 나를 살게 한다. / 53p

 

 

그 순간내 아이가 나의 예상보다 단단한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심하게 두근거릴 뻔하던 심장이 마침내 행복감에 잦아들었다운동장에 뛰어다니는 이 많은 아이들은낯선 장소에서 평범하게 적응해가는 일이 실로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알까혹여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라 해도 낯선 환경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쓰며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을 만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 91p

 

 

선한 아이야곧 너는 너만의 그 작은 세상을 깨고 나올 수 있어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 113p

 

 

 




 

 

 

 

  책의 말미에선택적 함구증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당부의 이야기가 담겨있어 여기에도 남겨보고자 한다저자는 먼저 아이의 감정을 이해해주라고 말한다선택적 함구증을 겪고 있는 아이들은 평소 소외감과 고립감에 시달린다그래서 의견표현이 없는 것은 별다른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불안하구나”, “너 힘들구나”, “오늘은 못했지만다음에는 잘할 수 있을 거야.” 하고 아이가 자신이 겪는 감정을 부모가 이해한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둘째는 아이들에게 말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말 못하는 아이라고 규정 짓기보다 목소리를 내는 일이 덜 부담스러운 환경을 만들어주고침묵마저도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자.

 

 

 

  또 부모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응원해주는 것도 중요하다시간이 지나면 덜 해지더라고조금만 용기를 내면 금방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특히 유치원이나 학교 입학 전과 같이 환경의 변화를 앞두고 있을 때아이에게 긍정적인 힘을 불어넣어주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이 외에도 말하는 것이 무서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작은 경험들부모가 먼저 나서서 아이를 배려한다는 생각에 우리 아이는 말을 안 해요라고 단정짓거나 폭로하지 않기언젠가 나을 거라고 방치해두기 보다 미리 전문가를 찾아가 도움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하니 참고해야겠다.

 

 

 

내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도성인이 되었을 때도내 안의 그 아이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늘 수치심에 젖은 채 성장하지 않는 그 작은 아이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기보다 회피하기를 택했던 것 아닐까.

만약 나의 아들딸이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상상해보니 큰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그 파도에 모래성 같은 내 마음이 풀썩 무너졌다나의 자식들만 나와의 안정적인 애착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구나내 속의 작은 문신 아이도 애착이 필요했던 거로구나이제 와서 그것을 깨달았다. / 178p

 

 

본래 내향적인 성향이 강한 이 아이들은스스로가 가진 섬세함을 바탕으로 주변 환경을 모색하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기에 사려 깊고 배려심이 좋은 편입니다비록 사회생활에 실패하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스스로 위축되기도 하지만한편으로 그 시간들은 본래의 성향을 강점으로 배양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요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춘 자들이기에지독한 마법에서 풀리게 되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원래 그랬던 것처럼’ 진행이 됩니다가면 속 나 자신의 원래 모습을 사회에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본격적으로 문제 해결이 된 셈이지요. / 282p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말은 생소할 수 있겠지만 우리 주변에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성격으로 규정짓고언젠가는 괜찮아지리라는 막연한 낙관으로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아이가 스스로 알을 깨부수고 나오기란 어려운 일이다이 책을 읽고 말하지 않는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부모가 보다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아울러 똑같은 상처를 겪었던 어른이들도 이 책을 통해 스스로를 격려해주고 위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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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이와 차이 - 장애를 지닌 언어학자의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얀 그루에 지음, 손화수 옮김, 김원영 추천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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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사려 깊은 언어로 고찰한 아름다운 책!

