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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이와 차이 - 장애를 지닌 언어학자의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얀 그루에 지음, 손화수 옮김, 김원영 추천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평점 :

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사려 깊은 언어로 고찰한 아름다운 책!
『우리의 사이와 차이』는 세 살 때 척수근육위축증이라는 난치성 유전질환을 진단받은 언어학자 얀 그루에의 자전적 에세이다. 척수근육위축증이란, 표준적인 임상 사례에 따르면 스무 살이 넘으면 걷지 못하고 서른 살이 넘으면 세상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를 진행성 질환이다. ‘신경근 질환의 임상 징후를 보이며, 모든 근육 부위에 영향을 미치는 근병증일 것으로 보임. 부모와 지원 기관의 성인들로부터 상당한 추가 지원과 후속 조치가 필요함.’과 같은, 일말의 기대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병원과 기관의 음울한 언어에 규정된 삶을 살아온 그다.
‘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여전히 걸을 수 있었다. 한계는 스물다섯 살로 확장되었다. 나는 스물다섯 살이 되었고, 여전히 걸을 수 있었다. 한계는 서른 살로 확장되었다. 나는 서른 살을 넘겼다.’ 그렇게 미래를 약속할 없는 시간을 통과하며 이제는 오슬로대학교의 언어학 교수이자, 한 아내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로 이렇게 살아남은 그는 이 책을 통해 ‘한 인간으로 거듭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한 인간으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그는 이 책을 통해 장애를 지닌 언어학자로서, 인간의 존재에 관한 깊은 성찰을 자신만의 언어로 실현하려 한다.
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부류에 속한 존재였다.
그 하나는 이상한 동물, 또 다른 하나는 낯선 하이브리드 생명체였다. / 148p
“좋아 보인다” “건강해 보인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인사말이지만, 얀 그루에는 이 사소한 언어에서도 마음이 흔들린다고 한다. 나의 신체가, 곧 ‘나’로 규정 지어진 삶을 살아온 그로서는 사람들이 미처 내뱉지 못하고 삼킨 그 이면의 언어까지 읽어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살아 있었느냐고, 그리 오래 살지 못할 줄 알았다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미래를 예단하지 않았건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이미 그의 운명이 하나로 정해진 듯했다.
그는 유년 시절에 대해 ‘나는 홀로 있는 시간을 거의 누릴 수 없는 아이“였다고 회고한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했다. 다른 아이들이 추운 겨울날 운동장에서 뛰어 놀 때 교실에 홀로 있었고, 다른 아이들이 체육 수업을 받을 때는 물리치료사와 함께 있었다. 학교의 인턴 교사 또는 정형외과 의사 등등. 그들은 평가에 근거해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고 정상적인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책임을 진 어른들이었다. 물론 지원 기관에서 나온 호의적인 사람들은 그에게 선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의 선한 시선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힘들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외로웠다. 하나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하나의 신체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항상 그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타인의 시선이 머무르는 하나의 대상물이 되어야 하는, 타인이나 조력 기관에 의지해야만 하는 그는 늘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응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것은 자의와는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삶의 한 형태 속에 내가 배치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이 문서들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것은 의약 치료 기관, 물리치료 기관, 교육기관, 정부기관, 자치기관, 법률 기관, 여행사 들의 시선이다. 이 시선은 나를 하나의 물건, 운송 문제를 야기하는 상품 정도로 바라보고 있다. / 49p
이처럼 묘사된 나 자신을 바라보니 매우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록적 언어이고, 병원과 기관의 언어였다. 기록 속에서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 관한 전망도 꽤 많은 자리를 차지했으며, 그 미래는 매우 어둡고 음울하게만 보였다. 이러한 언어에서는 모든 긍정적 고려 사항은 잠정적이고 유보적이다. 병원과 기관의 언어는 절망의 언어다. 일말의 기대감도 찾아볼 수 없다. / 80p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낙인을 뜻하는 스티그마(Stigma), 즉 신뢰할 수 없는 가시적 표식에 관해 글을 쓴 바 있다. 스티그마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피부를 불에 지져 표식을 남기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이 표식을 지닌 사람은 탈옥자이거나, 폴리스(Polis)에 발을 들여 놓기에 적절치 않은 사람이라 간주되었기에 사람들은 이러한 표식을 지닌 이와는 말을 나누거나 함께 어떤 일을 하는 것을 기피했다. 이 표식을 지닌 사람은 타인의 존중을 받지 못했다. 선천성 근육질환은, 병명은, 휠체어는, 얀 그루에게 있어 일종의 스티그마인 셈이었다. 덕분에 그 역시 수치심을 피할 수 없었고, 타인의 존중을 기대하기 어렵기도 했다. 정상에서 벗어난 아이, 무리에서 튀는 아이, 무리를 귀찮게 하는 아이,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여긴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얼른 나가세요…….
휠체어 사용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아닌 타인이 되는 것을 강요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좁은 길을 지날 때나 묵직한 대문을 지날 때면 협상을 하거나 밀어붙여야 한다. 의도치 않게 나 자신이 방해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교장 선생님(이 학교나 저 학교나 할 것 없이)은 학교 건물에 자동문을 설치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아니라고 했다.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다른 학생들이 문을 열어 주고 붙잡아 주면 된다고 했다. 타인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던가? 도덕적 경험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도덕적 교훈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 104p
나는 요구 사항이 많은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다. 그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으로.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문제 그 자체로 인식될 여지가 많다. 그들이 내게 차마 던지지 못했던 질문은 모든 질문 중에서 가장 명백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 150p
이처럼 병의 진단은 마치 중력장처럼 그의 일생 전체를 무겁고 강렬하게 끌어당긴다. 그것은 곧 그의 정체성이 되고 그의 삶 곳곳에서 일상을 지배한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삶이 ‘생존에 관한 역사이며 불행에서 구제된 존재’였음을 안다. 그래서 자신을 닮은 사람들, 닮았던 사람들, 그리고 불행에서 구제되지 못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병약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어른이 되어서도 서사적 형태의 삶에 순응할 적절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평생 상이성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 평생 자신만의 이상한 삶을 부여잡고 살아야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무슨 일이 생길까를 물어온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내가 왜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가?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어른이 되기까지.
내가 인간이 되기까지.
내게서 변했던 것들.
내게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 / 221p


얀 그루에는 ‘없던 몸’을 향한 슬픔과 동경은 평생 두고서도 떨쳐 버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만약 내 삶이 의사들이 예상했던 대로였다면, 만약 내가 지원 기관들이 예상했던 대로 살았다면, 만약 내가 더 넓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지 않았더라면, 내 삶의 가치는 지금보다 줄어들었을까?’ 하고 질문한다. 그래서일까, 비록 신체는 한계로 규정 지어졌을지라도 ‘나는 견고한 실체다’라고 말하는 그의 성찰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취약성이란 일이 얼마나 쉽게 잘못될 수 있는지 확신하는 것이다. / 176p
우리는 표본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길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우리는 각각 다른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직접 시험해 보아야 하며, 어떠한 보장도 없이 수많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 206p
이처럼 『우리의 사이와 차이』는 어린 나이에 난치성 질환을 진단받은 한 남자의 고군분투기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사려 깊은 언어로 고찰한 아름다운 책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허투루 읽히지 않을 만큼 유려한 언어와 폐부를 찌르는 질문들은 한 권의 철학책 같은 사유하는 즐거움을 준다. 나를 비롯해 우리 사회는 장애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한계와 범주에 규정된 삶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 책을 통해 많은 독자들이 숙고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