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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끝
미나토 가나에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평점 :

추리소설일 거라는 기대감 한 스푼만 덜어내고 나면 따뜻한 감동과 공감 어린 이야기로 마음이 뭉클해진다!
모든 이야기의 끝은 작가가 정해놓은 엔딩이 아니라 ‘읽는 이’ 즉 ‘나’를 통해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인 에미는 작은 산간 마을에 살고 있다. ‘베이커리 라벤더’라는 이름의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부모님이 종일 바쁜 탓에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에미는 그저 멀거니 산 너머 세상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어느 날, 메이는 친구 미치요로부터 소설을 써 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이왕이면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미치요의 말에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한 에미는 재미있게 읽어주는 미치요 덕분에 점차 글을 쓰는 즐거움에 빠져든다. 하지만 미치요가 전학을 가게 되고,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빵집 일까지 도와주어야 했던 에미는 점차 이야기의 세계에 몰두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던 와중 빵집에 자주 오는 손님인 햄 씨(햄 샌드위치와 햄 롤을 사 가기 때문에)와 추리소설책을 주고받으면서 가까워지고, 그의 제안으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산 너머 마을로 다녀오게 된다. 덕분에 보다 넓은 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문예부에 들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가까운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만다.
이후 햄 씨는 에미와 교제를 약속한 뒤 훗카이도 대학에 합격해 마을을 떠나고, 그 사이 에미는 잊고 있었던 새로운 추리소설을 써보기로 한다. 때마침 전학을 갔던 미치요가 당대의 유명한 추리소설가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에미의 안부를 물어온다. 에미의 새로운 소설을 읽고 싶었던 미치요는 에미가 보내 준 소설을 읽고 이를 마쓰키 류세이에게 보여준다. 마쓰키 류세이는 에미의 재능을 인정해 제자로 삼을 테니 도쿄로 오라고 제안한다. 에미는 꿈에 그리던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뜨지만 이미 햄 씨와 약혼한 신세였고, 여자관계가 난잡하기로 소문난 마쓰키 류세이에게 보낼 수 없다는 햄 씨의 반대에 좌절한다. 그렇게 부모님으로부터 빵집을 물려받고 햄 씨의 아내로 살아가는 수순으로 정해지려는 찰나, 이대로 꿈을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에미는 마침내 역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약혼자 햄 씨가 와 있다…….
내가 만약, 소설을 완결시킨다면?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이야기의 끝』은 정해진 수순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픈 한 산골 소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부모님과 약혼자의 만류를 뒤로한 채 당대 유명 추리 소설가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되기 위해 역으로 향하지만,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약혼자가 그녀 앞에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야기에 다음은 없다. 결말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고 해야 할까.’ 이 때문에 독자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이게 끝이라고? 48페이지에 이르는 짤막한 이야기는 정말 이렇게 끝이 나는 건가? 그래서 에미는 어찌되는데? 부모와 약혼자의 뜻을 꺾지 못하고 고향에 주저앉게 되는 건가? 혹시나 다음 이야기에서 이 이야기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전혀 다른 시대, 다른 공간, 새로운 인물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분명 이런 기분,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데…. 『이야기의 끝』을 읽어나가며 나는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그러면서 책장을 쭉 훑어보던 나는 어느 책을 발견한 순간,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란 책 때문이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추리 소설가라 평가 받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인 만큼 당연히 냉혹한 살인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구입한 책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책에는 그동안 그가 그려왔던 작품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뭉클한 감동을 동반한 기묘하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반전이 담겨 있었다. 미스터리 소설의 순한맛이라고 해야 할까. 미나토 가나에의 『이야기의 끝』도 분명 그러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지만 이 작가의 작품은 미처 읽어보지 못했기에, 이번만큼은 그 명성을 제대로 느껴보리라 마음먹었던 나로서는 한 방 먹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 소설, 마치 조각조각 잘려나간 이야기가 한 데로 모여 들어 어느 새 커다란 이야기로 완성되는 구성이 기대하던 추리 소설은 아니지만 색다른 미스터리를 선사한다.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 속에서 고민하는 각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에미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여정은, 결국 모든 이야기의 끝은 작가가 정해놓은 엔딩이 아니라 ‘읽는 이’ 즉 ‘나’를 통해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가끔 그렇게 먼 곳을 보는데 뭘 보는 거야?”
“산 너무 세계요. 가보고 싶지만 안 되니까 상상만 하는 거예요.” / 20p
사실은 모에가 쓴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몇 줄 읽자마자 아무래도 모에는 아닌 것 같다. 문체도 시대 설정도 너무 구식이다. 마쓰키 류세이가 살아 활약하고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사오십 년 전일까. 그보다 이는 허구일까, 사실일까. 어느 쪽이든 내가 모르는 시대의,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만, 에미가 어떻게 되었을지 영 마음이 쓰인다.
에미가 나였다면, 류이치는 어떻게 했을까. / 73p
하지만 자네 작품에는 뭔가 딱 한 걸음 정도가 부족해. 구로키 선생의 그런 지적은 아마 전하지 않았으리라. 부족한 뭔가는 존경하는 사진작가의 조수를 하면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제는 어묵 공장을 잇게 되었으니 그럴 기회는 사라졌고 프로가 된다는 꿈도 끝났다고 스스로 다독이고 있다.
도모코 씨가 얼마나 내 사정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른다. 이 소설을 본인의 해석이나 의견을 더하지 않고 내게 건넨 것은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의미일까.
내가 만약, 소설을 완결시킨다면……. / 128p