 

 

 

    『우리의 사이와 차이는 세 살 때 척수근육위축증이라는 난치성 유전질환을 진단받은 언어학자 얀 그루에의 자전적 에세이다척수근육위축증이란표준적인 임상 사례에 따르면 스무 살이 넘으면 걷지 못하고 서른 살이 넘으면 세상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를 진행성 질환이다. ‘신경근 질환의 임상 징후를 보이며모든 근육 부위에 영향을 미치는 근병증일 것으로 보임부모와 지원 기관의 성인들로부터 상당한 추가 지원과 후속 조치가 필요함.’과 같은일말의 기대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병원과 기관의 음울한 언어에 규정된 삶을 살아온 그다.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여전히 걸을 수 있었다한계는 스물다섯 살로 확장되었다나는 스물다섯 살이 되었고여전히 걸을 수 있었다한계는 서른 살로 확장되었다나는 서른 살을 넘겼다.’ 그렇게 미래를 약속할 없는 시간을 통과하며 이제는 오슬로대학교의 언어학 교수이자한 아내의 남편이자한 아이의 아빠로 이렇게 살아남은 그는 이 책을 통해 한 인간으로 거듭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한 인간으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그는 이 책을 통해 장애를 지닌 언어학자로서인간의 존재에 관한 깊은 성찰을 자신만의 언어로 실현하려 한다.

 

 

 

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부류에 속한 존재였다.

그 하나는 이상한 동물또 다른 하나는 낯선 하이브리드 생명체였다. / 148p

 

 

 

  “좋아 보인다” “건강해 보인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인사말이지만얀 그루에는 이 사소한 언어에서도 마음이 흔들린다고 한다나의 신체가곧 로 규정 지어진 삶을 살아온 그로서는 사람들이 미처 내뱉지 못하고 삼킨 그 이면의 언어까지 읽어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아직 살아 있었느냐고그리 오래 살지 못할 줄 알았다고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미래를 예단하지 않았건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이미 그의 운명이 하나로 정해진 듯했다.

 

 

  그는 유년 시절에 대해 나는 홀로 있는 시간을 거의 누릴 수 없는 아이였다고 회고한다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했다다른 아이들이 추운 겨울날 운동장에서 뛰어 놀 때 교실에 홀로 있었고다른 아이들이 체육 수업을 받을 때는 물리치료사와 함께 있었다학교의 인턴 교사 또는 정형외과 의사 등등그들은 평가에 근거해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고 정상적인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책임을 진 어른들이었다물론 지원 기관에서 나온 호의적인 사람들은 그에게 선한 시선을 보냈지만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의 선한 시선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힘들다고 솔직히 고백한다그래서 그는 외로웠다하나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하나의 신체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항상 그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무엇보다 타인의 시선이 머무르는 하나의 대상물이 되어야 하는타인이나 조력 기관에 의지해야만 하는 그는 늘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응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그것은 자의와는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삶의 한 형태 속에 내가 배치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이 문서들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다그것은 의약 치료 기관물리치료 기관교육기관정부기관자치기관법률 기관여행사 들의 시선이다이 시선은 나를 하나의 물건운송 문제를 야기하는 상품 정도로 바라보고 있다. / 49p

 

 

이처럼 묘사된 나 자신을 바라보니 매우 이상했다하지만 그것은 기록적 언어이고병원과 기관의 언어였다기록 속에서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 관한 전망도 꽤 많은 자리를 차지했으며그 미래는 매우 어둡고 음울하게만 보였다이러한 언어에서는 모든 긍정적 고려 사항은 잠정적이고 유보적이다병원과 기관의 언어는 절망의 언어다일말의 기대감도 찾아볼 수 없다. / 80p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낙인을 뜻하는 스티그마(Stigma), 즉 신뢰할 수 없는 가시적 표식에 관해 글을 쓴 바 있다스티그마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피부를 불에 지져 표식을 남기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이 표식을 지닌 사람은 탈옥자이거나폴리스(Polis)에 발을 들여 놓기에 적절치 않은 사람이라 간주되었기에 사람들은 이러한 표식을 지닌 이와는 말을 나누거나 함께 어떤 일을 하는 것을 기피했다이 표식을 지닌 사람은 타인의 존중을 받지 못했다선천성 근육질환은병명은휠체어는얀 그루에게 있어 일종의 스티그마인 셈이었다덕분에 그 역시 수치심을 피할 수 없었고타인의 존중을 기대하기 어렵기도 했다정상에서 벗어난 아이무리에서 튀는 아이무리를 귀찮게 하는 아이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죠여긴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얼른 나가세요…….

 

 

 

휠체어 사용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아닌 타인이 되는 것을 강요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비좁은 길을 지날 때나 묵직한 대문을 지날 때면 협상을 하거나 밀어붙여야 한다의도치 않게 나 자신이 방해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교장 선생님(이 학교나 저 학교나 할 것 없이)은 학교 건물에 자동문을 설치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아니라고 했다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다른 학생들이 문을 열어 주고 붙잡아 주면 된다고 했다타인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던가도덕적 경험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도덕적 교훈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 104p

 

 

나는 요구 사항이 많은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다그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으로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문제 그 자체로 인식될 여지가 많다그들이 내게 차마 던지지 못했던 질문은 모든 질문 중에서 가장 명백한 것이었다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 150p

 

 

 

  이처럼 병의 진단은 마치 중력장처럼 그의 일생 전체를 무겁고 강렬하게 끌어당긴다그것은 곧 그의 정체성이 되고 그의 삶 곳곳에서 일상을 지배한다때문에 그는 자신의 삶이 생존에 관한 역사이며 불행에서 구제된 존재였음을 안다그래서 자신을 닮은 사람들닮았던 사람들그리고 불행에서 구제되지 못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병약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어른이 되어서도 서사적 형태의 삶에 순응할 적절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평생 상이성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평생 자신만의 이상한 삶을 부여잡고 살아야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무슨 일이 생길까를 물어온다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내가 왜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가?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어른이 되기까지.

내가 인간이 되기까지.

내게서 변했던 것들.

내게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 / 221p

 

 

 



 

 

 

 

  얀 그루에는 없던 몸을 향한 슬픔과 동경은 평생 두고서도 떨쳐 버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하지만 만약 내 삶이 의사들이 예상했던 대로였다면만약 내가 지원 기관들이 예상했던 대로 살았다면만약 내가 더 넓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지 않았더라면내 삶의 가치는 지금보다 줄어들었을까?’ 하고 질문한다그래서일까비록 신체는 한계로 규정 지어졌을지라도 나는 견고한 실체다라고 말하는 그의 성찰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취약성이란 일이 얼마나 쉽게 잘못될 수 있는지 확신하는 것이다. / 176p

 

 

우리는 표본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우리는 길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우리는 각각 다른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직접 시험해 보아야 하며어떠한 보장도 없이 수많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 206p

 

 

 

  이처럼 우리의 사이와 차이는 어린 나이에 난치성 질환을 진단받은 한 남자의 고군분투기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사려 깊은 언어로 고찰한 아름다운 책이다문장 하나하나가 허투루 읽히지 않을 만큼 유려한 언어와 폐부를 찌르는 질문들은 한 권의 철학책 같은 사유하는 즐거움을 준다나를 비롯해 우리 사회는 장애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한계와 범주에 규정된 삶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이 책을 통해 많은 독자들이 숙고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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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1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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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찾아 자의로타의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난민들의 삶을 들여다 보다!

아프리카 문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동아프리카인들의 실존 문제를 매우 예리하게 그려낸 작품!

 

 

 

  얼마 전흑인 노예 역사와의 화해를 시도한 소설 빌러비드를 읽고 흑인 문학 혹은 난민을 주제로 한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그 중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식민주의의 영향과 난민들의 운명에 대한 타협 없고 열정적인 통찰을 보여줬다는 평가와 함께 그가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목되어서이기도 하지만가 닿지 못할 낙원을 향한 상실자들의 애환을 어떠한 방식으로 그려냈는지 궁금해서이기도 했다결과적으로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은 아프리카 문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동아프리카인들의 실존 문제를 매우 예리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어쩌면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놓은 이 세계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이제야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을 통해 조금 엿보았을 뿐이라고소설은 그렇게 내게 말하는 듯했다.