“꿈을 빼앗긴다는 거, 어떤 기분이야?”
에미가 하늘 저편, 가 닿지 못할 것 같던 산 너머의 세계를 늘 상상했듯 우리는 저마다 완성하지 못한 꿈을 생각하곤 한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 역시 에미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 연인, 처한 상황, 친구와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방해 받거나 또는 좌절된 꿈들을 떠올린다. 사진작가가 되기를 꿈꾸지만 가업을 이어야 하는 청년, 자신을 항상 한심하게 바라보고 재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남자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여자, 가족을 위해 헌신하느라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슴 저 깊은 곳에 봉인한 채 살아온 남자… 이들은 저마다의 입장에서 완결되지 못한 에미의 뒷이야기를 완성해간다. 그러는 사이 각자의 삶 안에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꿈은 무엇인지, 이제 그 꿈을 위해 나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를 고심하게 된다. “당신도 타인의 기대에 따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소설이 물어오는 이러한 질문에 우리 또한 대답해볼 일이다.
에미가 어떤 선택을 해야 행복해질지, 논리로 생각하지 마.
에미가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지, 아닌지만 생각해.
만들고 싶어서 역으로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로 달려가 전차를 타면 그만이다. 그 탓에 햄 씨와 헤어져야 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햄 씨는 다케오가 아니다. 에미를 따라
함께 전차를 탔다가 직장인 학교에서 신는 덧신을 신은 채라는 것을 깨닫고 둘이 함께 웃으면 그만이다. 도쿄까지의 긴 여행 중, 둘이서 상의하면 된다. 그리고 도쿄역에 도착했을 때 햄 씨가 물으면 된다.
계속 갈래, 돌아갈래. / 172p
억지로 끌고 오면 이 아이는 평생 다른 사람 손에 꿈을 잃었다는 울분을 안고 살 것이다. 너 정도의 애정으로 미코의 울분을 풀 수 있을 리 없다. 세월이 흐르면 작아지리라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딱딱하게 굳어질 뿐이다. 일단 굳어진 것을 없애는 것은 어렵다. 이렇게 말하기는 그렇지만, 부모라도 그건 힘들다.
지금 눈앞에 있는 문제는 피하지 않고 직면해야 한다. 당당하게 맞서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사흘 밤낮이 이어져도 상관없다. / 209p


추리소설일 거라는 기대감 한 스푼만 덜어내고 나면 따뜻한 감동과 공감 어린 이야기로 마음이 뭉클해지는 작품이다. 결이 다른 미나토 가나에의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