 

 

 

어디에도다시없을 그곳 낙원에 대하여

 

 

  “네가 여기 있는 건 네 아버지가 사이드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야.”

  열두 살의 소년 유수프는 종종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호텔에 방문하곤 하는 부유한 상인아지즈 아저씨의 일행을 따라 집을 나선다영문도 모른 채 아지즈 아저씨네로 오게 된 유수프는 그곳에서 일하는 칼릴이라는 청년으로부터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듣게 된다더 이상 아저씨가 아니라 사이드 즉주인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도그렇게 부모가 진 빚에 팔려 낯선 곳에서 생활하게 된 유수프는 버림받은 기분을 애써 외면해보지만밤마다 흘러나오는 눈물과 무서운 꿈은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쉬이 감추지 못한다특히 밤이 되면 어두운 거리를 배회하며 찾아오는 개들이야말로 유수프를 끊임없이 괴롭힌다창백한 반달 불빛 속에서 으르렁거리며 자신을 집요하게 노려보는 개들의 시선은 이 냉혹한 거리에서 그가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어쩌면 언젠가는그의 아버지가 성공하는 날이 온다면그를 구하러 올지도 몰랐다그는 할 수 있을 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울었다때때로 그는 그들의 모습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간다는 생각에 공포에 질렸다그들의 음성이나 특유의 성향-어머니의 웃음마지못해 짓는 아버지의 웃음-에 대한 생각이 다시 그를 안심시켰다그가 그들을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말이 아니었다사실 시간이 쌓여갈수록 그들을 점점 덜 그리워했다. (그는 주어진 일을 했고칼릴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완수했으며그 에게 의존하게 되었다그리고 허락을 받을 때면정원에서 일했다. / 71p

 

 

  하지만 칼릴을 따라 집안일을 배우게 된 것도 잠시유수프는 아지즈의 뜻에 따라 인도양에 위치한 스와힐리 해안에서 탕가니카 호수와 콩고를 거쳐 그 너머의 깊숙한 내륙으로 들어가는 무역 여행에 동행하게 된다이때부터 소설은 동아프리카 상인과 현지인들부족민들인도인이슬람 아프리카인유럽 식민주의자들로 대표되는 독인인들까지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와 종교가 합류하는 매우 복잡한 역사적 공간인 동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이 땅의 현실과 동아프리카인들의 내밀한 삶을 유수프의 시선을 통해 매우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를 테면 흙처럼 붉게 염색된 머리와 황갈색의 매끈한 몸을 지닌 부족 전사들을 보며 저들은 피를 마시는 야만인이라고 조롱하는 동족들부모의 출신지를 조롱하고 거기에 우스꽝스럽고 불쾌한 이름들을 갖다 붙이는 소년들불행에 저항하기보다 신의 뜻이라며 그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장신구를 얻기 위해 자기 사촌과 이웃들을 파는 이들처음에는 호의로 받아주었으나 역병과 재앙만을 남기고 떠난 여행자들에게 분노하는 원주민 부족들의 적대감 등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곳에서 동아프리카로 모여든 사람들은 거기에서 독특한 다언어적다인종적 문화를 형성하며 역동적으로 살아 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섞이고 또 섞이며 자신들이 누구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번역가 왕은철의 해석처럼모호한 정체성으로 뒤얽힌 동아프리카인들의 삶 속에서 성장해야 했던 유수프의 삶 역시 매번 위태롭게 느껴진다.

 

 

 

소년들의 부모들인 날삯꾼들은 곳곳에서 왔다카와 북쪽 우삼바라 고원지대에서도 왔고고원지대 서쪽의 아름다운 호수지역에서도 왔고전쟁에 짓밟힌 남쪽 사바나에서도 왔다상당수는 해안 출신이었다소년들은 부모 얘기를 하며 웃고그들의 노동요를 흉내내고그들이 귀가할 때 묻어오는 혐오스럽고 시큼한 냄새에 얽힌 이야기들을 서로 비교했다그들은 서로 욕하고 조롱해왔던 우스꽝스럽고 불쾌한 이름들을 부모의 출신지에 아무렇게나 갖다붙였다. / 17p

 

 

그들이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유수프는 이제는 병에 걸려 퉁퉁 부은믿을 수 없는 끔찍한 상처들을 도저히 바라볼 수 없었다그는 그런 고통을 보면서 삶이 끝났으면 싶었다그는 그와 같은 것을 본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었다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불탄 오두막 안에도 있었고 관목 가까이에도 있었고 나무 밑에도 있었다. / 169p

 

 

너는 그렇게 많은 아랍인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을지 궁금하겠지그들이 이곳에 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 지역에서 노예들을 사는 것이 나무에서 과일을 따는 것과 같을 때였다그들이 직접 희생자들을 잡아야 했던 것도 아니었지물론 일부는 재미삼아 그러기도 했지만 말이다장신구를 위해 자기 사촌들과 이웃들을 팔려고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거든.” / 176p

 

 

 



 

 

 

 

  무엇보다 유럽 열강 세력들의 아프리카 식민지화는 아프리카인들의 갈등을 촉발시킨 절대적인 계기가 되었던 게 분명하다유수프가 유년시절을 보낸 카와는 독일인들이 내륙의 고지대로 가는 철도 건설을 위한 기지로 삼은 신흥도시였고그 덕분에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때 경기가 급부상하기도 했으나 그만큼 빠르게 식어가면서 도시 전체가 생지옥이 되어가는 과정을 경험해야 했다뿐만 아니라 유수프는 아지즈의 무역 상단을 따라다니면서 어디를 가나 유럽인들이 자신들보다 먼저 와 있는 것을 알게 되고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드는 데만 관심 있는 적들로부터 지켜주러 왔다고 하면서 정작 한 푼도 내지 않고 아름다운 땅을 가져가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이때 유수프가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저 독일인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목매달아 죽인다거나쇠도 씹어 먹을 수 있으며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강탈된 자유와 억압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아프리카인들의 의식 속에 이제 낙원은 그들만의 삶을 일굴 수 있었던 저 먼 과거 혹은 그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제목이 낙원』 인 이유는 그래서 더 뼈아프다.

 

 

 

나는 우리 앞에 있는 시간들이 두려워.” 후세인이 조용히 말하자 하미드는 노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유럽인들은 아주 작정한 것 같아땅을 번창시키는 문제로 싸우다가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짓뭉갤 거야그들이 좋은 일을 하려고 여기에 와 있다고 생각하면 당신들은 바보야그들이 노리는 건 장사가 아니라 땅 자체라고그 안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 / 119p

 

 

땅에서 검은 기름이 솟구치고 사탄의 파수꾼들처럼 생긴 금속탑이 물속에 서 있더래요불길이 화염 문처럼 하늘에 가득했대요거기서 아저씨는 산과 계곡을 넘어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본 곳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갔대요헤라트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더래요과수원과 정원과 시냇물로 가득한 곳이었대요학식과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대요그런데 본질적으로는 전쟁과 모의를 강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대요그래서 그들의 나라들에는 평화가 없었대요. / 144p

 

 

유수프는 악몽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그는 칼릴에게 자신이 여행중에 아주 자주 살이 말랑말랑한 동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껍질에서 막 열린 공간으로 나왔는데혐오스럽고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잡석들과 가시들 속으로 난 길을 맹목적으로 짓이기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그는 마지의 곳 한가운데를 맹목적으로 짓이기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그는 미지의 곳 한가운데를 맹목적으로 통과하는 그들 모두가 그런 상태였다고 말했다자신이 느꼈던 공포는 두려움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말했다진짜로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고꿈속에서 죽음의 가장자리 너머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사람들이 장사를 하려고 그런 공포를 극복해가면서 그토록 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 235p

 

 

 

  이렇듯 소설 낙원은 아버지가 진 빚으로 팔려온 소년 유수프의 성장 이야기이자식민주의의 영향과 혼종된 정체성이 한 데로 뒤섞인 동아프리카인들의 삶을 능수능란하게 엮어낸 수작이다다만한 가지 의문이 내내 떠나질 않는다작가는 왜 주인공을 미소년으로 설정한 것일까유수프의 아름다운 외모는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낯선 부족민들에게까지 호감을 산다심지어 목숨을 잃을 위기로부터 그를 구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얼굴이다그동안 아지즈의 집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님은 신이 너에게 천사의 모습을 주시고 선한 일을 하라고 이곳에 보냈다며 원하는 것을 줄 테니 유수프로 하여금 자신의 병든 몸을 치료해달라고 하기까지 한다이 때문에 유수프가 겪는 시련은 독자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처럼 여겨진다는 데에서 더 큰 의문으로 남는다작가는 왜굳이이런 설정을 한 것일까마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새로운 기회와 타협하지 못하고사랑하는 여인 아미나를 데리고 도망치지도 못한 채 끝내 아지즈와 독일군에게 제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 유수프의 체념이 주는 씁쓸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큰 그림일까.

 

 

 

  그러고 보면 이 소설은 고향과 자유를 상실한 아프리카인들의 처절한 운명을 다루고 있음에도 슴슴하게 읽히는 경향이 있다여기에는 유수프의 시선이 한 몫 한다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아지즈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며 위험천만한 일에 휘말리기도 하지만자신의 삶을 비롯해 주변 인물들을 철저히 방관자적인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아프리카 민족주의에의 향수와 자유를 상실한 난민들의 비극을 감상주의로 포장하지 않고이른바 피해자의 입장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냉소적으로 직시하고 있는 특유의 문체는 아프리카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듯하다.

 

 

 

그는 부모에 대한 가책을 느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그러지 않을 것이었다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수년 전에 그를 버린 사람들이었다이제는 그가 그들을 버릴 차례였다그가 붙잡혀 있는 것으로부터 그들이 느꼈던 안도감은 이제 끝났다그는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고자 했다자유롭게 평원을 돌아다니면서 언젠가 그들한테 들러 그런 삶을 시작하도록 어려운 교훈을 가르쳐준 것에 고맙다고 할지도 몰랐다. / 305p

 

 

수치스러운 것은 그들이 그에게 살도록 강요한그들 모두에게 살도록 강요한 방식이었다그들의 음모와 증오와 보복적인 탐욕이 단순한 미덕들조차 교환과 교역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렸다그는 떠나려고 했다그보다 단순한 것은 없었다모든 것이 그에게 요구하는 억압적인 것들을 피할 수 있는 어딘가로 가야 했다그러나 그는 외로움의 단단한 덩어리가 그의 추방당한 가슴에 오래전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을그리고 어디를 가든 그것이 함께 있으면서 그가 작은 성취를 위해 계획하는 걸 축소시키거나 흩어놓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 308p

 

 

 



 

 

 

 

  마님이 자유를 주겠다고 했는데도 왜 떠나지 않았는지 묻는 유수프에게 노인 음지 함다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내게 자유를 선물로 주었어그녀가 줬지그녀가 그걸 줄 수 있다고 누가 말해줬을까나는 네가 얘기하는 자유가 뭔지 알아내가 태어난 순간 가지고 있던 자유지. (그들은 너를 가두고 쇠사슬로 묶고 네가 가진 하찮은 것까지 모두 남용하지만자유는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야네가 쓸모없어질 때도 여전히 너를 소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자유는 주어지는 것도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자유를 속박당하고 타인의 의지에 나를 맡기곤 한다어쩌면 내 안에서 진정한 자유가 실현되는 그곳이 바로 낙원이 아닐까.

 

 

 

  아프리카라는 낯선 이미지와 토속 언어로 인해 간간이 읽기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읽히는 작품이다무엇보다 인류의 시작점이자 지구에서 두 번째로 큰 대륙이지만 여전히 생소한 아프리카의 모습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자유를 찾아 자의로타의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난민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작품으로도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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